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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12)화 (12/100)

12화

식당 아주머니는 이은의 ‘엄마’에 대해 그녀가 말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다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정지된 핸드폰 번호를 포함해서 모두 다.

그렇지만 과연 그게 정말일까? 이세완이 채권자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훔쳤다고는 했지만 금방 말을 바꿨어. 하지만 워낙에 그 표현이 임팩트가 강해서 말이지. 식당 아주머니는 그걸 기억할 거고, 어쩌면 네 친모한테 얘기할 수도 있을 거야. 그 뒤에 상황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이 판국에 돈 있는 흉내를 내면 그거야말로 멍청한 거잖아.”

“…….”

“네가 처음부터 얼마쯤 뜯길 생각을 하고 온 건 잘 알겠는데 분명히 기억해라. 너는 지금 돈을 뜯어내도 부족한 입장이야. 양육비는 받아내야지! 기다려봐. 최대한으로 뜯어내줄게.”

참 잘난 인물인데 현란한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저런 말을 하니 철 지난 조폭 양아치로밖에 보이지가 않았다.

누가 봐도 천직이다.

이은은 도대체 세완의 머릿속에 든 생각을 모르겠다.

세완이 잘못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냥, 그냥 머리가 복잡했다.

그의 질문을 무시한 이은이 눈 위로 팔을 얹고, 세완에게 질문을 던졌다.

“세완아, 우리 그냥 다시 서울로 갈까?”

“콜. 언제든지 나는 우리 여왕님 뜻대로.”

“……7번 국도를 타면 30분 걸린다고 했던가?”

“그것도 여왕님 뜻대로.”

“넌 줏대도 없냐?”

“나야 원래 줏대 없고 밸 없는 놈이지.”

세완은 내가 줏대랑 밸만 없냐고, 양심도 없고 능력도 없다며 싱그럽게 말했다. 이은은 말문이 막혔다.

“좋겠다. 아무것도 없어서.”

“그렇지. 개인적으로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게 마음 편한 것 같기도 하다.”

부정할 수 없어서 이은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거칠게 숨만 내쉬는 이은을 보며 세완이 혀를 찼다.

주제 넘는다는 것은 안다.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훈수를 둬서는 안 된다는 것도.

험담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도 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사람은 이은의 ‘친엄마’니까.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이은을 보던 세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돈을 뜯어낸다는 건 반쯤은 농담인데, 그거랑은 별개로 사실 별로 좋은 상황 아닌 건 알지?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집은 도박으로 날리고, 딸은 아프다네? 그 여자, 아니 그래. 어머님 아프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고. 네가 원장님한테 들은 건…….”

“엄마가 아프다는 거였어. 신장이식이 필요하다고.”

“…….”

“진실이 뭘까?”

이십몇 년 만에 딸과 연락이 되었는데 도대체 그녀는 어떤 이유로 마지막으로 연락을 한 지 보름 만에 핸드폰을 정지시킨 걸까?

엄마가 아픈 것일까, 아니면 재혼해서 낳은 그 딸이 아픈 것일까?

그녀에게 연락을 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

“다른 건 모르겠고, 보통, 자기가 버린 자식을 설명할 때 돈 잘 벌고 성공했다는 얘길 하지는 않아. 아니, 할 수도 있지. 그런데 적어도 그런 얘기를 할 정도면 딸인지 아들인지 정도는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식당 아주머니는 세완을 ‘엄마’의 아들로 생각 하는 것 같았다.

세완이 말을 애매하게 한 것도 있지만…… 그의 말이 맞다.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할 정도면 최소한 딸인지 아들인지는 이야기를 했겠지.

“식당 아주머니가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기억력 끝내주게 좋던데? 아주머니가 해준 이야기 다시 한번 읊어줘?”

세완의 잘못이 아닌 것은 아는데 쌍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은은 심란했고, 세완은 그런 이은을 보며 더 심란했다.

이 답 안 나오는 상황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를 모르겠다.

선택은 이은이 하는 것이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세완은 무엇도 도울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답답하고 미안했다.

“정말 엄마랑, 그 아줌마……. 아는 사이일까? 며칠 잠깐 일했다고 했잖아. 그렇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 않을까?”

도대체 뭐가 묻고 싶은 건지는 이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맥락 없고 방향 없는 질문에 세완은 언제나 그렇듯 성실하게, 그러나 다정하지는 않게 열심히 대답해줬다.

“시골 동네 빤해. 잘 아는 사이 아니라도 외지사람보다는 내 동네 사람이 우선이지. 내가 열심히 질문을 했지만 그 아줌마도 날 열심히 관찰했을 거야. 그리고 전달했겠지.”

묘하게 디테일하고, 설득력 있는 답변이었다.

시니컬한 목소리가 왠지 낯설어서 이은이 세완을 바라보았다.

세완은 드물게 차갑고 냉정한 표정이었다. 이은이 보는 것을 알고 금방 평소의 모습으로 표정을 바꾸긴 했지만…….

‘얘가 원래 이런 얼굴이었나?’

이은은 흠칫했다.

조금 전 본 세완의 얼굴은 이십 년 넘게 함께하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이은이 알고 있는 이세완은 재벌가의 단 하나뿐인 손자, 이 회장의 핏줄, 금수저, 대책 없는 한량…….

이은은 순간 자신이 이세완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함께 자랐고, 함께 공부했고, 함께 회사를 다녔다. 웬만한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이회장과 세완보다, 이은과 세완이 훨씬 더 오랜 시간을 공유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은은 자신이 정말 세완과 가깝게 지낸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 RRR

벨이 울렸다.

이은은 발신 번호를 확인한 즉시 자신도 모르게 세완을 바라봤다.

엄마다.

아까 전화를 했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정지된 번호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를 모르겠다.

이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했고, 그런 이은을 보며 세완은 전화를 건 이의 정체를 깨달았다.

세완이 수화기 너머 누군가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예상을 안 벗어나네.”

난로 위 뜨거운 도시락을 든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이은을 보며 세완이 씁쓸함을 삼켰다. 그러나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철없는 망나니, 생각 없는 사고뭉치 이세완이라지만 지켜야 할 선은 알고 있다. 전화를 받느냐 안 받느냐는 온전히 이은의 몫이다.

세완이 그렇게 염세적인 사람은 아닌데 이은의 상황을 보고 있노라니 자꾸만 생각나는 스토리가 있다.

살다 보면 좋은 사람들도 많은 것이 인생이라지만 그만큼 믿지 못할 사람, 나쁜 사람들도 많은 것이 인생이다.

갓난쟁이를 버리고 간 주제에 죽은 딸의 보험금을 달라며 소송을 한 부모가 해마다 뉴스에 나오고, 불과 얼마 전에는 보육원에 버리고 간 자식의 자립지원금 500만원을 뺏어간 부모가 이슈가 되었다.

만 18세가 되어서, 달랑 500만원을 들고 사회에 나온 아이에게 지원은 못 해줄망정 그 돈마저 뺏어가는 게 사람이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막말 나오는 나쁜 놈들이 한둘이냐 마는 그런 일이 부지기수인 것이 세상인데 이은은 마음이 약한 건지 순진한 건지 자꾸만 갈대처럼 흔들린다.

세완은 걱정 반, 근심 반으로 이은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중간에 전화가 끊기기를 기도했는데 벨은 계속 울렸고, 이은은 한참을 고민하다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여보, 세요?”

이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고, 상대방 또한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은이니?」

반갑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봉인데, 반갑겠지.’

인간이다 보니 나쁜 방향으로, 최악의 상황을 먼저 가정할 수밖에 없는 세완이 삐딱하게 생각했다.

선택은 김이은의 몫이라고? 개뿔이!

이대로 이은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는 것은 어떨지에 대해 세완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욕이야 원래 먹는 거고, 등짝은 원래 때리라고 있는 거다. 하도 많이 맞아서 그런지 이제 김이은이 때리는 건 아프지도 않다.

뭐, 까짓것 지가 아파봐야 얼마나 아프겠어? 등짝 좀 희생하고 김이은 한 번 살려?

세완이 음험한 눈으로 이은을 바라보았다. 

그런 세완의 생각을 꿈에도 짐작 못 하고, 이은은 엄마에게 도대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질문을 건네야 할지만 생각했다.

「식당에 갔었다는 얘기는 들었어. 거긴 어떻게 알고……. 아니, 탓하자는 건 아니고.」

“전에 그 번호로 전화 주셨잖아요. 그래서요.”

「아, 그래. 음……. 오기 전에 얘기를 했으면 더 좋을 텐데. 나랑 얼굴도 보고. 그렇지?」

이은의 모친은 드디어 마음을 열어 그녀를 만나러 온 딸을 상대로 힘겹게 이야기를 끌고 갔다.

그녀의 딸은 엄마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고개만 끄덕끄덕, 입만 벙긋거렸다.

「그 식당은, 예전에 엄마가 알바를 했던 곳인데, 지금은 안 하고. 거기에서 한 30분 걸리거든. ……올래?」

“…….”

「아니, 그냥 여기까지 왔으니까. 부담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밥 한 끼 먹이고 싶어서.」

더듬더듬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엄마는 처음 전화할 때와 똑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만 들으면 마치 오래전에 헤어진 딸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같이 사는 건…… 혹시 아직 마음 못 정한 거니? 압박을 주는 건 아니고…….」

이은의 엄마는 머뭇머뭇 딸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수상하고 이상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이미 서울로 가자 마음을 먹었는데, 또 이렇게 엄마와 통화를 하고 나니 이은의 마음은 약해진다.

이은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은, 사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져 가는 자신의 마음속을 관조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궁금증만 그 덩치를 키워갔다.

「여기가 포항이잖니. 과메기가 정말 맛있는데. 혹시 먹을 줄 아니? 세상 참 좋아졌어. 여름에도 과메기를 먹을 수 있잖아.」

이은의 엄마는 그녀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다며 돌연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과메기를 못 먹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린 것 자체를 입에 대지 못한다.

오마카세를 먹을 때도 고등어는 빼달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 미세한 비린 맛조차도 참지 못해서.

엄마가 기억을 잘못하고 계신 것인지, 아니면 비린 음식을 못 먹는 그녀의 식성이 보육원에 와서 생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은은 괜스레 자꾸 나쁜 쪽으로만 생각이 든다.

그래서였다. 그녀도 모르게 불쑥 말이 나온 것은.

“그런데 핸드폰은 왜 정지를 해놓으셨어요?”

이은은 말은 뱉자마자 저도 모르게 제 입을 막았고, 핸드폰 너머의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세완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은은 입을 막았던 손으로 세완의 어깨를 때렸다. 세완이 아프다고 낑낑댔지만 넌 좀 더 아파도 된다며 한 번 더 때렸다.

핸드폰 너머의 엄마는 조용했다. 이은은 답을 기다렸다.

그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지만 사실 궁금했다. 정말로. 아주 많이.

“전화…… 했었구나.”

“포항으로 간다는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엄마는 할 말을 고르고 있는 듯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엄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이쪽으로 와. 그럼, 그럼 얘기해줄게. 주소는 문자로 찍어서 보내줄게. 그럼 기다린다.”

“저기, 아니……. 아!”

전화가 끊겼다.

이은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할 말만 다다다 쏟아내고 전화를 끊어버린 엄마를 떠올리며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뭐라고 하시는데?”

“오면 얘기해준다고. 일단 오라고 하시네.”

이은이 긴 날숨과 함께 답변했다.

그 순간 핸드폰에 불이 들어왔다. 주소와, 찾아가는 방법이 적힌 문자였다.

그것을 보며 이은과 세완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필 왜 또 섬이냐. 국도로 30분이면 된다고 했으면서. 배도 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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