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세완은 남의 속도 모르고 그녀의 다이어리 속 사진을 구경했다.
“오! 이은이 네 어릴 때 사진이야? 귀엽다.”
세완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이은은 정말 열심히 번호를 눌렀다.
그녀가 누른 숫자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어 뜨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는 끝까지 11개의 숫자를 다 입력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그리고 녹음된 기계음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뭐야 도대체?”
이은의 얼굴이 혼란으로 일그러졌다.
“왜 그래?”
그제야 이상한 것을 깨달은 세완이 이은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이은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히면 웃음이 나온다고 하더니 지금 그녀가 딱 그 꼴이었다.
“야, 김이은!”
“…….”
“이은아!”
“…….”
“어이! 김 비서!”
세완이 파리 쫓듯 자신의 오른손을 이은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한낮에 갑자기 정신이 나간 자신의 소꿉친구를 두고 세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그럼 이은이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이은은 누가 머리를 한 대 때리기라도 한 듯, 정신이 멍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장 난 기계처럼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은은 기가 막힌다는 듯 하, 소리를 내며 세완을 바라보았다.
세완이 의아해하며 그녀를 보았다. 이은이 말했다.
“없는 번호래.”
“……?”
“엄마 번호. 없는 번호래.”
세완이 눈을 끔벅였다. 반응은 뒤늦게 찾아왔다.
“뭐?”
끼익, 소리와 함께 세완이 두 번째 급정거를 했다.
“무슨 소리야?”
“보시다시피.”
이은이 세완에게 그녀의 핸드폰을 넘겼다.
세완이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통화 버튼을 다시 한번 눌렀다. 그러나 결과는 동일했다.
“너 이 번호로 통화한 적 없어?”
“왜 없어. 몇 번이나 했는데.”
“……근데 이건 뭐냐?”
“그러게.”
이은과 세완은 멀뚱히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언제 했는데?”
“마지막 전화는 보름 전?”
“……보름 만에 전화를 해지할 수 있나?”
“해지야 가능하지만 보통 몇십 년 만에 만난 딸과 연락이 닿은 번호를 해지하지는 않을걸?”
멍청한 이세완을 위해 이은은 스스로의 가슴에 못 박는 이야기를 했다.
“야, 그래도, 그건…….”
내내 돈을 노린 것이라며 이은의 ‘엄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하던 세완이 제 입을 다물 정도로 이은의 목소리는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아닐 거야.”
“아니긴. 그거지. 돈. 그래. 그거였나 보다.”
이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돈을 노리고 연락한 것인데 타깃인 그녀가 꿈쩍을 하지 않는 것 같으니 고작 몇만 원인 전화 요금이 아까워서 해지를 한 것이리라.
아프다는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다 거짓이었나 보다. 그녀가 얼마나 걱정하고 고민하고 갈등했는데…….
혹시 좋지 않은 일이 생겨서 핸드폰을 정지했을 수도 있지만 이은은 어쩐지 그건 아닌 것 같다.
세완에게는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은연중에 경제적인 부분을 언급하던 것이 그녀의 확신을 뒷받침했다.
사람이 너무 억울하니 눈물이 다 나온다. 웃긴 데 눈물이 나온다.
김이은 그녀는 그런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칠 각오 했다. 3년짜리 휴가계라니 내가 미친년이지.
이은이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았다.
“그러지 마.”
세완이 착찹한 표정으로 이은을 말리며 물었다.
“다른 번호로는 통화한 적 없어? 집 전화라거나 뭐 그런 거. 다른 가족도 좋고.”
세완은 헛수고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은에게 연거푸 질문을 던졌다.
이은은 기계처럼 고개만 저었다. 그러다 문득, ‘엄마’의 새 남편과 통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은이 다시 핸드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연신 액정 위에서 흔들렸다.
세완은 말없이 그런 이은을 지켜봤다. 그리고 조용히 소원했다.
제발 번호를 찾아서, 엄마와 연락이 되어서, 김이은 그녀가 더 이상 실망하거나 슬퍼하지 않기를!
세완은 정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일분일초가 한 시간, 한 달처럼 느껴졌다. 돈을 바라고 연락한 것이라 쌍욕을 했지만, 그리고 절대 돈을 줘서는 안 된다 욕에 욕을 했지만 돈 그까짓 것 좀 주면 어때서!
김이은이 뼈 빠지게 번 돈을 넘기는 것이 싫은 거지 그의 돈을 주는 것까지 싫은 건 아니었다.
건물 월세며 주식 배당금이며, 이세완은 숨만 쉬어도 돈이 들어오는 남자다.
그 돈 중의 일부를 불우이웃돕기 한다 생각하면 못 줄 것도 아니었다.
호구 같은 남자는 이은의 마음이 편하다면 그의 재산 중 일부를 떼어줄 생각까지 했다.
세완이 두 근 반, 세 근 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은의 눈치를 살필 때였다.
이은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찾은 모양이다.
세완은 이번에야말로 제발 통화가 연결되길 바랐다.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 이은은 기운 없이 통화를 종료시켰다.
“또 없는 번호래?”
이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완이 마른 입술을 축였다.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번호 하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번호가 모두 다 없는 번호라고 나오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다.
정말 이은이 간절해서 한 연락이라면 보름 만에 번호를 없앨 리가 만무하고, 만약 돈을 위한 연락이라고 해도 무슨 사기꾼이 이렇게 끈기가 없나!
도박판에서도 마지막까지 패를 숨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인간적으로 인내심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돈 벌 자격도 없는 사기꾼이라며 예비 피해자 겸 자발적 호구가 투덜거렸다.
마음이 불편해 견딜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불쌍한 우리 이은이, 도대체 그녀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까지 가슴을 후벼 파는 건지…….
액정전원 꺼진 핸드폰만 멍하니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니 세완의 가슴이 다 답답했다.
깐깐하고 유능한 김 비서 위에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 김이은의 모습이 덧입혀졌다.
일곱 살의 김이은은 너무 어리고 약해서 지켜주고 싶은, 혹은 지켜줘야만 했던 아이였다.
그때의 그녀는 누가 부모님 이야기를 하면 울지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그녀의 죄라면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것밖에 없는데, 그리고 그 또한 결코 아이의 죄가 아닐 텐데 이은은 마치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또 숙였다.
지금의 이은은 정말 딱 그때 같다.
“서울 가자.”
이은이 말했다.
“미안해. 여기까지 데려와서.”
포항 한번 온 게 무슨 큰 죄라고 그러는지.
“운전하는 거 힘들었지? 올라가는 건 내가 할게. 내려오는 것도 내가 할 것을 그랬다.”
내려올 때부터 이은은 제가 운전을 한다고 했다. 세완은 그런 그녀에게 내 차니까 내가 운전하겠다고 했다.
매일 같이 민폐를 끼친 세완은 당당한데, 딱 한 번 민폐도 아닌 것을 끼친 이은은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굴었다.
세완은 그 모양이 정말 보기 싫었다. 그까짓 부모가, 그리고 그까짓 돈이 다 뭐라고!
세완이 이은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빼앗아 최근 기록을 확인했다.
“공오사 이구이에…….”
그리고 그 번호를 자신의 핸드폰에 옮겼다.
“소용없어. 없는 번호라니까? 서울 가자.”
이은이 말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포항시 오천읍 문덕리네.”
세완이 말했다.
“……문덕리?”
“보통 같은 지역은 전화번호도 비슷하잖아? 그거 생각하고 검색했는데……”
세완이 그의 핸드폰 액정을 이은을 향해 내밀며 말했다.
“딱 그 번호가 나왔어. 식당이네. 여기로 가자.”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이은이 당황했다.
그녀는 세완의 핸드폰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뚫어져라 핸드폰만 쳐다보았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은은 갈등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갖가지 가정과 시나리오가 복잡하게 휘몰아쳤다.
짧게는 영화 한 편, 길게는 대하소설 몇 길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세완은 그런 이은을 보며 혀를 찼다.
“세상 참 복잡하게 산다.”
세완이 노골적으로 빈정댔지만 이은에게 그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세완은 이럴 때 이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모범생 김이은이 길이 아닌 곳 앞에서 망설이면 그는 그녀의 등을 떠밀어줘야지! 그가 지난 25년 동안 해온 일이 그것이다.
“겁쟁이네, 겁쟁이.”
“겁쟁이는 누가 겁쟁이야?”
이은은 발끈했고,
“겁쟁이가 아니면 왜 망설여? 가자니까.”
세완이 경쾌하게 다그쳤다.
“그래도 그냥 올라가는 게…….”
“올라간들 네 속이 편하겠어? 다 잊고 살 자신 있어?”
잊은 것처럼 살기야 할 거다. 김이은이니까.
이세완의 비서로, 똑똑하고 야무진 그의 얼음 비서로 이은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잘 살아갈 것이다.
세완을 닦달하고 구박하면서 그룹의 비선 실세로 살아갈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럴 거다.
하지만 그 속까지 아무렇지 않을 리 만무하다.
헛헛하고 텅 비어서 또 자다 일어나 방황하겠지. 멀쩡한 흉내를 내다가 맨발로 집을 나와 엄마를 외치며 울부짖겠지.
“할까 말까 고민될 땐 일단 저질러. 그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과가 나오겠지.”
“……진짜 돈을 바라고 그런 거면 어떻게 해?”
아니면 그 보름 사이에 엄마가 정말 어떻게 되어 버린 거면?
이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전자라면 크게 상처를 받을 거고, 후자라면 이은은 평생 스스로를 원망할 거다.
신장 이식은 못 해줘도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은 볼 수 있었을 기회를 그녀 손으로 차버린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으면 이은은 평생토록 포항이라는 도시를 잊지 못할 거야. 그리고 평생 후회하면서 미련을 갖고 살 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앞에서 이은이 입술만 잘근거렸다. 그리고 그런 이은을 보며 세완이 대신 결정을 내렸다.
세완은 능숙하게 네비게이션에 식당 주소를 찍은 뒤 자연스럽게 안전벨트를 맸다.
“출발한다.”
엑셀을 밟았다.
“엄마얏!”
이은이 소리쳤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못 먹어도 고, 라며 세완은 달리기 시작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되겠지!
미련 때문에 울지도 못하고 끙끙대는 것보다는 시원스럽게 울고 털어버리는 것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세완은 그렇게 생각한다.
* * *
수없이 많은 생각과 가정과 갈등을 하며 문제의 식당에 도착했다.
세완은 차를 세웠고, 이은은 심호흡을 했다.
드디어 엄마를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이은은 알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그립다 할까, 서러웠다 할까, 미웠다 할까.
그녀의 마음을 그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가장 먼저, 나를 왜 버렸냐고 물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왜 연락을 했냐고 질문해야 하는 것일까?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동을 끈 세완이 차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이은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잠깐만.”
왜냐고 물을 줄 알았는데 세완은 말없이 이은의 손등만 가볍게 토닥거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 이은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게, 맞는 걸까? 마음은 진작 먹었는데, 그런데…….”
철혈의 김 비서. 그룹의 비선 실세 등 이은을 수식하는 표현은 많았다. 누군가는 세완이 아닌 이은이 실질적 상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완이 회장에 오르면, 그녀가 부회장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많았다. 그뿐인가? 이 회장이 물러나고 세완이 최대주주가 되면 그녀가 전문경영자로 CEO가 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다.
이은도 그런 야망을 지녔다. 수많은 학위와 커리어는 그런 야망을 뒷받침했다.
이은에게 불가능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은도 지금 이 순간에는 약해졌다.
부모의 유무를 떠나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까지 오른 그녀임에도 막상 결정적인 순간이 되니 보육원에 버려졌던 일곱 살짜리 어린 꼬마가 되고 만다.
덜덜 떨리고 있는 이은의 손을 보던 세완이 가만히 그 손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이은의 손을 잡은 건 이십 년이 넘는 세월 가운데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생각보다 작고, 생각보다 여린, 그리고 차가운 손을 세완이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그냥 집에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