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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8)화 (8/100)

8화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넌 머리만 나쁜 게 아니라 신뢰도도 제로였구나!

이은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을 보듯 세완을 바라보았고, 세완은 그런 이은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거든?”

“뭐가?”

“말씀드린 거 아니라고. 그리고 말씀드릴 거나 있냐? 그냥 포항 가자고만 하고 다른 설명은 하나도 안 했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독립생활 종료에 정신이 팔려서 어제 이은은 세완과 툭탁거리느라 바빴다.

“날 못 믿는 네가 문젠지, 너한테 신뢰를 못 받은 내가 문젠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가야 할 곳이 있다고 말씀드렸어. 잘되면 3년 동안 너랑 안 떨어져 있어도 된다고.”

“……틀린 말은 아닌데 조금 다른 것 같다?”

세완과 함께 포항에 간다는 것은 그도 함께 3년을 쉰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안 떨어져 있어도 된다는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닌데 그렇게 말하면 이 회장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것 같다.

이은이 휴가를 포기한다거나, 휴가를 조기 종료한다거나, 휴가를 일찍 끝내고 돌아온다거나.

“그거야 말귀 잘못 알아들은 할아버지 탓이고.”

세완의 말에 이은의 눈이 짜게 식었다.

아이고, 할아버지! 저런 놈을 손자라고 애지중지하셨습니다요.

“너 그러다 큰일 난다.”

이은은 비서가 아니라 그의 오랜 소꿉친구로서 세완에게 충고했다.

“네가 지금 주식이며 부동산이며 이것저것 많다고 배짱을 부리는 거 같은데 자꾸 그러면 있는 돈 다 뺏기고 맨몸으로 길바닥에 쫓겨나는 수가 있어요.”

순진한 이세완은 명의가 제 것이라고 안심하는 것 같은데 대한민국 재벌한테 안 되는 일이 어디에 있나.

그가 동의를 하든 안 하든 이 회장이 뺏고자 한다면 뺏는 것이다.

간단하게는 명의도용이 있고, 치졸하게 들어가면 금치산자 신청 등이 있다.

그 과정에서 돈이 얼마나 들고, 품이 얼마나 드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사람이 된다는데!

‘……제안해볼까?’

세완의 교육방법을 떠올리던 이은은 순간 솔깃했다. 쟤가 세상 무서운 것을 모르고 살아서 저런 거지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거든…….

머리는 세완이나 이은이나 도긴개긴이었다.

아니 어쩌면 세완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게임기가 소중해도 이은은 하루 만에 영어단어 천 개는 못 외운다.

‘그래. 인간에게 불가능은 없어. 없지. 없을 거야.’

세완을 바라보는 이은의 눈빛이 집요해졌다.

감기 기운이 있나? 왜 갑자기 춥지?

세완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은은 그런 세완을 보며 본능만 발달했다며 혀를 찼다. 그리고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무튼 오늘은 출근해야 해.”

“할아버지 허락도 떨어졌는데 무슨 출근?”

“네 윗사람은 회장님밖에 없어? 그리고 오늘 할 일도 있어.”

“무슨 할 일? 컨벤션도 끝났고 당분간 급한 거 없는데? 그리고 어차피 나한테 중요한 일은 거의 안 오잖아.”

주제 파악을 지나치게 잘해서 문제였다.

“자랑이다. 루팡아.”

“네가 아는지 모르겠는데 내 오랜 소원이 백수, 한량이거든.”

“……몰라. 암튼 중요한 거 있어.”

엊그제 CE부문장에게 요청받은 글로벌시장에서의 지역별 마케팅 전략도 보내 줘야 하고, 신 가전의 후속 제품 출시 일정도 정리해놔야 한다.

시스템반도체를 비롯한 비모메모리분야 글로벌 1위 비전 달성 전략도 세워놔야 한다.

디테일한 부분이야 각 부문 부문장과 실무진들이 가닥을 잡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상무인데 세완도 기본은 알고 있어야지.

그뿐인가? 똘똘한 비서를 뽑아 인수인계도 해야 하고, 한 달 뒤에 있을 ‘상반기 글로벌 전략 회의’에 대한 가이드 라인도 잡아놔야 한다.

현재 판매 중인 BN11의 공급현황도 점검해야 하고, 후속 제품 출시전략도 세워놔야 한다.

극일 가속화를 위한 주요소재의 시장다변화와 국산화 전략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

아직 BS그룹에는 큰 영향이 없지만 현재의 추세라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은은 주섬주섬 중얼중얼 그녀가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늘어놓았다.

짧게는 보름 안에 해야 하는 일부터, 길게는 2, 3년 뒤에 해야 할 일까지 예상해서 나열했다.

신년전략회의도 아직 안 했는데 너는 왜 내후년 전략회의까지 걱정하는 게냐.

세완이 차게 식은 눈으로 물었다.

“이걸 해놔야 네가 좀 편하지.”

친우의 깊은 뜻을 모른다며 이은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없을 때를 대비한 포석이라고 했다. 세완이 물었다.

“왜 네가 없는데? 우리 같이 가는 거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노트북이 있고, 핸드폰이 있고, 인터넷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급한 일이면 연락 오겠지.”

급한 일이 아니어도 연락을 할 것 같기는 한데 그거야 알아서 거르면 되는 거고…….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 말도 안 되는 얘기지.”

“왜 안 되는데?”

세완이 물었다. 이은은 세완에게 인생을 너무 쉽게 산다고 잔소리하지만 세완이 볼 때는 이은이 인생을 너무 어렵게 사는 거다.

“한 번쯤은 아무것도 생각 안 하고 훌쩍 떠나보는 것도 괜찮아.”

그의 말에 이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건 든든한 재벌 회장을 할아버지로 두고 있는 너나 가능한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와 그녀는 분명 함께 자랐는데 이럴 때마다 그녀는 그들의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다.

단순히 성격 탓일 수도 있지만…….

“네가 가자고 했잖아. 그럼 가는 거지. 너처럼 그렇게 하나하나 다 따지고, 남의 사정 봐주고 하다가는 한 달이 지나도 못 갈걸?”

“…….”

“급하면 연락 오겠지. 아니면 자기들이 내려오거나.”

평생을 갑으로 산 사람의 마인드는 참 쉬웠다.

“사고 한 번 친다고 회사가 무너져? 상무랑 비서 한 명 빠진다고 망할 회사면 무너져도 진작 무너졌어야지.”

그 회사가 네가 물려받을 회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전문경영인을 쓴다고는 하는데 세완을 상무 자리에 올려놓은 것을 보니 회장님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것 같다.

쉽게 사는 남자, 그리고 쉽게 살아갈 남자! 

너와 함께라면 포항의 일도 쉬울 수 있을까? 이은이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래. 가자. 기다려. 짐 챙겨서 나올게.”

언젠간 이 충동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세완에게 포항에 함께 가자고 한 것부터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하지만 그래도 그와 함께라면 후회하고 실망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몸을 돌리는 이은의 발걸음이 조금, 아주 조금은 가벼워진 것도 같다.

* * *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그건 이은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은의 마음은 벌써 수백 번도 더 많이 바뀌었고, 세완은 그런 이은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냥 마음을 비워.”

“이게 비운다고 비워지는 일이야?”

“안 비우면 어쩔 건데? 우리 이미 고속도로 위다.”

세완이 잔인한 현실을 알렸다.

“그냥 지금이라도 차 돌리면 안 되나?”

이은의 물음에 세완은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대꾸도 안 하는 세완의 태도에 이은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래. 안 될 것 같더라. 가야지. 가려고 했어.”

“…….”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이은이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세완이 실소를 내뱉었다.

이건 뭐 자아분열이나 이중인격도 아니고…….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의 행동에 이은이 발끈했다.

“너랑은 입장이 다르지!”

“뭐가 다른데?”

“넌 갑이고, 난 을이잖아. 회장님 손자랑 나랑 같냐? 나는 진짜 평범한 직장인이란 말이야.”

평범한 직장인이 이래도 되는 것인가!

이은은 다시 한번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했다. 세완은 어이가 없었다.

“평범은 무슨. 평범한 직장인이 3년이나 휴가를 내냐?”

3년짜리 휴가계는 평생 듣도 보도 못했다며 세완이 뒤끝 있는 타박을 했다. 이은이 발끈했다.

“그건!”

그건 말이 휴가계지 여차하면 처음부터 그만둘 생각을 하고 내지른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그렇다 하더라도 차마 세완에게 그 부분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피차 다 알고 있고, 피차 다 짐작하고 있더라도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그만둘 생각까지 하고 저지른 거라고?”

하지만 그녀는 못 해도 세완은 할 수 있었다. 세완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안 그래도 급한 일 생기면 바로 투입되려고 했어.”

이은이 웅얼거리며 변명했다.

실제로도 그녀는 세완을 위해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표가 아닌 휴가계였다.

“회사 일에 지장 안 생기게 하려고 준비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최근 한 달 동안 그녀가 미친 듯이 바빴던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그녀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근데 결국 결과가 이거다. 이은이 쓰러지듯 차창에 머리를 갖다 댔다.

“회사에선 뭐라고 할까? 난리 났겠지?”

아무리 하는 일이 없다고 해도 명색이 상무인데 무단결근이라니…….

그 와중에 상무 비서까지 빠졌으니 업무 일정이 얼마나 꼬였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상무보다는 상무 비서의 결근이 더 타격이 크겠지만 어쨌든 간에!

“난리 날 게 뭐 있어. 그리고 무단결근 아니라니까?”

어쨌거나 문제의 상무는 당당했다.

할아버지 허락을 맡고 왔고, 그 증거까지 보여줬는데 왜 이리 사람을 못 믿나!

“근데 어제 메시지……. 혹시 회장님 핸드폰 훔쳐서 보낸 거 아냐?”

갑자기 떠오른 의혹이 이은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세완이 어이없어하며 답변했다.

“그 ‘회장님’의 핸드폰은 홍채인식에다가 추가로 비밀번호까지 입력해야 열리거든? 말이 되는 얘기를 해라.”

“그건 그렇지.”

그녀의 회장님이 본인의 소지품을 허술하게 관리하는 분은 아니시다.

그의 꼼꼼함은 유난스러운 구석이 있어 하나부터 열까지 본인이 다 챙겨야 직성이 풀린다.

지금까지 그분이 허술하게 처리한 것은 오직 하나, 하나뿐인 손자에 대한 것뿐이다.

사실 따져보면 허술하게 처리한 것도 아니다. 그 손자의 성격이 유별난 것뿐이지.

“아, 진짜 손자도 못 믿어서…….”

믿을 놈을 믿어야지.

저 반응을 보니 분명 거짓말은 아닌데…….

“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따라온 거야?”

“그건 아니지만…….”

이은이 웅얼거렸다.

회장님의 허락이 떨어졌다면 어쨌든 무단결근은 아닌 건데 왜 이은은 자꾸만 자신이 무단결근이라는 대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이은은 한숨을 내쉬었고, 세완은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이은은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세완에게 비웃음을 당하다니…….

자존심이 상해도 심하게 상하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그게 더 비참했다. 이은은 애먼 차창만 계속해서 머리로 들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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