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말하고자 하면 못 할 것은 아닌데 말하는 게 참 구차했다.
그녀의 상황을 세완이 모르지는 않을 거다. 이 회장은 알고 있을 거고, 세완도 아마 대충은 짐작하고 있겠지.
보육원에 사는 신세야 뭐 다 뻔하지 않은가!
한때는 보육원에 온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원망했던 적도 있었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보니 친척이라는 이유로 남의 자식 떠안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좋은 후원자도 만났고, 그래서 사는 데 별 불만이 없었는데…….
“이은 씨, 어머니라는 분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보육원 원장님의 전화가 지나치게 핵폭탄급이었다.
“많이 아프시다네요.”
돌아가신 줄 안 엄마가 살아 있단다. 많이 아프단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이은은 한동안 카오스 그 자체였다.
세완의 옆에서 막장 드라마를 지나치게 많이 본 탓인지 솔직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왜! 굳이! 이제 와서!
세완이나 이 회장처럼 상위 0.01%에 속하는 삶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잘 먹고 잘살던 이은의 삶에 엄마라는 존재는 지나치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죽은 게 아니었나? 그러면 왜 그녀를 버렸을까? 왜 지금 그녀를 찾는 것일까?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지? 만약 사정이 있어서 그녀를 놔버렸던 거라면 그 이유는 뭐지!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머리로는 안 만나는 게 맞다는 판단을 내렸다. 연락을 해봤자 신파 외에는 더 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무슨 미련이 이렇게 많은지 그녀는 그 번호에 연락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사는 포항으로 내려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면 다 얘기해 줄게.”
“…….”
“엄마랑 1년만, 아니 2년만 함께 살자. 응? 다 얘기해 줄게. 뭐든, 다.”
그녀를 버린 주제에 엄마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애절했다.
이성이 내리는 판단은 언제나 현명하고 차가웠다. 그녀의 삶은, 그리고 그녀의 멘탈은 포항에 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안정적이고 가치 있으리라.
일반 회사원도 일이 년을 쉬면 감을 잃는데 대한민국 경제의 최전선에 서 있는 재벌그룹 후계자의 비서가 몇 년을 쉬면 그건 직장을 내놓겠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그녀가 세완과 함께 자란 소꿉친구 비슷한 것이라고 해도 그건 용납이 안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이 어이없는 상황을 위해 3년이라는 시간을 빼낸 걸까!
“이은 양, 아니 이은 씨! 그 사람이 많이 아파요. 신장 이식이 필요합니다.”
엄마와 재혼했다는 그 남자가 말한 신장 이식을 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회복 기간까지 감안해서 3년이라는 시간을 잡은 걸까?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도 갈피를 못 잡고, 자신의 결정에 스스로도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네가 이걸 이해해줄까? 아니 그 전에 나는 이 상황을 너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은은 세완을 물끄러미 보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하등 쓸데도 없고, 쓸모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이은은 세완에게만은 그걸 내세우게 된다. 서로 볼 것, 못 볼 것 다 봤는데도.
아무리 이 회장이 친손녀처럼 대해주고, 아무리 그녀가 공부를 잘하고 일을 잘해도 이은의 안에선 때때로 비틀린 열등감이 생겨난다.
이러지 말아야 하면서도, 사람 참 초라하게, 그래. 그렇게…….
이은은 세완을 앞에 두고 연신 입술만 달싹였다. 세완이 그녀를 비웃거나 이걸로 약점을 잡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은은 혼자만의 열등감에 아무런 말을 못 한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줄게.”
이은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세완의 얼굴에는 미심쩍음과 불만이 가득했다.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면 단둘밖에 없는 지금이 최적이요, 최상이라는 것은 아는데 사람이라는 것이, 그리고 사람 자존심이라는 것이 쉽게 갈 수 있는 것을 꼭 어렵게 만든다.
“인마!”
“알아. 무슨 말 하려는지. 미안. 근데 상무님아, 이건 나도 생각이 좀 필요한 부분이야.”
당장 그녀도 정리가 안 됐고, 결정을 못 내렸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다고 요점만 딱 짚어서 ‘이십몇 년 만에 엄마가 연락이 왔는데 아프단다. 장기이식이 필요하단다. 그래서 혹시 몰라 3년의 휴가를 신청했다’라고 말하면 세완은 쌍수를 들고 반대할 거다.
그냥 반대만 할까? 어쩌면 감금을 할지도 모르겠다. 군만두만 넣어주고 올드보이 한 편 찍는 거지.
망상이 현실이 될 거 같아 이은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넌 지금 이게 웃기냐?”
“미안.”
이은이 짧게 사과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인 것은 알고 있지만 웃긴 것을 어찌하나. 내내 심각했던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휴식이 깃들었다.
아마 그래서인 것 같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이은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너 나랑 포항 갈래?”
“……갑자기 무슨 소리야?”
“휴가 가자고. 3년 동안. 나랑 같이.”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다. 포항에 가는 것이 맞는지, 안 가는 것이 맞는지. 그리고 세완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맞는지, 하지 않는 것이 맞는지.
어쩌면 내일, 아니 1초 뒤에 그녀는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세완에게 함께 포항으로 가자고 한 것을. 하지만 지금 그녀는 제안하고 싶다.
“나랑 포항 가자. 응?”
시종일관 딱딱한 김 비서가 아니라 함께 자란 소꿉친구 김이은의 제안이었다.
포항에서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너와 함께라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네게 열등감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너로 인해 힘을 얻고 있는 것은 분명하니…….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담은 제안이지만 그 제안을 건넨 이은의 눈동자는 진실했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3년?”
“맥시멈.”
3년 내내 세완을 붙잡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맥시멈.
이은은 제안했고, 세완은 그녀의 제안을 받았다.
“오케이. 콜!”
한 놈도 모자라 두 놈 전부 3년짜리 휴가를 낸다고 하면 이 회장이 방방 뛰다 못해 이번엔 정말 뒷목을 잡고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이은을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여차하면 포항에서 재택근무하지 뭐. 아니면 이참에 백수 라이프도 괜찮고.’
세완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너 짐 안 싸? 빨리 싸.”
“……?”
“김 비서님, 어디서 밑장 빼기야? 여행은 여행이고, 본가소환은 본가소환이지.”
“이상한 사람 만나는 거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너랑 포항 같이 가자고 하지.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러겠냐?”
“휴가는 그 사람이랑 상관없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어디! 쓰읍!”
남자는 남자가 봐야 안다.
다행히 휴가는 남자랑 상관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렇게 혼자 살다가 이상한 남자 만나서 고생하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생각 없이 사는 종자라며 구박받지만, 그리고 실제로도 별로 영양가 있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은의 신랑감은 세완 자신이 봐주고 싶다.
“김이은 씨, 집 놔두고 이렇게 밖에서 사는 거 아니다. 너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 줄 알아?”
“야, 도련님! 너보단 내가 더 잘 알거든?”
“세상엔 나쁜 놈도 많고…….”
“네가 젤 나쁜 놈이거든? 애 딸린 유부남이 뭐냐, 유부남이!”
“아, 몰라. 안 들려. 얼른 짐이나 싸.”
“야!”
세완과 이은이 툭탁툭탁 말싸움을 시작했다.
가끔 귀찮기는 하지만, 그리고 성가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가족이다. 김이은은 이세완이 지켜야지!
아주 오래전부터 세뇌당한 그 전제를 세완은 다시 한번 되새기며 이은을 닦달했다.
“얼른 짐 싸! 겨울옷만 담는데 왜 이리 오래 걸려?”
“네가 싸봐. 옷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러니까 이삿짐센터 부르자니까.”
현재 시각 오후 10시 8분, 세완과 이은의 성대는 건강했다.
* * *
이것저것 생각이 많으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때문에 가끔은 앞뒤 생각 않고 지르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고 한다.
머릿속으로 만리장성을 세웠다 무너뜨렸다 하는 바람에 가끔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있는 이은으로서는 그 간단한 명제에 꽤나 동의를 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니?
이은은 그녀 앞에, 캐리어를 들고 서 있는 상사에게 눈으로 질문했다.
‘뭐야?’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없고, 세완은 늘 그렇듯 지나치게 명랑하고 쾌활하고 해맑았다.
“뭐해? 준비 안 하고.”
“……무슨 준비?”
“내려갈 준비.”
“그러니까 어딜 내려가는데? 상무님, 너 오늘 지방 출장 일정 없어요.”
세완의 일정은 비서인 그녀가 가장 잘 안다.
물론 100% 다 알 수는 없다. 이 회장이 세완에게 다이렉트로 지시를 내렸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보통은 이은을 거쳐 지시를 내리고, 이 회장은 어젯밤에도 그녀에게 그 어떤 지시가 없었으며, 어젯밤 이후 세완의 동선은 이은과 겹친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 회장의 지시는 아니었다.
“출장은 무슨 출장이야. 포항 가야지.”
“……?”
포항을 가기는 갈 거다. 가기는 가는데…….
“저기 상무님, 우리 그 얘기 어제 했거든? 그리고 넌 월급쟁이야. 가고 싶다고 훌쩍 떠날 수 있는 몸이 아니라고. 네가 무슨 드라마 주인공인 줄 알아?”
점점 높아지던 목소리가, 드라마 주인공이냐는 부분에서 절정을 찍었다. 빽, 하고 소리를 지른 이은이 세완을 짜증스레 바라보았다.
‘하! 내가 얠 잠시 믿음직스럽게 생각했었다.’
갑자기 자괴감이 몰려왔다.
알바나 말단 직원도 아니고 한 회사의, 그것도 그룹 본사의 상무면서 사전 준비도 안 하고 3년이나 자리를 비우겠다고? 비서인 그녀도 주변 정리를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렸는데?
이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덤으로 가슴도 두어 번 두드렸다.
“됐고! 가서 출근 준비나 하세요. 상무님, 지금 포항 내려가면 무단결근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상무인데 너무 막 대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씁쓸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집이라 회사가 아니니까…….
이은은 자신의 막말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세완은 역시 이세완이었다.
“무단결근만 아니면 되지?”
“……?”
세완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다녀오거라.」
핸드폰 액정에 적힌 내용은 별것이 없었다. 본론만 충실하게 딱 다섯 글자만 적혀 있었다.
그런데 보낸 사람이 문제였다.
이춘갑. 낯설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이름 석 자가 보였다.
“……회장님이야? 할아버님?”
“응. 할아버지 성함 보이잖아.”
세완이 부연 설명까지 친절하게 해줬다.
아니, 넌 너희 할아버지도 이름으로 저장하니?
핸드폰에 연락처를 저장하는 방법이 사람에 따라 제각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친할아버지까지 이름으로 저장하는 건 도대체 무슨 경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너 내 일 말씀드렸어?”
이은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나는 널 믿고 말한 건데! 이은이 배신감 어린 눈으로 세완을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