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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6)화 (6/100)

6화

의문 속에서 세완이 합리적 의심을 품었다.

우리 할배 요즘 연기학원이라도 다니시나?

세완은 이 회장에 대한 이은의 효심이 그녀를 잡아두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것도 잊고 이참에 할아버지에 대한 콩깍지를 좀 벗으라며 이 회장의 비밀, 혹은 험담을 늘어놓았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 그래도 내가 이 세상에서 널 가장 생각하는 것 같다며 헛소리도 늘어놓았다.

“세상에서 너 하나만 믿으라고?”

“그렇지! 내가 암만 봐도 네가 만나는 그놈, 영 몹쓸 놈이거든. 그놈은 믿으면 안 돼. 그리고 할아버지도 그래. 이것 봐! 내가 거짓말을 좀 하기는 했지만 그걸 또 어떻게 홀라당 낚아채서 널 집 안에 들여? 넌 나한테 뭐라 하지만 그건 애초에 할아버지도 네 편이 아니었다는 거거든.”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걸 세완은 까맣게 잊고 있는 듯했다.

오빠만 믿어라, 오빠만 의지해라, 날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며 세완은 가슴을 탕탕 때렸다.

이은은 세상 모든 남자를 다 믿어도 너만큼은 내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세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암만 노려봐도 이미 물은 엎질러진 다음이었다.

“근데 짐은 언제 가지러 가? 말 나온 김에 오늘 그냥 갔다 올까? 넌 안 가도 돼. 내가 가서 챙겨올게. 혹시 뭐 꼭 챙겨올 거라도 있어?”

세완은 뭐가 그리 좋은 건지 희희낙락 신나게 질문했다.

평소에는 제 발로 물 떠다 마시는 것도 귀찮아 목마른 걸 참는 인간이 오늘따라 지나치게 부지런을 떨었다. 이은은 그 모습에 더 화가 나 세완을 때렸다.

“넌 좀 맞아라. 맞고, 또 맞아라! 진짜 너 오늘 왜 이러니? 왜 이렇게 헛소리야?”

찰싹, 찰싹, 찰싹! 세완을 때리는 찰진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얻어맞는 세완은 물론이고 이 회장이나 춘천댁도 이은을 말리지 않았다.

“아우, 아파! 진짜 아프다니까?”

세완이 예의상 아프다고 추임새를 넣어 주기는 했다.

하지만 아프다고 하면서 표정은 실실 웃고 있어서 이은은 그게 더 화가 났다. 아우, 진짜!

세완을 때리는 이은의 손에는 좀 더 힘이 들어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세완은 기뻐 춤을 추었다.

덩치가 산만 한 청년은 아프거나 말거나 히히히,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김이은의 독립생활은 그렇게 가학과 비틀린 쾌감의 교차점에서 종료를 선언했다.

* * *

평창동으로 들어오라는 최종 선고가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따를 생각은 없었다.

세완에게 잔뜩 분풀이를 한 이은이 이 회장의 방문 앞에 섰다.

-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그녀는 지성인이고, 그래서 이성적인 대화를 하고자 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사방 어디에도 그녀의 편이 없으니 일단 오피스텔에 돌아가 차일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갈아입을 옷도 없고, 오늘은 다시 오피스텔에 가야 할 거 같아요.”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데 어쩌겠나, 정장을 입고 잘 수도 없고.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이 회장은 이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끄덕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고 가서 다시 안 오는 거 아냐?”

세완이 문제였다.

이은의 얼굴이 짜게 식었다.

“넌 좀 조용히 하지?”

이성적 대화를 위해 화가 나는 것도 꾹꾹 참고 있는데 세완이 그녀의 뒤통수를 쳤다.

“할아버지, 제가 따라갈게요. 데리고 가서, 다시 데리고 올게요.”

평소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가 기사 노릇을 자처했다.

“세완이 너만 믿으마.”

이 회장은 옳다구나, 세완에게 낚였다. 이른바 자발적 월척 혹은 셀프 월척이었다.

“지금이 9시니까, 서두르면 12시 안에는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얼른 다녀오려무나. 이은이 너도 괜찮지?”

“……네.”

손발이 척척 잘 맞는 조손의 쿵짝에 이은은 그녀의 계획이 산산이 부서지는 환상을 보았다.

그 결과, 평창동에 다시 들어가기로 한 것이 두 시간 전인데 지금 그녀는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짐을 싸고 있다.

* * *

잘 때 입을 옷과 내일 입을 옷만 가지고 가겠다니까 그럼 내일도 또 와야 하니 옷을 전부 다 챙기란다.

그래서 이걸 하룻밤 만에 어떻게 다 챙기느냐고 했더니 그럼 겨울옷만 챙기란다.

고양이 쥐 생각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내일은 유급휴가를 줄 테니 하나라도 빼먹지 말고 꼼꼼하게 챙기란다. 서두르면 생각해 뒀던 것들도 다 놓고 온다나 어쩐다나.

“하아!”

고마워해야 하나, 고마워하기 전에 뒤통수를 한 대 때려야 하나.

떠올리니 새삼 열이 올랐다. 정수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캐리어에 옷을 담는 이은의 손길이 조금 전보다 더 거칠어졌다.

옆에 있는 어느 한량이 한결 더 눈에 거슬렸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도 거슬렸다. 그냥 존재 자체가 거슬렸다.

고개를 들어 세완을 노려보는 이은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세완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해맑고 행복해 보였다.

세완의 기분과 이은의 기분은 정확하게 반비례했다.

이은은 차곡차곡 예쁘게 쌓이는 자신의 짐들을 볼 때마다 짜증이 백만 배씩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아니, 야밤에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래? 막말로 내가 저 집 식구도 아니고! 설사 식구라고 해도 서른둘이면 독립을 할 나이라고!’

나쁜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혀 위에서 탭댄스를 췄다. 참고 있으려니 입술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야!”

지성이고 나발이고 건달 모드가 된 이은이 세완을 불렀다.

“응? 왜?”

이은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은 저 백치 같은 천진함이 참으로 많이 거슬렸다. 하지만 꼬투리 잡을 건수가 없었다.

유부남을 만난다고 거짓말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지나칠 정도로 많이 때렸고, 전후 사정이야 어쨌든 평창동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녀였으니 세완을 탓할 계제가 아니었다.

이 회장이 뭐라 하든, 그리고 세완이 무슨 근거로 방해하든 그녀가 들어가기 싫다고 하면 그뿐이었다. 그걸 끝까지 거절하지 않은 것은 그녀였다.

이 회장에게만큼은 나쁜 아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은은 아직도 이 회장을 상대로 ‘거절’이라는 것을 하는 게 참 어려웠다.

아무튼 이 작금의 상황에 그녀의 탓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세완만 보면 짜증이 나는데 이걸 어째야 하나.

“거기서 뭐 해?”

“집 구경?”

세완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답했다.

아하!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짐을 싸는데 너는 팔자 좋게 집 구경? 이은이 삐뚤어졌다.

원래도 삐뚤어졌지만 더욱 더 삐뚤어졌다.

“됐고! 너도 짐 싸.”

“나?”

“그래, 너! 옷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책상에 있는 서류를 담아. 순서대로 차곡차곡. 숫자 보이지? 1번부터 21번까지 견출지 붙여 놓은 거. 마트에 가면 빈 박스 있을 거야. 몇 개만 얻어 와서 거기에다가 담아.”

그냥 심술이었다. 괜한 심술. 원인 제공자가 노는 것이 싫어 던져본 심술.

하지만 그 심술은 세완이 핸드폰을 꺼내 무엇인가를 검색하고, 전화하는 그 즉시 사라졌다.

“여보세요. 거기 이삿짐센터죠?”

“……!”

핸드폰을 낚아채 서둘러 종료 버튼을 누른 그녀가 세완을 다그쳤다.

“너 지금 어디에 전화한 거야?”

“이삿짐센터,”

“이삿짐센터는 무슨 이삿짐센터야!”

“이사하는 거니까 이삿짐센터 맞잖아. 아!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바보네, 바보.”

이삿짐센터를 통하면 이은이 너도 고생 안 해도 된다며 세완이 ‘유레카’를 외쳤다. 이은은 ‘유레카’ 대신 ‘이 자식아’를 외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리고 포장 이사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 혼자 사는 살림인데 많아야 얼마나 많다고……. 아니, 그 전에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전화 걸어?”

문제가 되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오후 9시 52분.”

하지만 세완은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전혀 이해를 못 했다.

“24시간 영업이라던데? 전화 받잖아.”

“아, 그래. 받긴 받는데, 받는 건 봤는데……. 아우!”

이은이 짜증을 섞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빌어먹을 금수저!

이삿짐센터에 전화를 한 것이 그녀에게 엿 먹이려고 그런 것이면 차라리 낫겠는데 애석하게도 그건 아니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붙어 산 게 몇 년인데……. 

얼굴만 봐도 안다. 곱게 자라서 그런 건지 돈 아까운 줄도 모르고, 상식도 모자라다.

24시간 영업이라고 한들 거기에서 온다고 하면 밤 10시에 쿵쾅대며 이사할래?

다다다 잔소리를 내뱉던 이은은 소처럼 눈을 끔벅거리는 세완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가슴만 쳤다.

아이고, 내 팔자야! 

서른둘의 처자는 백서른두 살의 할머니처럼 전생에 저지른 나쁜 짓을 후회했다.

“내가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세완을 좋아하고, 이 회장을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사고뭉치 이세완을 볼 때면 가슴이 답답했다. 할 일이 태산이고만!

이은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이은아, 왜? 어디 아파? 병원 갈까?”

내 두통의 원인은 너고, 아픔의 원인도 너라며 등짝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은데 그러기엔 저 눈빛이 너무 선량했다.

악의를 품고 저러는 거면 구박이라도 마음껏 할 텐데 그게 아니다 보니 이은은 세완이 언제나 어려웠다.

“됐으니까 내 오피스텔에는 손도 대지 마!”

“왜? 짐 정리하라며. 그리고 짐을 빼야 월세를 주든지 전세를 주든지 할 거 아냐. 빈집 그냥 두면 관리비만 나가. 얘가 돈 무서운 줄 모르네. 너 지금 돈을 허공에 뿌리고 있는 거야. 일분일초가 아깝다고.”

구구절절 옳은 말인데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세완이다 보니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세완의 새까만 속만 고스란히 보였다.

“돈 같은 소리 한다. 넌 내가 오피스텔로 다시 돌아갈까 봐 그러는 거잖아.”

“그거야, 뭐……. 겸사겸사?”

새까만 속은 가지고 있지만 속일 줄은 모른다.

세완이 눈동자를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이은은 세완의 유일한 장점이자 단점을 보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복잡했다. 세완이 왜 이러는지를 알아서 더 복잡했다. 말을 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이 상황이 짜증 나고 화가 난다.

“아, 진짜!”

이은이 벅벅 머리를 긁었다. 언제나 이성적이던 김 비서의 가면을 잠시 벗어둔 이은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으로 세완을 바라봤다.

정리하던 캐리어를 옆으로 민 그녀가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여기 앉아 봐.”

세완을 보며 바닥을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세완은 의아하게 이은을 보더니 이내 저도 따라 앉았다.

세완과 이은은 좁은 오피스텔, 원룸 안에서 뚫어져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멀뚱멀뚱한 눈동자와, 심란하고 복잡한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이은이 입을 열었다.

“정말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일?”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거 아니야. 이상한 사람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럼?”

내내 해맑았던 얼굴에 불만이 서렸다. 너는 내게 그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이라는 듯, 피 안 섞인 남매가 이은에게 침묵으로 닦달했다.

“그게…….”

이은이 아랫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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