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녀의 남자만큼은 꼭 잘난 남자로 구하겠다는 소꿉친구의 뜨거운 다짐에 이은이 머리에서 열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건……. 아우, 진짜! 그걸 왜 내가 너한테 말을 해야 하는데?”
이은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세완은 그런 이은의 짜증을 받으며 그녀의 팔을 다시 한번 단단히 틀어쥐었다.
똑똑한 김이은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말로 상대의 기를 꺾어 놓는 인물이지 폭력을 사랑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녀가 폭력을 사용할 때는, 그리고 이은이 짜증을 낼 때는 할 말이 없을 때였다.
그렇다면 그에게 차마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덜떨어진 놈이란 말이던가!
논리적 추론을 끝낸 세완이 이은 몰래 바드득, 이를 갈았다.
세완은 자신보다 못한 놈을 이은의 남자로, 그녀의 남편으로 맞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완이 아주 어릴 적 그들의 약속을 그녀에게 상기시켰다.
“왜 나한테 말을 하냐니? 난 네 가족이니까 당연히 말을 해야지!”
“어?”
“난 네 가족이고, 너도 내 가족이라며. 네 입으로 한 얘기야. 기억 안 나? 넌 오빠도 없고 남동생도 없으니 내가 네 남편감 봐준다고 했잖아.”
저 얘기를 일곱 살 때 했나 그럴 거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니 지금 세완은 강산이 변해도 2번은 더 변했을 옛날에 말한 것을 상기시키는 거다.
“야, 그건…….”
입을 달싹거리던 이은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은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완벽하게 세팅이 되어 있던 머리는 까치집마냥 부스스해졌다.
그의 말을 부정할 수도,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없는 이은이 신경질 섞인 표정으로 세완을 노려보았다.
가족? 그래, 가족……. 하지만 가족처럼 여기기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세완은 왜 모를까?
가족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 참 더러운 거다.
오갈 데 없는 고아인 이은에게 그녀를 가족처럼 대해주는 세완과 이 회장은 분명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가족 같은 사람은 그냥 가족 같은 사람이지 가족이 아니었다.
세완이 이 회장에게 철없이 구는 건 그가 손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다. 그리고 이은이 이 회장에게 예의 바르게 구는 건 그녀가 친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회장이 어떤 사람이고, 그녀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어린 날의 이은은 그녀가 조금만 실수하면 집에서 내쳐질까 봐, 후원이 끊길까 봐 정말 겁이 많이 났었다.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 혼자가 될까 봐 참 많이 울었다.
똑같이 부모가 없다 해도 세완과 이은은 달랐다. 든든한 조부가 버티고 있는 세완과, 정말 혈혈단신인 이은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은을 세완보다 더 아껴 주는 것 같은 이 회장이지만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 둘 중 하나의 목숨만 살릴 수 있다고 하면 당연히 이 회장은 세완의 목숨을 구할 거다.
한량에 백수, 대책 없는 철딱서니라고 해도 그는 세완의 할아버지니까.
“넌 몰라.”
“내가 뭘 몰라?”
“아니, 넌 정말 몰라.”
이은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은도 가족이 갖고 싶다. 그녀도 가족을 찾고 싶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포기하고 있던 것이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그들을 찾고 싶다.
찾아서 날 왜 버렸냐고 묻고 싶고,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아프기에 날 찾은 거냐고 대거리도 하고 싶고, 또 괜찮으면……. 정말 바보 같은 건 알지만 가능하면 도와주고 싶다.
이은이 세완과 이 회장에게 그녀의 휴가에 대해 숨긴 건 그 때문이다.
가족을 만난다 해서 그걸 반대할 사람들은 아니지만 모든 사정을 알면 이 회장과 세완은 나름대로 상처를 받을 거고, 나중에는 그녀를 말릴 것이 분명하니까…….
바보 같은 짓인 걸 알면서도 그 일을 저지르려는 여자는 입술만 달싹거리다 결국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이은을 보며 세완은 다시 눈을 빛냈다.
분명 비밀이 있는데, 해야 할 말이 있는데도 이은은 아무 말을 못 한다. 그리고 저건, 사고뭉치 이세완이 장담하건대 100% 구린 일이다.
이은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세완은 저런 모습을 잘 알고 있다. 세완 자신이 사고 친 뒤에 그가 할아버지 앞에서 보이던 모습이었다.
말을 해야 하는데 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
이혼남이나 사별남이니? 나이가 한 스무 살 정도 많은 사람이야? 그것도 아니면 유부남이야?
세완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상상하든, 세완은 자신의 상상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김이은의 남자는 이은처럼 유능하고, 똑똑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 그녀를 많이 아껴야 한다. 그리고 어느 부분에서도 하자가 없어야 한다.
세완이 이은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뜨거운 눈초리에 이은은 시선을 피해 연신 하늘만 보았다.
할 말도 없고, 할 생각도 없음을 이은은 온몸으로 표출했다.
그런 이은의 모습에 세완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은의 팔을 놓은 세완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자.”
“……?”
“집에 가자. 이래서 내가 너 독립하는 거 반대했어. 우리 집에 가자.”
“야!”
이은이 당황해서 소리쳤지만 세완은 막무가내였다.
어느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 못한 놈에게 내가 이은을 보낼 것 같은가!
이은이 연신 세완의 어깨며 가슴을 때렸지만 지금 세완은 고통보다 김이은을 사수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너는 때려라. 나는 맞겠다! 대신 우리 집에 가자!
“너 이거 성추행이야. 싫다는 사람을 이렇게 끌고 가는 건, 이건 범죄라고!”
“아, 진짜! 이세완 이거 안 놔? 야, 나 남자 없다고. 외박 안 해! 진짜 집에 갈 거라니까?”
이은이 연신 그를 때리고, 또 옆에서 계속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세완은 귀를 막고 고통은 삼켰다.
이제 휴가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에겐 ‘김이은 사수’라는 숭고한 사명이 있다.
대의를 위해 사소한 것쯤은 무시해도 괜찮다. 근데 아프기는 좀 아팠다.
“야, 아파! 그만 좀 때려.”
“아프라고 때리는 거야, 아프라고! 이거 안 놔?”
이은은 화를 냈고, 세완은 맞았다. 솔직히 아프긴 많이 아팠다. 하지만 이은과 툭탁거리며 주차장으로 향하는 세완의 발걸음은 제법 가벼웠다.
그래, 이게 맞아! 애초에 독립하라고 내보내는 게 아니었어! 화난 이은과 달리 세완은 경쾌한 걸음걸이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 * *
세완의 뜻이 워낙 강경해 끌려오기는 했지만 대충 눈치를 보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었다.
내심 이 회장의 공정함을 믿기도 했었다. 하지만 세완이 터트린 폭탄은 이은의 계획을 모두 무위로 돌렸다.
“할아버지, 얘 애 딸린 유부남 만난대요.”
“……!”
“……!”
“……!”
이 회장도 놀라고, 집안일 도와주시는 춘천댁 아주머니도 놀라고, 무엇보다 당사자인 이은이 가장 놀랐다.
“하, 할아버지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이은이 서둘러 거짓말이라고 반박했지만 이세완의 돌대가리는 나쁜 일에는 미친 듯이 잘 돌아갔다.
“아니기는 무슨? 3년 동안 휴가 내는 것도 그거 때문이래요. 그놈이랑 어디 야반도주라도 할 모양인가 보던데요?”
세완은 증명되지도 않은 사실을, 뒷수습은 생각하지도 않고 마구 던져 댔다.
졸지에 남의 가정을 파탄 내는 상간녀가 된 이은이 뒷목을 잡았지만 불행히도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아니라니까요? 정말 아니에요. 그렇게 절 모르세요? 아줌마, 뭐라고 말씀 좀 해 주세요. 야, 이세완!”
너무 억울한 나머지 눈물마저 글썽였지만 그렇게 억울하면 3년 휴가를 도대체 어디에다가 쓸 건지 이야기를 해 보라는 말에 그녀는 입을 딱,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난 너를 믿는다. 하지만……. 하아, 그래. 아닌 것은 안다만 세상이 워낙에 험하지. 미안하구나. 널 독립시키는 것이 아니었어.”
이 회장은 슬퍼했고, 춘천댁은 젊은 사람들 생각을 내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떠냐며 이은의 복장을 뒤집었다. 그리고 이세완은…….
“에이, 사랑한 뒤에 보니 유부남인 거지 유부남인 거 알고 사랑했겠어요?”
깐죽, 깐죽, 깐죽거리며 매를 불렀다. 이은은 저거 한 대만 때리면 딱 좋겠다는 심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불 난 집에 부채질, 아니 아예 기름을 들이붓는 세완의 행동 덕분에 이은은 변명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애 딸린 유부남을 만나는 상간녀가 되었다.
덕분에 그녀의 거취 또한 자동으로 결정됐다.
“지나간 일 이야기해 무엇 하겠느냐? 김 비서야, 아니 이은아! 할애비 소원이다. 집으로 다시 들어오너라.”
이 회장이 결정을 내렸다.
반발하고 거부하고 싶은 심정은 굴뚝같았으나 세완의 말로 인해 이미 충분히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이 회장에게 더 이상의 충격은 줄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거부하려고 했는데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더니 심장이 안 좋다는 이 회장의 혼잣말에 이은은 모든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춘천댁은 나 좀 도와주게. 안으로 들어가야겠네.”
가슴을 손으로 꾹꾹 누르는 이 회장의 모습은 참으로 서글프고 초라해 보였다.
한 놈으로 모자라 똘똘한 줄 알았던 다른 한 놈도 내 속을 썩인다며 이 회장은 인생무상을 노래했다.
졸지에 죄인이 된 이은은 울상이 되어 이 회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세완!”
단둘이 남은 거실에서 이은은 세완을 보며 도끼눈을 떴다.
“응? 왜?”
사고뭉치 그 녀석, 청순한 뇌의 이세완이 해맑게 답했다. 이은은 세완에게 달려가 일단 그의 등짝부터 한 대 갈겼다.
제 죄가 큰 것은 아는지 세완은 작게 꿍얼거리기만 하지 반발은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더 화가 나서 이은은 세완의 등을 한 대 더 후려쳤다. 그리고 그에게 따져 물었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뭐가?”
“내가 애 딸린 유부남을 만난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니면 된 거지 뭐 그리 화를 내고 그래?”
이은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는데 세완은 태연하기만 하다.
“아니면 된 거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네가 그런 말을 하면 할아버지 앞에서 내 얼굴이 뭐가 돼? 아니, 그 전에! 왜 사실도 아닌 걸 사실처럼 말하고 그래?”
열 받은 이은이 목청을 높였다. 잔뜩 흥분한 그녀를 보며 세완이 입을 삐죽였다.
“할아버지야 어차피 사실 아닌 거 다 아실 텐데 뭐.”
“……뭐?”
“할아버지를 그렇게 모르냐? 구렁이잖아. 구렁이! 백 년 묵은 구렁이 과(科). 분명히 아닌 거 다 아시면서도 너 잡아 두려고 그러신 걸걸?”
세완의 나이 열일곱부터 시작된 이 회장의 연기 인생,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우리 할아버지도 10년을 연기하니 확실히 실력이 늘었다며 세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