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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4)화 (4/100)

4화

이름 김이은. 통칭 김 비서!

언제나 유능하던 김 비서가 수상하다. 얘가 도대체 왜 이럴까?

세완은 요즘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한때는 실연을 의심하기도 했지만 본인이 극구 아니라고 하니…….

세완은 미행과 정보 수집에 나섰다.

“아, 왜 자꾸 따라와?”

“안 따라가거든? 나도 그냥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가는 거야.”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럼 네가 먼저 가.”

몰래 하는 미행도 아니고 노골적으로 이은의 옆에 딱 붙어서 움직이는 모습에 그녀가 결국 화를 냈다.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미는 세완의 모습에 이은은 정말 날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면 네가 앞장을 서라고 얘기했다.

이은을 걱정해 미행을 결정하고 또 그 미행을 위해 일부러 야근까지 한, 그것도 자발적으로는 생전 처음으로 야근을 한 세완의 얼굴에 낭패가 깃들었다.

하지만 이은은 그런 세완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고 ‘얼른! 빨리! 썩!’ 사라지라며 그를 닦달했다.

“네가 먼저 가라니까? 빨리 가!”

세완을 구박하는 이은은 채무자를 박대하는 채권자처럼 매정하기가 그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매정함에 눈물지을 때가 아니라 그 매정함 속에서도 살아남을 방도를 구해야 할 때였다. 세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여러 가지 대안들이 그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1안, 2안, 3안……. 수도 없이 많은 가정들이 생겨나고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이거다!’ 하는 좋은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어느 쪽으로 가든 이은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세완은 거짓 대신 솔직함을 택했다.

“그래. 내가 먼저 갈게. 그나저나 어디로 갈까? 아, 오늘은 왠지 마포구청역을 가고 싶다. 마포구청역에서 3분만 걸으면 나오는 오피스텔이 당기네? 그 오피스텔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지.”

세완이 힐끔힐끔 이은의 눈치를 살피며 깐죽거렸다. 이은은 말없이 세완을 노려보았다.

세완은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여기에서 밀리면 앞으로 한량 생활은 다했다 생각하니 없는 힘도 솟아났다.

“풀옵션에 23평 오피스텔. 지하철이며 각종 문화시설과 가까워 독신이 살기에 딱 좋은 오피스텔. 아, 오늘은 거기에서 잠이나 자 볼까?”

“…….”

“난 그 오피스텔이 참 좋더라. 꼭 내 집 같고 그래서 매일 귀가할 때면 평창동이 아니라 성산동으로 가고 싶더라.”

도발적이던 세완의 대사는 점점 시간이 갈 정도로 구차해졌고, 능글맞던 그의 목소리는 마치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딱딱해졌다.

‘아씨, 이쯤에서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세완이 다시 한번 이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은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흠흠! 이은아, 같이 갈래? 태워다 줄게.”

세완은 이은에게 미끼를 던졌다.

물론 같이 가자고 덥썩 세완의 손을 잡을 이은은 아니지만 그래도 뭐든 반응 하나 정도는 보여 줄 것으로 믿고 던진 미끼였다.

하지만 이은은 그가 미끼를 던졌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대신 피식, 코웃음을 흘렸다.

“아니! 너 혼자 가.”

“으, 응? 왜?”

“난 오늘 딴 데 가서 잘 거야. 그러니까 그 집에서 너 혼자 밤을 지새워보렴. 혼, 자, 서!”

마지막 단어에 강세를 둔 이은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세완이 이은의 집에 가려고 할 때마다 내 집이 네 놀이터냐며 이를 박박 갈던 이은 답지 않은 대처였다.

예상 밖의 태도에 세완은 당황했다.

“이은아!”

“나 부르지 마. 비밀번호는 알지? 자고 싶으면 가서 자.”

뒤돌아 걷던 이은이 손을 들어 허공에서 흔들었다.

가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하라는 아주 쿨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모습까지 보고 나니 세완은 결코 쿨해질 수가 없었다.

“너 어디 가는데?”

“사생활이야.”

“외박할 거야?”

“내 맘이야.”

어찌나 열심히 걸었는지 이은과 세완의 거리는 제법 벌어졌고, 그에 따라 이은의 목소리도 작아졌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작든, 세완에게는 너무나도 크게 들렸다.

외박과 사생활!

세완이 다다다, 달려가 그녀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못 가!”

“야!”

당황한 이은이 세완을 돌아보았다.

이은이 팔을 흔들어 세완을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세완은 막무가내였다.

“인마, 가긴 어딜 가? 진짜 외박하려고? 정말이야?”

“남이야 뭘 하든!”

“못 가! 못 놔! 어느 놈인데? 어떤 잡놈을 만나는 건데? 남자가 아니긴 개뿔! 너 연애하냐? 오빠가 충고하는데 진짜 잘 생각해라. 여자 외박시키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이 없어. 너 통금 모르냐? 통금? 얘 안 되겠네? 안 되겠다. 너 다시 집에 들어와라. 와, 얘가 독립한다고 나가더니 진짜 막 나가네?”

잔뜩 흥분한 세완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얼굴이 벌게진 세완은 여동생을 둔 오빠처럼 흥분했다.

어쩌면 여자 친구의 외박을 앞둔 남자친구의 모습 같기도 했다. 이은은 기가 막혔다.

“아, 그런 거 아니야. 좀!”

“아니긴! 너 딱 걸렸어. 내가 진작 알아봤다. 남자지? 남자 생긴 거지? 3년 휴가 얘기할 때부터 알아봤다. 3년 동안 휴가 내고 뭐 하게? 그놈이랑 뭐 할 건데? 휴가는 개뿔! 못 가! 못 보내!”

“이거 좀 놓고 얘기해!”

“놓기는 왜 놔? 누구 좋으라고?”

세완이 시근덕거리면서 말했다.

어느 놈을 만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은 100% 나쁜 놈일 거라며 확신하듯 말하는 그의 모습에 이은도 열이 올랐다.

머리에서 김이 폴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이은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나쁜 말로 해도 안 놔.”

“진짜 안 놔? 죽을래?”

“그냥 죽여. 죽여도 안 놔.”

세완이 필사적으로 말했다.

세완은 이은이 그에게 뭐라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팔을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그를 떼어내려 이은이 힘을 써 보기도 했지만 꼴에 남자라고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엔 장난으로 봐주던 이은도 점점 짜증이 치솟았다.

“놔!”

“안 놔.”

“진짜 안 놔?”

“안 놔.”

만담 같은 말장난이 두어 번 오가고 이은은 결국 실력 행사에 나섰다.

퍼억, 소리와 함께 세완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윽!”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은 세완을 보며 이은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놓으랄 때 놓지 그랬어.”

세완이 발끈했지만 싸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이은을 마주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맞은 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거지, 그녀의 3년 휴가와 외박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냥 때려. 나 때리고 가지 마.”

벌떡 일어난 세완은 다시 이은의 팔을 잡았다.

차라리 때리고 그놈에게 가지 말라고 제 머리도 들이밀었다. 이은이 기가 막힌 듯 그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지만 세완은 진지했다.

“남자는 남자가 보면 아는데, 내가 보기에 그 남자는 영 몹쓸 놈이야. 내가 아까도 얘기했잖아. 여자 외박시키는 놈 치고 제대로 된 놈이 없다고. 게다가 네가 회사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널 모시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너 혼자 오래? 어디로? 자기 집? 모텔? 와, 진짜 망할 놈이네.”

이은이 말이 없자 세완은 이은이 갈 곳을 모텔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욕설이 자유자재로 튀어나왔다.

김이은과 할아버지 한정으로 나름 착실한 흉내를 내고 있던 세완이 본격적으로 가면을 벗어던졌다.

그가 쌍욕과 모함, 모략, 음해, 누명, 비방, 이간질을 시도했다.

평소에는 순결하고 청순한 모습으로 작동을 멈추고 있던 뇌였지만 일단 가동을 하니 나쁜 쪽으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은은 점입가경으로 흐르는 세완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이은에게 실제로 남자친구가 있었다면 세완의 말을 믿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세완의 중상모략은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은에겐 남자친구가 없었고, 이은은 남자와 모텔에 가려는 게 아니었다.

이은은 나쁜 쪽으로는 참 능력 있어 보이는 세완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 화상아! 내가 너를 어째야 하니?

“……야, 아니거든?”

“원래 남자가 사랑할 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는데 내가 보기에 그놈은…… 응? 뭐가?”

“애인 있는 거 아니라고. 헛소리 좀 그만하지?”

이은은 세완이 창피했다. 참 많이 창피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이은이 세완을 흘겨보았다. 세완은 아직도 흥분을 제대로 못 지운 듯했다.

한숨을 내쉰 이은이 세완을 보았다.

아이고, 이 화상아! 그녀는 일곱 살 어린아이를 달래듯, 그리고 훈계하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얘기했잖아. 남자 때문이 아니라고. 그리고 휴가는 다른 일 때문이야. 네가 내 휴가 때문에 궁지에 몰린 건 아는데……. 야 이 자식아, 이건 아니지!”

말하다 보니 짜증 나서 세완의 머리를 한 대 더 때렸다.

그녀는 머리를 잡고 인상을 찡그리는 세완을 보며 한 대 또 때렸다.

졸지에 두 대를 얻어맞은 세완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으나 세완은 억울해할 자격이 없었다.

“이거 놔!”

이은이 신경질적으로 팔을 흔들었다. 세완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이은에게 물었다.

“정말 아냐?”

“아니야.”

“진짜?”

“그렇대도?”

“그걸 어떻게 믿어?”

무슨 놈의 의심이 이리도 많은 건지 세완은 가늘게 뜬 눈으로 이은을 노려보며 말했다.

평소에는 그녀의 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던 애가 세완이었기에 이은은 계속된 그의 불신에 도대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세완이 말했다.

“날 설득하고 싶으면 너, 3년 동안 휴가 내고 뭐 할 건지 얘기해.”

“뭐?”

“휴가 기간 동안 뭐 할 건지 얘기하라고. 계획도 없이 휴가를 낸 건 아닐 거 아냐.”

어쩌다가 얘기가 또 휴가로 흐르나! 답답한 마음에 이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완은 그런 이은을 보며 눈을 더 가늘게 떴다.

실눈처럼 가느다란 눈이 형사의 그것처럼 반짝였다. 세완은 이은의 범죄, 아니 그러니까 남자의 존재를 확신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무것도 아니면 왜 말을 못 하는데?”

이은이 거듭 짜증을 냈지만 세완의 생각은 점점 확고해졌다. 이은에게 남자가 있다.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세완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제는 휴가가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 쓰는 것이라면 3년이 아니라 30년이라도 휴가를 줄 수 있었다. 일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 문제는 아니었다.

세완은 이은을 아꼈고, 그만큼 아무 놈이나 그녀의 곁에 놔둘 생각이 없었다.

학창시절, 수도 없이 등짝을 얻어맞아 가면서도 이은 주변의 남자를 물리친 것에는 그런 이유가 컸다.

나보다 잘난 놈! 이은의 짝은 세완 자신보다 훨씬 더 잘난 녀석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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