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이은이니 원망해도 딱히 나올 것이 없어 그나마 만만한 ‘세상’을 원망하는데 그 동네도 원망해 봤자 별반 나오는 것은 없었다.
하기는. 당장 피붙이인 할아버지부터도 내 편이 아닌데 누구한테 뭘 바라나?
“다 부질없다.”
세완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고 인생무상을 논했다.
비서의 탈을 쓴 여왕님 한 분 꼬드기기 위해서 간식거리의 물량 공세는 물론이고, 고작 이틀이기는 하지만 땡땡이치지 않고 농땡이를 부리지도 않는 성실한 근무 태도도 유지했다.
그녀가 아무리 구박해도 반나절도 유지하기 힘들었던 그의 바른생활 전적을 보면 꽤나 장족의 발전이었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은의 마음은 철벽과도 같았다.
“그냥 못 이기는 척하면서 잡혀 주면 안 되나? 도대체 그놈의 휴가는 왜 가겠다고 저러는 건지…….”
머리를 벅벅 긁은 세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직장인들은 자리보전이 유일한 목표이고 상사가 기침만 해도 움찔움찔하며 그의 동향을 살핀다는데 그의 비서 김이은은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한지 모르겠다.
물론 그녀의 몸값이 높다는 것은 세완도 알고 있다.
특히 세완 자신처럼 망나니 자식을 둔 재벌가에서는 백지수표까지 내밀 정도로 그녀를 모셔오기 위해 열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밥벌이 걱정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무슨 휴가를 3년이나 간다는 건지 모르겠다.
“3년이라…….”
양팔을 뒤로 해 손 베개를 한 세완이 3년이라는 기간을 손으로 꼽아 보았다.
개월로 따지면 36개월, 일자로 따지면 1095일, 시간으로 따지면 무려 26280시간이었다.
26280시간이라는 시간은 하루에 8시간씩 잔다고 하면 9년하고도 11개월이라는 시간이 살짝 넘는, 그러니까 과장 조금 보태서 보통 사람 10년 치의 수면시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잠자는 시간으로 계산하니 3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확연하게 느낀 세완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건 아니지!”
퇴근 시간 일이십 분에도 깐깐하고 까칠했던 그녀를 떠올리니 26280시간이라는 그 엄청난 시간을 이은에게 건네 줄 수가 없었다.
이은이 워낙 완강해서 그냥 보내 줄까 하며 갈대처럼 흔들리던 그의 마음이 대나무처럼 곧고 단단해졌다.
조금 전까지는 원활한 한량 인생을 위해서 이은을 놓칠 수 없었다면 이제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놀부 씨의 섬세한 쿠크다스 심장을 위해서 이은을 놓칠 수가 없었다.
원래 내가 노는 것은 괜찮아도 남이 노는 것은 못 보는 법이다.
세완이 몸을 일으켜 이은에게 다가갔다. 불과 5분 전에 그가 했던 행동, 그러니까 슬금슬금 이은의 눈치를 보던 것과 달리 지금의 세완은 당당하게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휴가 반댈세! 완강한 반대 의사를 표하기 위해 세완은 성큼성큼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의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
세완이 아는 이은은 냉철하고 깐깐한 커리어 우먼이었다.
학생 시절이라고 별다를 것도 없어서 모범생인 이은은 언제나 모자란 구석 많은 세완을 우매한 것 보듯 하며 잔소리를 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저런 모습도 있었나?
세완은 말없이 이은을 바라보았다.
근무시간에 딴짓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그녀가, 모니터가 아닌 다이어리를 보면서, 그리고 그 다이어리를 하염없이 손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지금 이은의 얼굴은 그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련하고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이은의 표정은 심히 복잡했고, 또 낯설었다.
그래서 씩씩거리며 걸어오던 세완은 정체 모를 불편함을 간직한 채 조금 전처럼 조용히 문 뒤로 자신의 몸을 숨기고 그녀를 훔쳐보았다.
* * *
이은이가 또 다이어리를 본다. 이은이 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김이은이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세상에나, 얘가 우는가 보다!
몰래 이은을 훔쳐보던 엉덩이에 뿔 난 망아지, 세완이 펄쩍 뛰었다.
얘가 울 수도 있는 사람이었나?
세완은 그가 아는 철혈의 여인, 김이은에 대한 고정관념이 산산이 깨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세완이 아는 이은은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는 조금 귀엽기도 했던 것 같다. 아니, 귀엽기보다는 예뻤나?
암튼 어릴 때의 이은은 솔직히 조금은 세완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래. 터놓고 말해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선 이은은 첫사랑이라기보다는 그냥 누나 같았다.
맨날 뒷목만 잡는 할아버지를 대신해 세완의 준비물을 꾸리고, 숙제를 챙기고, 성적을 관리한 것은 이은이었다.
할아버지도 가만두는데 도대체 네가 왜 그러냐고 하면 너희 할아버지야 네가 불쌍해서 그냥 두는 것이고, 나는 네가 한심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따박따박 말하던 것이 이은이었다.
이은에게는 부모 잃은 가여운 소년 컨셉이 절대 통하지 않았다.
엄마랑 아빠가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면 할아버지건 누구건 무사통과 OK인데, 부모가 없는 것은 이은도 매한가지이니 세완은 이은에게는 언제나 약자였다.
물론 인정은 한다. 이은 덕분에 세완은 삐뚤어진 청소년이 되지 않을 수가 있었다.
어느 재벌 집 자식처럼 하버드는 안 바라니 그저 인서울만 했으면 하는 할아버지의 소원도 이뤄 드렸다.
대학에 간 것은 세완인데 왜 선물은 이은이 받느냐며 펄펄 뛰긴 했지만 어쨌든 거기까지는 수용 가능한 범위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이은은 절대 울지 않는 여자라는 것이다.
우는 것은 언제나 세완이었지 이은이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차갑고, 언제나 냉정하고, 언제나 똑 부러지고…….
“근데 네가 왜 울어?”
세완의 얼굴이 험상궂어졌다.
우는 것은 언제나 세완의 몫이었지 이은의 몫이 아니다.
한번 울려보겠다고 그렇게 용을 써도 가소롭다는 듯 굴던 그녀였다. 그런 이은이 운다는 것은 정말로 그녀에게 보통이 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실연당했나?”
세완이 추측했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인데 던지고 나니 일리가 있었다.
저 일 중독자가 아무 일도 없이 3년이나 긴 휴가를 떠날 리가 없었다.
세완의 머릿속에는 부모 없는 고아라고 그녀를 괄시하는 남자1의 부모가 떠올랐다.
‘나는 이 결혼 반댈세!’를 외치며 이은의 뺨을 때리고, 돈 봉투를 날리는 장면도 떠올랐다.
요즘 시간이 남아서 아침드라마를 즐겨 봤더니 떠오르는 장면마다 주옥같은 명장면이었다.
“헐! 미쳤네. 감히 누구를!”
세완이 발끈했다.
세완에게 이은은 피붙이나 다름이 없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그들은 언제나 함께였다.
이은 없는 세완은 없었고, 세완 없는 이은도 없었다. 내 누나, 내 여동생 같은 이은이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하니 세완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이은아!”
세완이 그녀를 부르며 멧돼지처럼 달려갔다.
세완은 지금 그가 이은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은은 어느새 감정을 수습했는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세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완이 안 괜찮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기는! 너 괜찮아?”
세완이 이은에게 물었다. 이은이 질문했다.
“뭘요?”
“나한테까지 모르는 척하지 마. 나 상처받는다. 아무리 내가 요즘 너에게 신경을 못 썼어도 어떻게 나한테까지 속이려고 해?”
세완의 까만 눈동자에 물기가 촉촉하게 뱄다. 얘가 도대체 왜 이러나, 하던 이은은 생각지도 못했던 세완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설마 알았나? 어떻게?’
이은이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세완이 말을 이었다.
“정말 서운하다. 어떻게 나한테까지 말을 안 할 수가 있어? 넌 내 형제나 마찬가지잖아. 넌 아냐?”
세완의 질문에 이은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알았구나! 나도 네가 내 피붙이 같아. 하지만 이걸 어떻게 말할 수 있겠니? 이은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
휴가와 관련해서는 모든 것을 다 비밀로 했기에 이걸 세완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미처 하지 못했다.
만약 이 회장이나 세완이 진실을 알면 절대 허락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세완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이은은 고민했다.
“사실…….”
“어느 놈이야?”
“응?”
이은이 막 입을 열려는데 세완의 말이 좀 더 빨랐다.
세완이 말을 이었다.
“어느 놈이야? 아니, 그 전에 어느 집구석이야? 내가 제대로 복수해 줄게!”
“어느 집구석이긴 어느 집구석…….”
“감히 그놈이 널 차? 죽일 놈! 넌 어떻게 차였다고 홀라당 3년이나 떠나냐? 그런 건 곱게 떠나 주는 게 아니라 엉엉 울면서 무릎 꿇고 빌 때까지 탈탈 털어서 복수를 해 줘야 하는 거야. 넌 똑똑하다면서 그런 것도 몰라?”
어느 집구석인지 이야기만 하면 그놈의 집구석, 아주 먼지까지 탈탈 털어 내겠다며 세완이 음험한 표정을 지었다.
공부도, 일도, 시키는 건 죽어라 안 하지만 한 대 얻어맞으면 백 대 때려 주는 것만큼은 해 줄 수 있다며 세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은의 표정이 짜게 식어갔다.
“내가 차였다고?”
“그래. 어느 놈이야? 우리 회사 놈이야? 아니면 다른 회사? 말만 해. 내가 아주 백수 만들어 줄게!”
세완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이은은 이놈은 도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온 진상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완아?”
“응, 말해. 얘기만 해! 이 오빠가 다 해결해 줄게!”
세완은 ‘상무님’이 아닌 ‘세완’이라 불리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정답을 맞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세완을 보며 이은은 조금 전보다 조금 더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 해결해 줄 거야?”
“그럼! 오빠 못 믿어?”
“믿지. 당연히 믿어. 그러니까 얼른 들어가서 마저 일하자. 응?”
“야, 오빠가 다 해결해 준다니까?”
“내 고민은 네가 놀고먹는 한량이라는 거고, 그 해결 방법은 네가 일을 하는 것 외에는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후딱 가서 일해. 당장!”
이은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생각과 다른 전개에 세완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은이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 할 일이 없으니까 헛소리를 늘어놓는 거지? 가서 일해. 실연은 무슨 실연이야? 어디에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해?”
이은은 가소로워 죽겠다는 듯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상무님, 네가 일 안 하고 처 자빠져서 잠만 자니까 대낮부터 개꿈 꾸는 거 아냐? 가서 일이나 해.”
이은이 차갑게 잘라 말했다.
여름날의 망상이 깨진 세완은 정말 아니냐는 듯이 거듭 질문했다. 그리고 시원하게 등짝 스매싱을 당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러니까 가서 일해! 상무님 너 또 일 안 하고 낮잠 자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낮잠 안 잤는데…….
세완은 정말로 억울했다. 하지만 실연은 절대 아니라고 말하는 이은의 얼굴이 너무 뻔뻔해서 그는 시무룩하게 상무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