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서른이 넘은 현재까지도 눈망울이 반짝거리는 뺀질이 악동, 그녀와는 너무나도 다른 인생이라 어쩐지 조금 얄미워지기까지 하는 위인이다.
이은은 그의 이런 대책 없는 철없음을 꽤 아꼈다. 하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거다.
그를 바라보는 이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세완은 그녀의 미소가 마치 휴가를 무르자는 말에 대한 허락이라도 되는 듯 이은을 따라 헤벌쭉 웃음을 그렸다.
그 순간, 이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안 됩니다.”
정색한 이은이 냉랭하게 거절의 말을 던졌다.
간이고 쓸개고 모두 다 빼 줄 듯이 미소를 머금었던 주제에 결국 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는 이은의 행동에 세완은 심하게 억울한 목소리로 발끈했다.
“왜?”
“제 휴가니까요.”
이은이 덤덤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세완을 아끼는 것도 사실이고, 그의 대책 없는 철없음을 아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그녀가 받은 3년의 휴가에는 그녀의 인생이, 그리고 평생의 소원이 담겨 있었다.
“아니, 누가 휴가를 가지 말래? 3주 정도면 되잖아, 3주! 그래, 내가 봐줬다. 3개월!”
세완이 펄쩍 뛰며 하는 말에 이은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안 됩니다.”
“아, 진짜! 안 된다고만 말할 일이 아니잖아. 도대체 어느 정신 나간 비서가 상관을 두고 3년이나 휴가를 가?”
“저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됩니다.”
이은은 세완이 펄쩍펄쩍 뛰다가 캑 꼬꾸라지든지 말든지 시종일관 덤덤하고 담백한 태도로 대꾸했다.
사무적인 목소리와 표정 없는 얼굴은 비서 김이은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것이지만 세완은 유독 오늘따라 억장이 무너지고 속이 터져나가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야!”
세완이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옆에서 개가 짖든지 소가 짖든지 흘려들으며 스케줄 표를 정리하고 있던 이은의 얼굴이 위를 향했다. 이은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야, 할까요?”
“…….”
세완이 움찔했다.
‘야’ 소리 한 번 듣는다고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굵직굵직한 사고들을 잘만 터트리는 대범 비서 이은의 ‘야’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
오래되지 않은 과거, 이은에게 막말을 했다가 그야말로 눈물 콧물 쏙 뺐던 과거를 떠올린 세완이 조용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시선을 피하는 그의 모습에 이은은 업무에 복귀했다. 하지만 지치지도 않고 질리지도 않는 것인지 세완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다시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대충 3개월로 합의 보자. 응? 너 사람이 그렇게 매정하면 못 쓰는 법이야.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이 얼마냐? 너 나 버리고 갔다가는 진짜 발병 나. 아니다. 발병만 날까? 너 나 버리면 무좀 걸린다. 비듬도 생겨. 여드름도 생기고, 변비도 생기고, 탈모랑 습진도 걸릴 거다.”
세완은 그들의 오랜 인연을 팔아서라도 이은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이은은 오랜 인연 따위는 엿이나 사 먹으라며 그의 말을 무시했고, 세완은 온갖 질병을 예시로 그녀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악담도 별로 효과는 없었다.
“말 다 하셨으면 이제 가서 일하세요.”
어디에서 멍멍이가 짖느냐며 귓구멍을 한 번 후비는 것으로 그의 말을 털어 낸 이은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로 그에게 업무 복귀를 지시했다.
세완은 그의 애원에, 부탁에 그리고 협박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그녀의 모습에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이 부질없는 행동임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심술이 난 듯한 부루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가 부탁해도 이럴 거야?”
“회장님은 나한테 그런 부탁 안 합니다.”
“와, 얘가 세상 물정을 모르네?”
“상무님 너보다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며 시종일관 예의를 지키고 존댓말을 내뱉던 이은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기도 염치가 있어야지 감히 누구더러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하느냐며 이은이 노골적으로 콧방귀를 꼈다.
네 발목 잡으라고 한 것이 바로 그 할아버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세완은 잠시 울컥했지만 지금 당장은 할아버지인 이 회장까지 도매급으로 점수를 깎는 것보다 그를 미끼로 이은을 잡아 두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었다.
“김 비서님, 우리 진짜 그러지 말자. 할아버지가 널 얼마나 아꼈냐? 할아버지를 봐서라도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하지만 미끼가 불량이었다.
이은은 세완이 조부를 운운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그런 이은의 모습에 세완은 미련 없이 미끼를 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홀릴 만한 다른 미끼를 꺼내 들었다.
“저기, 연봉 좀 올려 줄까?”
“충분합니다.”
“그러면 복리후생 쪽은 어때?”
“휴가만 제때 챙겨 줘도 됩니다.”
기승전 ‘휴가’로 이어지는 말에 세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얘를 어떻게 꼬여야 휴가를 취소할까? 세완은 고민에 잠겼다. 조부인 이 회장도 안 통하고 연봉 올려 준다는 이야기도 안 먹힌다면…….
“너 만약 3년 동안 휴가 내면 그거 얄짤없이 무급휴가야. 알아?”
좀 치사하기는 하지만 이것만큼 효과가 좋은 것이 없었다.
아무리 욕심이 없는 사람도 내 것을 빼앗긴다고 하면 발끈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위풍당당하니 기세 좋게 소리친 세완의 말에도 이은은 코웃음을 쳤다.
“어느 정신 나간 상사가 3년이나 유급휴가를 준답니까?”
조금 전 세완이 꺼낸 ‘정신 나간 비서’라는 표현을 그에게 똑같이 돌려 준 이은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내 휴가는 무급휴가니라, 당당한 이은의 발언에 세완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친 숨소리를 내며 그녀를 흘겨보았다.
“아, 진짜!”
결국 세완이 짜증을 내며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도대체 바라는 게 뭔데?”
불쌍하게 보여 동정심을 건드리는 것도, 할아버지를 미끼로 던져 정을 자극하는 것도, 돈으로 유혹하고 족쇄를 매는 것도 모두 다 실패했다.
세완은 이은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이은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내 말 잘 안 듣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너, 내가 휴가를 내면서 한 말도 기억이 안 나지?”
상무고 나발이고 간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다.
비록 한 사람은 손자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후원을 받은 고아 소녀였다고 해도 이 회장은 그들을 차별 없는 다정함으로 대했다.
그리고 그 덕에 세완이 별로 어렵지 않은 이은은 직장 내의 상하 관계는 던져 버리고 대등한 입장에서 말을 뱉었다.
“모르면 기억을 되새겨 봐. 그래도 모르겠으면 네 머리를 쥐어뜯어!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자아비판을 해 봐. 그리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조용히 입 다물고 들어가서 일해. 가만히 잘하고 있던 사람까지 일 못 하게 만들지 말고.”
조금의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이은은 최대한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그녀의 직속 상관에게 말했다.
일곱 살짜리 유치원생을 대하는 듯 조금은 단호하고 무지막지한 언행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효과 하나는 직빵이라 세완은 어버버, 입만 벙긋거리다가 다시 다물었다.
* * *
휴가를 낸 이유를 모르는 게 미안한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녀의 휴가를 저지하겠다는 미련을 못 버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세완은 어제오늘 제법 이은의 눈치를 살폈다.
“애쓴다, 애써.”
책상 위에 놓인 초콜릿을 본 이은이 중얼거렸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것뿐인데 도대체 언제 갖다 놓았는지 그녀의 책상 위에는 출처가 빤한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시위라도 하는 듯 상무실 문도 열어 놓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닫혀 있던 문이 열려 있는 이유라면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인지라 이은은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평소라면 그쯤에서 못 이기는 척 세완에게 다가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겠지만 이번에는 이은도 타협이 불가능했다.
이은은 상무실의 문이 열려 있든지 말든지, 그리고 책상 위에 초콜릿이 놓여 있든지 말든지 자신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모니터만 응시했다.
“23일에는 문 이사님과의 점심 약속이 잡혀 있고, 24일에는…….”
그녀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부산스레 바쁜 척을 했다.
그러자 상무실 내부가 보이도록 설치한 거울에 검은 머리가 살짝 나타났다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망하고 있을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해서 이은은 남몰래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단순해.”
이은은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는 타박을 뱉으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세완이 열심히 눈치를 보던 딱딱한 얼굴에 웃음기가 섞였다. 하지만 이내 그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이 깃들었다.
“진짜 가기는 가야 하는데…….”
한숨을 내쉰 이은이 손으로 얼굴을 덮어 마른세수를 했다.
세완은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배신 운운하지만 이은이라고 쉽게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과연 자신의 휴가가 세완을 혼자 던져두고 3년이나 혼자 돌아다닐 정도로 꼭 필요한 것일까? 물가에 내 놓은 어린아이 같은 저 녀석을 두고? 타협의 여지는 없는 것일까?
이은은 휴가를 앞두고 수도 없이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부족하다 타박하고 들들 볶기는 하지만 세완은 이은에게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고, 때문에 이은은 알게 모르게 세완에게 져 주고 배려해 주는 부분이 많았다.
실제로 이은이 3년 휴직이 아니라 억지성 가득한 3년 휴가를 신청한 것은 문제가 생길 경우 언제든지 달려와 업무 복귀를 할 수 있도록 세완을 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은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해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이기 때문이었다.
꽤나 오래전, 차마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그녀에게 대신 울어 주겠다며 꺽꺽 울던 소년이 고마워 그에게만은 항상 약해지는 이은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마워도 그녀의 인생과 맞바꿀 수는 없다.
“미안.”
이은은 상무실을 향해 전해지지 못할 사과를 던졌다. 하지만 사과를 했음에도 근심과 걱정은 여전히 넘쳐났고, 이은의 입에서는 자꾸만 한숨을 뱉어져 나왔다.
* * *
같은 시간, 이은의 바로 옆방에 그녀보다 조금 적은 근심과 걱정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단다. 니 꼬라지를 알라고.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이 문장이 새겨져 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저 문장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에서 루머처럼 툭툭 튀어나오지만 거기까지야 알 바 아니고!
어쨌거나 소크라테스는 주제 파악 잘하는 게 잘 먹고 잘 사는 지름길이라 여긴 거 같았고, 세완도 그 부분에는 심히 동의를 표한다. 아니, 표했었다.
그런데 왜! 국영수 모두 잘해서 주제 파악도 잘하고 분수도 잘 아는 그가 이렇게 영문도 모르고 당해야 하는 것일까?
입도 벙긋 못해 보고 이은에게 K.O패 당한 세완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세상을 원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