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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그의 나이 일곱에 할아버지께서 질문하셨다.
“우리 세완이,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누?”
“솔이요.”
그가 대답했다.
할아버지께서 의아한 목소리로 물으셨다.
“솔이라니? 그게 무엇인고?”
에이, 할아버지는 그것도 몰라요?
세완은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그는 할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니까 할아버지가 이해하기 쉽도록 친절하게 솔이가 누군지 설명했다.
“기억 안 나세요? 이만큼 크고 털이 북슬북슬한 우리 집 멍멍이가 바로 솔이잖아요.”
세완은 양팔을 움직여 솔이의 움직임과 형태를 묘사했다.
그리고 여전히 의문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를 위해 그가 왜 솔이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솔이는 만날 먹고 자는 것밖에 안 해요. 저는 유치원이랑 영어 학원이랑 태권도 학원이랑 수영이랑……. 아휴!”
생각만 해도 힘들어 죽겠다는 듯 한숨을 폭 쉬는 아이는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이 회장은 세완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것이 아니라 정말 그를 깨물고 싶었다.
“공부해야 하는 게 너무 많아요. 그래서 저는 솔이처럼 살고 싶어요. 솔이처럼 살면 공부는 하나도 안 해도 되잖아요. 만날 맛있는 것 잔뜩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고…….”
세완의 눈에 솔이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항상 세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똑똑하다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이니만큼 그는 이번에도 할아버지가 역시 똑똑한 내 손자라며 칭찬을 해주실 줄 알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뒷목을 잡으셨고 엄마와 아빠는 애먼 세완의 등짝만 세차게 후려갈기셨다.
세완은 이유도 모르고 부모님을 따라 일단 죄송하다 고개를 숙였지만 본인이 묻고서 본인이 뒷목을 잡는 할아버지가 참 이상한 분이라 생각했다.
그 후로 10년이 흘러 그의 나이 열일곱, 할아버지께서는 또 질문하셨다.
“나중에 커서 도대체 뭐가 되려고 이러느냐?”
“백수요.”
소파에 누워 배를 벅벅 긁던 소년, 세완이 답했다.
지난 17년간의 콩깍지가 벗겨진 할아버지는 쭉 찢어진 살쾡이 같은 눈으로 세완을 노려보셨다.
“이놈!”
찢어질 듯한 고성에 세완은 일곱 살 때의 그가 그랬듯이 백수의 좋은 점과 왜 그가 백수가 되려 하는지에 대해 할아버지에게 설명했다.
“백수처럼 좋은 직업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건데. 일부러 힘들여 일할 필요가 없잖아요.”
세완의 똑똑한 반문에 이 회장이 이마에 굵게 도드라진 혈관을 하나 달고 소리쳤다.
“네놈, 네가 백수가 되게 내가 그냥 둘까 보냐? 그랬다가는 아주 맨몸으로 쫓아낼 줄 알아라. 네놈이 땡전 한 푼 없이 빈털터리 거지가 되어서 석 달 나흘을 쫄쫄 굶어봐야 그 소리를 안 하지!”
시근덕거리며 핏대를 올리는 그의 모습에 세완은 해맑은 얼굴로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제가 왜 굶어요? 에이, 할아버지, 저 건물 있잖아요. 주식도 있고. 배당이랑 월세만 받아서 써도 평생 놀고먹을 수 있어요. 돈도 많은데 일은 왜 해요? 할아버지, 전 큰 욕심 없어요. 그냥 먹고 입고 자고, 이거 세 개만 해결되면 돼요.
세완의 말에 그의 열혈 할배는 또다시 뒷목을 잡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어서 119 불러. 얼른!”
목 뒤를 붙들며 비틀거리는 이 회장의 화려한 모션 덕에 그의 주변에 있던 비서며 경호원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산 지도 벌써 십여 년이었다. 소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만 팠다.
“할아버지, 방금 눈 가늘게 뜬 거 봤어요. 허! 주먹도 쥐셨네. 하여간…….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사람들 놀라잖아요.”
세완은 점점 연기의 달인이 되어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피식,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목숨이 경각에 달할 듯한 모습으로 주저앉았던 이 회장은 그 즉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세차게 그의 등짝을 후려치며 고함을 지르셨다.
“이놈! 이 망할 놈! 할애비가 쓰러졌는데 걱정도 안 해?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구나. 이놈아, 이 나쁜 놈아!”
이 회장은 10년 동안 쌓인 원한으로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세완은 어디 벌레가 물었나 하는 듯한 표정으로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무덤덤한 얼굴로 이 회장에게 물었다.
“아, 예! 제가 나쁜 놈이죠. 근데 할아버지, 이제 저 더 자러 가도 돼요?”
“……아이고, 뒷목이야! 아이고, 혈압이야! 아이고, 나 죽겠다, 나 죽겠어. 나쁜 손자 놈 때문에 나 죽겠다!”
세완의 말을 들은 이 회장은 다시 벌러덩 누워 목 뒤를 잡는 흉내를 냈다.
이미 마음만큼은 완벽한 백수인 손자가 또 대낮부터 낮잠 자는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당신이 눕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말 한마디로 환자를 일어나게 하는 세완에게 놀란 것인지, 아니면 혈압으로 쓰러졌음에도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으로 살아나 결국 손자의 등짝을 치고 마는 이 회장의 요상한 신체에 놀란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세완은 반쯤 혼이 나간 듯한 주변 인물들을 보며 친절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요. 다 쇼니까. 다들 볼일 보세요.”
친절하게 상황을 정리한 세완은 하루 이틀 보는 모습도 아니면서 왜 그리 매번 속느냐며, 노인네 꾀병에 자꾸 그렇게 장단을 맞춰주면 안 된다는 훈수도 날렸다.
순식간에 주목받고 싶어 꾀병 부린 노인네가 되어버린 이 회장은 그의 말에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켜 세완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이놈! 이 나쁜 놈!”
아, 노인네! 진짜 체력 하나는 타고났다.
아프다며 입 엄살을 부린 세완은 보나 안 보나 내 등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것이라며 작게 투덜거렸다.
어찌 됐거나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또다시 10년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났다.
어느 날, 세완은 소머즈의 괴력과 슈퍼맨의 생명력, 베트맨의 재력을 갖춘 할아버지와 단둘이 마주 섰다.
“네 놈, 어쩔 셈이냐?”
20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며 손자에 대해서는 희망의 히읗도 남지 않은 할아버지는 한 톨의 기대도 없는 눈으로 손자에게 물었다.
세완이 반문했다.
“어쩔 셈이냐뇨?”
“이놈아, 김 비서 휴가 말이다!”
이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왜요?”
세완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회장은 또다시 목 뒤를 잡았지만 세완을 볼 때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잡는 뒷목이었다.
나날이 발전하는 그의 연기력을 깔끔하게 무시한 세완이 조부에게 질문했다.
“무슨 문제 있어요?”
태평하다 못해 귀찮아하는 것 같은 세완의 물음에 이 회장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 회장이 잇새로 말을 뱉었다.
“김 비서 휴가 간단다.”
“네, 가죠. 제가 허락해 줬어요. 간만에 좀 쉬고 싶다고 해서…….”
“이놈아, 이 망할 놈아! 그 휴가가 3년이란 말이다, 3년!”
자리에서 일어난 이 회장이 그의 등짝을 후려치며 말했다.
“이 한량 같은 놈아, 너 같은 놈을 보좌해 줄 사람이 김 비서 말고 또 있는 줄 알아? 어서 김 비서 데려와라. 어서 김 비서 돌려다오. 너 같은 놈 백 명보다 훨씬 유능한 우리 김 비서를 도로 데리고 와!”
이 회장은 앞으로도 백 년은 더 정정할 것 같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손자의 등을 내리쳤다.
그리고 김 비서의 휴가가 3년이라는 사실을 지금 처음 알게 된 세완은 얼떨떨하고 멍한 표정으로 눈만 끔벅였다.
* * *
회장실에서 쫓겨난 세완은 김 비서를 찾아 걸음을 재촉했다.
비단 조부의 말이 아니더라도 김 비서는 세완에게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다.
자타공인 놀고먹는 백수인 세완을 때 빼고 광내고 요리조리 다듬어서 그럭저럭 전도유망해 보이는 차세대 경영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김 비서였고, 동시에 그가 조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게 만들어 준 사람도 바로 김 비서였다.
멍멍이 목에 목줄 꿴 주인처럼 굴 때는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최고의 비서였다.
조부는 그에게 김 비서를 좀 닮아 보라고, 안 되면 질투나 시기라도 해 보라고 하지만 그것도 대충 급수가 맞아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질투와 시기를 퍼붓는 것조차 귀찮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재다능한 미녀, 5개 언어가 가능한 수재,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난 능력자 등 김 비서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장래희망이 백수였던 천생 한량 세완과는 정말 판이하게 달라 승부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어쨌거나 다년간의 경험으로 그는 대충 멍멍이와 개목걸이 정도로 자신과 김 비서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아! 물론 언젠가 그들의 관계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김 비서도 승진은 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세완의 생각에 김 비서는 아직도 한참, 그의 곁에 머물러 줘야 하는 존재였다.
헌데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혀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그만 남겨놓고 3년이나 훌쩍, 도대체 어디로 떠난다는 말인가!
세완은 부랴부랴 상무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곧 그곳에서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업무를 보고 있는 이은을 발견했다.
“상무님 오셨…….”
“휴가가 3년이었어?”
여상스러운 이은의 인사를 냉큼 자른 세완이 그녀에게 다가가 따지듯이 물었다.
멈칫한 이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은에게서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휴가가 3년인 게 맞아? 그것부터 대답해봐.”
호떡집에 불이라도 난 것 같은 채근에 이은은 그를 보며 눈을 한 번 깜박였다. 그리고 말했다.
“일단 3년은 맞습니다만…….”
“무슨 휴가를 3년씩이나 가?”
또다시 말을 잘라먹는 세완의 행동에 이은의 관자놀이에는 그녀의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는 듯 혈관이 하나 튀어나왔다. 이은이 냉랭하게 말했다.
“상무님이 결재를 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3년인지는 몰랐지!”
“그걸 왜 모릅…….”
그걸 왜 모르냐고 따지려던 이은은 말끝을 흐리며 그를 보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인간, 또 내용도 안 보고 사인했구나!
하지만 이미 결재는 됐고, 이은은 반드시 3년짜리 휴가를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3년까지는 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는 장기간의 휴가가 꼭 필요했다. 작게 심호흡을 한 이은이 말했다.
“이미 결재가 된 사항입니다.”
“결재 무르자!”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완은 이은보다 더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없는 도련님은 그의 말이 당연히 실현될 것이라는 듯 눈을 반짝이며 이은의 답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