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미래를 달리는 배 위에서 (完)
펠릭스 일행은 상지 궁에 이틀 머물렀다.
첫날 저녁 만찬 내내 대공은 이든만 오롯하게 시선에 담으며 계속 벙싯거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불편한 친밀을 나눠야 했다.
그나마 칼 대공자는 세 살 위인 펠릭스를 깍듯하게 대우했다.
“작은 소국인 우리 마트비아가 강대국의 틈새에서 계속 살아남으려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형님.”
형님이라니.
대공비의 우아한 입매가 흉하게 비틀렸지만, 칼 대공자는 사적인 노여움을 통치의 필요 뒤에 놓을 수 있는 정치적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펠릭스 형님께선 그 누구보다 자본 시장에 대한 이해가 높으시고, 또 신대륙에 철광석 등의 광산도 가지고 계시지요. 그러니 물보다 진한 핏줄의 인연을 생각하시어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펠릭스는 이복동생이라고 할 수 있는 칼 대공자의 청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외가 합스부르크와 대공비의 치마폭에서 대충 자라난 애송이인줄 알았는데. 의외의 자질이 엿보이는 것이 든든하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이든에게 삼촌이 되는 지친이니까.
“마트비아가 살 길은 자본 시장을 육성하는 것이 될 것이오. 금융 자본이 커나갈 수 있도록 규제를 최소화하고, 해외 무역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듯 한데.”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칼 대공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펠릭스는 빠르게 결론내렸다. 적어도 사생아나 싸지르는 대공보단 훨씬 더 마트비아를 잘 이끌 차기 대공감인 건 확실했다.
그날 밤. 엘렌은 바덴니히 대공과 상지 궁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따로 만남을 가지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레인과 바이올렛은 쉴 새 없이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엘렌의 치장을 도왔다.
드레스는 너무 과하지 않게 최고급 면사로 짠 보랏빛 천으로, 특히 은사로 수놓은 덩굴무늬가 아주 우아했다.
이 드레스는 일레인이 크라몬드 상사에서 최근 들여온 옷감 중에 최고급품으로, 단언컨대 대공비조차 구하기 어려운 천이었다.
“엘렌, 당당하세요. 어차피 아쉬운 분은 대공이 아닙니까?”
너무 초조해하는 엘렌을 보다 못해 일레인이 다독거렸다.
“대공 없이도 홀로 펠릭스를 이리 멋지게 키워 내셨고, 이제는 이든까지 손주로 가지고 계신데요. 대공은 합스부르크 세력을 등에 진 허수아비가 아닙니까?”
“아이, 일레인.”
일레인의 거침없는 말에 바이올렛이 그러게 너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눈짓을 보냈다.
엘렌의 오랜 짝사랑을 안타깝게 지켜본 바이올렛은 일레인보다 세심하게 친구를 달랬다.
“미련이 아직도 있는 거야? 아직도 오토한테 감정이 있는 거니?”
엘렌은 고개를 흔들었지만, 복받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도 몰랐다.
백분과 연지로 주름진 세월을 가린 엘렌이 대공이 보낸 시종을 따라 후원에 이르렀다.
대공은 커다란 느릅나무 아래 차려진 티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엘렌이 다가오자 대공은 의자를 빼어 주었다.
두 사람은 수면을 돕는 히비스커스 티를 앞에 두고 한참을 어색하게 침묵했다.
이윽고 먼저 입을 연 이는 대공이었다.
“펠릭스가 여기 마트비아에 머물도록 설득할 순 없었던 게요? 펠릭스가 정 안 된다면, 나중에 이든이라도 설득해 여기로 돌아오게 하면 좋겠구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조금이라도 나와 펠릭스를 안타까워했는지.
그것이 엘렌이 듣고 싶던 말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권력에 이득이 되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이런 자를 못 잊고, 이런 나약하고 이기적인 자에게 내 소중한 아들을 인정받게 하겠다고 일레인을 떼어 놓기 위해 고약한 술수를 부렸다니.
세상 귀한 손주 이든에게서 펠릭스를 빼앗을 뻔 했다니.
세상에 쳐죽일 죄인은 바로 나구나.
그제야 엘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던 오랜 망집이 벗겨졌다.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가 가진 단점을 모두 외면하고, 파편 같은 사랑을 붙잡기 위해 더욱 소중한 것을 내팽개친 어리석은 과거가 엘렌을 가슴 아프게 했다.
너무나도 명백한 진실인데, 왜 나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너무나도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에 엘렌은 이를 꽉 깨물고 속으로 일레인과 펠릭스, 이든에게 거듭거듭 사과했다.
“당신을 보니 내가 잘못 살았다는 것이 너무 확실해지네요. 나는 늘 펠릭스를 다른 무엇인가로 만들려고 아등바등 살았어요. 하지만 펠릭스 부부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아끼죠. 무릇 사랑이란 그런 것이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아직도 사랑 타령이오? 그런 순진한 생각 따위 집어치우고…….”
“아니요. 전하. 당신에게 사랑은 권력 투쟁에서 질 때 잠시 머리 식힐 유흥거리인지 몰라도, 펠릭스나 일레인, 그리고 이든에게 사랑은 서로를 지극히 아끼고, 상대를 위해 차라리 자기가 아픈 거예요.”
찻잔엔 손가락 끝조차 대지 않은 채 엘렌이 일어섰다.
“권력을 갖기 위해 펠릭스를 외면했다가, 이제 또 권력이 흔들릴 것 같으니 펠릭스를 지렛대 삼으려고 찾는군요. 그런 얄팍한 처세에 흔들리기엔 펠릭스와 이든이 받고 있는 사랑이 너무 커서요. 우리 며느리 일레인은 나와 달리.”
잠시 말을 끊은 엘렌이 비웃듯 대공을 노려보았다.
“어리석은 나와 달리 제 사람들을 지극히 아낀답니다. 그런 든든한 애정의 기반이 있으니 헛된 곳에 목말라 할 리가요.”
“…….”
얼굴을 찡그린 채 침묵하는 대공을 두고 엘렌은 돌아섰다.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이 강렬했다.
‘아, 상대를 진정으로 배려하는 사랑이 이렇게나 자신에게도 위로가 되다니. 남은 시간 동안 더 많이 사랑하며 살아야지.’
엘렌은 다짐하며 지난날의 어리석음에 종지부를 찍었다.
* * *
사흘 후, 펠릭스와 일레인은 다시 작은 범선을 타고 루덴의 남쪽 아이덴 항으로 돌아왔다.
항구에는 크라몬드 상사에서 소유한 상선 중 가장 큰 범선인 프론티어 호가 펠릭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트가 다섯 개나 되는 프론티어 호는 크라몬드 가와 페일른 가가 가져갈 짐은 모두 싣고, 또 무역품도 잔뜩 실었다.
“일레인, 나도 후년쯤에 갈 테니까 그때까지 잘 살고 있어야 해요. 일레인이 그린 풍경화 수요가 많으니까 신대륙의 아름다운 풍광도 많이 그려서 보내 주고. 내 아주 비싸게 팔아 드리리다.”
헨리 아셔 씨는 일레인을 잡고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바이올렛, 부디 건강해요. 아서 소백작의 모든 권리는 제가 잘 수호하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존 게인즈 씨는 바이올렛과 아서에게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올렸다.
아쉬움이 담긴 작별을 모두 끝내고 일행은 배에 올랐다.
크라몬드 상사의 실질 소유주를 위해 프론티어 호의 선장은 배의 선미 아래에 아주 아늑한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워낙 큰 배여서 어지간한 파도는 쉽게 타고 넘을 수 있지만, 큰 파도가 와도 좌우 흔들림이 적게 특수하게 설계된 공간이었다.
아서와 이든이 너무 신나 해서, 어른들은 두 꼬마가 혹시라도 바다에 떨어질까 노심초사였다. 그래서 이튿날부터는 아서와 이든의 허리에 긴 밧줄을 매달아 유사시에 대비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항해는 한 달 남짓 걸린다.
시커멓게 펼쳐진 밤의 바다를 보며, 일레인은 저렇게 끝없이 어둡기만 하던 절망의 나날을 떠올렸다.
펠릭스를 영영 잃을 것만 같아 두려웠던 시절. 그 시절 이든의 존재가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지.
“끝내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이든을 보며 견뎌 내리라 매일 다짐했었어.”
혹시라도 거센 바닷바람에 감기라도 걸릴까 두렵다며 뒤에서 빈틈없이 껴안고 있는 펠릭스에게 일레인이 말했다.
선원들까지 모두 잠든 깊은 만월의 밤.
일레인과 펠릭스는 선미에 앉아 밤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커다란 달이 위압적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시커먼 바다는 금세라도 성서 속의 뱀 레비아탄이 큰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 것만 같아 일레인은 더욱 바싹 펠릭스에게 몸을 붙였다.
그러자 일레인에게 망토를 빈틈없이 둘러 주고 있던 펠릭스의 손이 슬금슬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이, 펠릭스.”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항해 열흘째.
아무리 편안하게 꾸민 선실이라고 해도 얇은 판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이올렛과 엘렌, 이든과 아서가 있기 때문에 펠릭스는 일레인을 마음껏 탐하지 못했다.
파도가 심한 밤, 온 배가 출렁거리며 끄으응 신음을 낼 때만 서둘러 일레인의 뒤에서 짧은 결합을 할 뿐이었다.
그래서 펠릭스는 모두가 잠든 밤. 저 커다란 달빛 아래 일레인을 가질 수 있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조타수와 당번을 서는 이들은 모두 배 앞쪽에 있어 배 뒤끝에서 작은 소리가 난다해도 절대 들을 수 없다.
게다가 일레인은 흥분시키기기는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쾌락의 흐름에 휩싸이면 그 누구보다 과감해지는 여인이었다.
펠릭스는 드레스가 갈라진 틈으로 손을 넣어 살살, 일레인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그렇게 절망적이었다면서, 어떻게 단 한 번을 편지 한 장 보내지 않은 거지? 그렇게 무자비하게 내 몸을 자극해 놓고 어떻게 단 한 번을 연락하지 않을 수 있어.”
리스본에서의 첫날밤 이야기가 나오면, 일레인은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모른다.
일레인의 약점인 죄책감을 자극하는 펠릭스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전략의 천재 펠릭스의 전술은 단 한 번도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편지, 매일 밤 마음속에 또 쓰고 썼다는 걸 알면서……. 염치가 없지 어떻게 보내요.”
말로는 변명을 하면서도 몸은 벌써 미안함에 펠릭스의 손이 파고들기 쉽게 다리를 살짝 벌리고 있다.
“그래도 보냈어야지, 일레인. 버림받았다는 절망에 내가 3년 내내 잠을 못 자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세오드 성으로 찾아온 밤 보았다.
광대뼈는 불쑥 솟고 푹 꺼진 턱에 주름이 깊었지.
입고 있는 값비싼 옷과 워낙 본판이 수려한 얼굴이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노숙자의 병든 몰골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야위었던 몸.
펠릭스의 전략은 오늘밤도 아주 성공적이었다.
일레인은 재빨리 주변을 살피고, 드레스 뒤쪽만 살짝 올려 펠릭스를 받아들였다.
펠릭스가 일레인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보면 그저 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밤바다를 구경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주 느리고 작은 움직임이었다.
두 사람은 배의 가로대에 손을 올리고, 숨을 죽이며 서서히 쾌락의 바다로 휩쓸려 갔다.
“아하, 펠릭스. 이 바다가 마를 때까지, 나는, 당신만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만을 사랑하고, 흣, 아끼고, 위하고.”
달뜬 속삭임에 섞인 사랑의 고백은 그날 밤, 커다란 달이 두 연인의 지칠 줄 모르는 고백에 부끄러워져 저 서쪽으로 숨을 때까지.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 <공작 부인의 에로스> 끝
By.[Y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