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지치지 않는 사랑의 신
펠릭스의 긴 손가락이 일레인의 둥근 어깨와, 풍만한 가슴과, 군살 없이 탄탄한 복부와, 그리고 승마로 다져진 탄탄한 허벅지를 훑었다.
“길게 옆으로 누워서 이렇게 다리를 살짝 벌리고.”
마지막으로 펠릭스는 다리를 살짝 벌린 에로틱한 포즈를 만들어 내었다.
조각상처럼 누운 일레인의 새하얀 몸 구석구석을 펠릭스의 손가락이 꼼꼼하게 훑었다.
그날 밤, 일레인이 사내의 겉 피부와 피부 아래 숨겨진 속 근육의 구조를 느끼기 위해 했던 것처럼, 펠릭스도 일레인의 부드러운 피부 속 탄탄한 근육의 결을 섬세하게 느끼고 있었다.
펠릭스의 손가락이 지나는 부위마다 뜨거워지는 일레인의 몸을 초여름의 밤공기가 차갑게 훑었다.
뜨거운 손가락 끝과 차가운 바람 속에서 일레인의 몸은 어찌할 바 모르게 끓어올랐다.
“…펠릭스.”
참다 못한 일레인이 몸을 비틀며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펠릭스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쉿, 일레인. 모델이 포즈를 흩트리면 되나.”
“…….”
일레인은 그날 펠릭스가 느꼈던 괴로운 에로티시즘을 고스란히 실감해야 했다.
일레인의 온몸을 촉지한 펠릭스는 이제 이젤 뒤로 가 앉았다.
붓을 들고 캔버스 위에 일레인을 그리는 펠릭스의 시선을 받을 때마다 손가락으로 훑을 때보다 더 은밀하고 다정한 애무를 받는 듯했다.
황홀하도록 괴로운 시간이 지속되었다.
“보여 줘.”
한 시간 즈음 흐른 후. 일레인은 펠릭스에게 그림을 보여 주길 요구했다.
펠릭스는 일레인의 몸에 따스한 시트를 둘러 주고, 품에 덥석 안아 들고는 방금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에 함께 앉았다.
“와!”
탄성을 흘리며 일레인은 눈을 깜빡거렸다.
“펠릭스. 당신은 대체 못하는 것이 뭐야?”
캔버스 위에는 다리를 살짝 벌린 일레인이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누워 있는 모습이 유혹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눈동자는 반쯤 풀어져 그리는 이를 갈망하고, 느슨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아슬아슬 가슴을 가렸다.
디테일은 부족하지만 관능의 포인트는 오히려 더 강렬하게 잡아낸 그림이었다.
“본 색칠을 제대로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꽤 괜찮지?”
펠릭스가 물었다.
일레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제까지 비교적 담백하게 그림에만 몰두했던 눈빛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상을 줘야지, 일레인. 이렇게 심혈을 기울인 화가에게 어울리는 그런 상.”
몸을 감싼 시트 밑으로 펠릭스의 손이 파고들었다.
하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일레인은 펠릭스의 허벅지 위로 다리를 벌려 앉으며, 귀에 입술을 대었다.
“무슨 상을 받고 싶으신가요, 나의 에로스 님?”
그러자 펠릭스는 정말로 에로스 신이라도 된 것처럼 아주 관능적으로 천천히, 느긋하게, 애간장이 다 녹도록 일레인의 입술을 천천히 빨아들였다.
일레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카우치로, 응? 펠릭스.”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카우치에 펠릭스를 눕히고 일레인은 그대로 그와 결합했다.
그리고 천천히, 펠릭스가 애를 태웠듯 그렇게 아주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깎아 놓은 대리석처럼 단정한 펠릭스의 얼굴이 쾌락에 못 이겨 일그러지도록, 헉헉거리며 더운 숨을 쏟아 내도록.
“더, 으흣, 일레인, 더 빨리. 더 세게. 아. 아.”
애원하도록.
폭풍처럼 격정적인 시간이 지나갔다.
일레인은 펠릭스의 가슴에 엎드려 숨을 헐떡이며 정신이 아득하도록 강렬했던 쾌락의 여운을 음미하고 있었다.
먼저 숨을 고른 펠릭스가 일레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또 짙어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해 보고 싶었던 것이 더 있어, 일레인. 각종 명화에 나오는 여인의 포즈들을 취해 줘.”
그래서 일레인은 그 밤 내내, 펠릭스의 뜨거운 눈길 아래 흰색 시트 한 장을 의상 삼아 조각상 <밀로의 비너스>에서부터 라파엘로가 그린 <초원의 성모>, <요정 갈라테아>, 보티첼로의 <비너스의 탄생>, 등을 재현해야 했다.
펠릭스는 일레인에게 그림 속 포즈를 요구할 때마다 손끝으로 살짝살짝,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부위들을 건드렸다.
감질나게. 으흥, 절로 신음을 흘리며 다리를 꼬도록.
그럴 때마다 펠릭스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꾸짖으며 포즈를 유지하게 하고, 괴로워하는 일레인을 스케치했다.
그리고 하나의 스케치가 끝날 때마다 끝은 뜨거운 열락이었다.
펠릭스는 일레인의 위에서 뜨겁게 신음하며 속삭였다.
“여름이 올 때마다, 일레인. 우리, 같이. 응?”
참으로 지치지도 않는 사랑의 에로스 신이었다.
* * *
그 후 여름 내내 아메리카로 기반을 옮겨가기 위한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브리티나와 유럽의 비즈니스는 존 게인즈 씨와 헨리 아셔 씨가 대표를 맞아 운영하기로 했다.
그리고 알베르토 용병단의 일부가 지중해의 작은 섬에 근거를 두고 동양과 신대륙을 오가는 상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기로 조율되었다.
“그럼, 나도 전처럼 실권을 가진 왕처럼 굴어도 되는 거지?”
펠릭스가 전면에 나서면서 투자사의 대표 자리에서 한 발 물러나 있어야 했던 아셔 씨는 다시 예전의 영광을 되찾게 되어 무척 기뻐했다.
“내가 투자 실력은 없어도 인재를 골라내는 눈은 탁월하지 않은가. 젊은 인재 많이 발굴해서 아메리카 본사로 보낼 터이니, 거기서 잘 키워 봐.”
어차피 골든우즈 사의 유럽 쪽 업무는 주식과 채권 등 금융에 집중될 것이라 별문제는 없었다.
크라몬드 상사는 게인즈 씨가 대표로 있지만 아시아 쪽 비중보다는 앞으로 신대륙과 무역 비중을 더 늘리기로 했다.
펠릭스가 직접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석탄과 은, 철광석 등의 광산 개발을 지휘하고, 또 신대륙에서 유럽 간 무역을 이끌 예정이었다.
펠릭스가 비즈니스 틀을 확고히 짜는 동안 일레인은 바이올렛과 함께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 위한 준비를 착실하게 진행했다.
루덴 교외의 크라몬드 백작가 저택을 팔고, 세오드 성과 영지의 수익을 관리할 이를 찾는 일도 중요했다. 그리고 해싱턴 공작의 작위를 방계 사촌에게 넘기는 작업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신대륙에 부족한 여러 물품을 미리 구비해 화물선에 실어 보스톤에 먼저 보내 놓는 일까지 마치자 8월 말이 되었다.
오토 폰 바덴니히 대공에게 약속한 대로 마트비아를 방문해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8월 말 늦장마와 함께 폭풍우가 심해, 펠릭스는 9월 5일이 되어서야 함선을 띄울 수 있었다.
펠릭스와 일레인, 이든, 아서, 바이올렛, 엘렌 등과 뷰컴 씨와 보리스 부인, 안나와 마이클 부부 등이 동행한 큰 일행이었다.
대공은 대공국의 근위병을 보내 항구에서부터 환영을 하고 싶다고 여러 번 시종장을 보냈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는 개인 자격으로 대공 전하를 뵙고 싶습니다. 또한 대공 가와 그 어떤 혈연관계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레인 일행은 크라몬드 상사의 상선 중 비교적 규모가 작은 범선을 타고 수도 근처의 항구에 갔다.
그리고 항구에서 수도까지는 골든우즈 사에서 미리 마련해 놓은 사륜마차 네 대에 나눠 타고 상지 궁으로 갔다.
알현은 공식 알현실이 아닌 대공 저의 깊숙한 개인 공간의 호화로운 살롱에서 이루어졌다.
대공과 대공비, 그리고 후계자인 칼 대공자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펠릭스가 처음 알현할 때 빈 틈 없이 예복을 차려입고 있었던 대공 부부는 이날은 간편한 복장으로 일행을 맞이했다.
엘렌은 젊은 날의 연인을 비로소 만난다는 생각에 가여울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그러나 펠릭스 일행이 살롱에 들어선 순간부터 바덴니히 대공의 시선은 오로지 뒤뚱거리며 걷고 있는 이든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어른들끼리 대충 인사를 주고받은 후 대공은 드디어 손주에게 인사할 기회를 잽싸게 낚아챘다.
“네가 이든이로구나. 오토 폰 바덴니히 대공의 손주 이든 폰 바덴니히!”
이든 앞에 무릎까지 꿇고 앉아서 대공이 다정하게 말했다.
손주에게 보이는 살뜰한 애정에 엘렌이 기쁘게 웃었다.
펠릭스와 일레인은 그저 손주를 본 노인의 과대한 애정일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덤덤했다.
그러나 대공비와 칼 대공자의 얼굴은 불쾌한 기색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대공은 주변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오로지 손주 이든만 눈에 담았다.
곱슬거리는 검은색 머리카락에 검푸른 눈동자를 영민하게 빛을 내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세 살 꼬마는 오랫동안 손주를 기다려 온 대공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이든?”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대공이 물었다.
그러자 이든은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들이 그러하듯 배를 쑥 내밀고 당당하게 외쳤다.
“대공 하부지!”
‘할아버지’란 말에 대공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그래, 할애비다, 이든. 할애비가 보낸 목마는 잘 탔느냐?”
그러자 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토니, 토니가 있쪄요. 토니는, 열 세 살이에요, 열세 살. 저보다 훠얼씬 형이에요.”
흑단으로 깎아 만든 목마를 이야기하는데 왜 토니란 아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가.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대공이 눈을 끔벅거렸다. 그렇지만 어린 손주가 실망해서 입을 다물까 봐 토니가 누구냐고 묻지도 못하고 한 박자 늦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토니가 아주 잘 놀아 주는가 보구나. 같이 오지 그랬니?”
그러자 이든은 갑자기 입술을 비죽거리며 앙 울음을 터트렸다.
“토니는, 토니는 배를 탈 수 엄쪄요. 으아아앙.”
이든이 울자 대공은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매며 손을 떨었다.
보다 못한 일레인이 이든 옆에 앉아 안아 주며 대공께 아뢰었다.
“토니는 이든이 타던 조랑말입니다. 정이 담뿍 들었는데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야 사정을 알게 된 대공은 크게 소리쳤다.
“이든, 이든. 그깟 조랑말. 할애비가 백 마리라도 사주마.”
“하부지, 미워!”
돌아온 건 더 서럽게 우는 이든의 울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