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손 끝에 새기는 당신의 전부
“그래, 그렇지. 내가 뭘 요구할 처지가, 되지 못하지.”
대공이 펠릭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권력과 귀족의 작위였다. 그러나 남들은 못 가져 안달인 그걸 펠릭스는 원하지 않는다.
재물은 펠릭스가 훨씬 더 많다. 그러니 어릴 적 버렸던 아비는 이제 와 아비 자리를 요구할 수 없다.
또한 그래서 날로 유럽 권력의 변방으로 자꾸 밀려나고 있는 소국의 경제력을 펠릭스를 통해 키워 보고자 하는 바람도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지기만 한다.
“에휴.”
짙게 한숨을 쉰 대공은 그래도 손주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한스 경.”
대공이 부르자, 밖에서 대기하던 이가 들어왔다. 금색 견장이 달린 제복을 입은 걸 보니 시종장쯤 되는 이 같았다.
“그거, 말일세.”
대공이 큼큼, 어색하게 말하자 한스라는 이가 밖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시종 넷이 커다란 나무 상자를 끙끙대며 들고 들어왔다.
대공이 일레인에게 말했다.
“이든한테 주는 선물이야. 8월에 마트비아에 올 때 더 많이 선물을 준비해 두마.”
그러니까 꼭 방문해다오.
눈빛이 하도 간절해서 일레인은 좋게 말씀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예, 가급적 그리 할 수 있도록 펠릭스에게 잘 말하겠습니다, 전하.”
일레인의 약속에 대공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데 차는 벌써 다 마셨고, 하고 싶은 말도 거의 다 한 것 같은데도 대공은 어쩐지 떠나려 하지 않았다.
눈치 빠른 일레인은 대공이 펠릭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대공이 여러 번 사람을 보냈지만 펠릭스가 한사코 만남을 거부하고 있다는 걸 일레인은 알고 있었다.
“펠릭스는 이따 늦게야 온다고 했습니다, 전하.”
일레인이 그 말을 하고서야 대공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도 발을 떼지 못하며 자꾸 벽에 걸린 그림을 힐긋거렸다.
작은 나라지만 한 나라의 통치자인데도, 자손에 대한 애착은 놓지 못하는구나.
“이든 그림, 드릴까요?”
일레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공이 한스를 향해 소리쳤다.
“한스 경. 저기, 저 벽에 걸린 우리 손주 이든 그림, 조심조심 잘 떼어 내서 잘 실으시오.”
손주 그림을 얻고서야 마트비아의 오토 폰 바덴니히 대공은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하, 손주 사랑이 대단하시구만.”
해가 서쪽으로 붉게 넘어갈 무렵 돌아온 펠릭스는 대공이 주고 간 선물 상자를 열어 보곤 실소를 터트렸다.
상자 자체도 귀한 장미목으로 귀중품을 올려 두는 장식용 궤로 자랑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상자 안에는 더 대단한 것이 들어 있었다.
흑요석처럼 새카맣게 윤기를 내는 정교한 목마였다. 재질은 에보니, 생장이 느려 쇳덩이처럼 조직이 아주 치밀해 조각이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흑단목 조각이었다. 안장은 정교한 무늬가 촘촘히 투각된 순은으로 되어 있고, 목마의 두 눈은 아기 주먹만 한 최상급 가넷이었다.
“이거 하나만 팔아도 필라델피아의 최고급 주책 한 채는 너끈히 사겠는데.”
펠릭스가 대리석처럼 매끈한 표면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마음이 좀, 그래?”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던 대공이 이제야 손주 준다고 5백 년 이상 큰 귀하디귀한 흑단목으로 목마를 조각해 선물해 주다니. 펠릭스 입장에서는 서운하고 고까울 만했다.
그러나 펠릭스는 씨익, 이제는 잠을 잘 자서 다시 대리석처럼 윤기 나는 얼굴에 조각 같은 미소를 만들어 냈다.
“내 아들이 듬뿍듬뿍 사랑을 받는데 나야 좋지. 나는 대공을 내 아버지로 인정하는데 인색하게 굴 이유가 충분하지만, 이든은 대공을 할아버지로 인정하는 데 인색할 이유도 없고. 그리고 내겐 일레인.”
펠릭스의 긴 손이 일레인의 얼굴을 다정하게 쓸었다.
“내겐 당신이 있는 걸로 충분해.”
나만 있으면 된다는 말. 언제 들어도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행복해하는 일레인을 보는 펠리스의 입매가 점점 야릇하게 변했다.
“나, 오랫동안 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 알레인. 포르투나 저택의 작업실에서 오늘 밤에. 이제 저택을 정리하고 나면 해 볼 수 없는 거니까, 오늘 밤에, 응?”
눈빛이 음흉하게 짙어진 것으로 보아 밤마다 일레인을 흥분시키는 일의 연장일 것 같은데.
펠릭스는 ‘몸과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불을 질러 놓고 냉정하게 내친 지난 3년간을 보상하라’면서 밤마다 일레인을 파고들었다.
어쩌면 강박적이기조차 한 그의 열정이 때로 버겁기도 했지만 일레인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펠릭스와 재회한 순간 일레인은 단단히 결심했다.
앞으로 살면서 펠릭스가 무슨 요구를 어떻게 하든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임을.
무엇을 원하든 다 들어주는 것이 일레인이 펠릭스에게 치르는 속죄의 방식이었다.
일레인은 펠릭스의 목을 감고, 입술을 살짝 물며 속삭였다.
“저녁 든든히 먹고, 가요. 그럼.”
두 사람은 후작 부인이 요리장에게 명해 심혈을 기울여 차려 낸 화려한 저녁 만찬을 들고 느지막이 루덴 외곽의 포르투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을 지키는 시종들을 모조리 물린 후, 일레인은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자, 해 봐!”
“무엇이든 다 해 줄 거지?”
펠릭스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일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당신 그리고 싶어. 어머니 따라서 어릴 적 붓을 꽤 많이 잡아 봐서 당신만큼은 아니어도 나 꽤 그리거든.”
그런데 그걸 왜 꼭 여기 포르투나 작업실에서만.
의문이 치솟았지만 일레인은 한 손에 등불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펠릭스의 커다란 손을 잡고 작업실로 올라갔다.
봄, 여름을 지내기 위해 세오드 성으로 옮겨 가면서 일레인은 그림 도구에 먼지 방지용 흰 천을 씌워 놓았었다.
그래서 한밤의 작업실엔 먼지가 뽀얗게 앉은 흰 천 덩어리가 여기저기 세월을 쌓아 가고 있었다.
“창문부터 열어야겠어.”
일레인은 먼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습기를 머금은 초여름의 밤공기가 짙은 라일락 꽃향과 함께 훅 몰려들었다.
펠릭스가 이젤과 물감과 팔레트를 덮고 있는 흰 천을 벗기는 동안 일레인은 야간 작업을 위해 놓아두었던 수십 개의 등에 차례로 불을 붙였다.
“자, 화가 펠릭스 페일른 씨. 그대는 대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으신가요?”
일레인이 묻자 펠릭스가 씨익,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가 크라몬드 상사의 일을 수습하러 동양으로 떠나기 전의 밤을 기억해?”
기억한다.
그날, 일레인은 살아 돌아온다는 기약이 없는 펠릭스를 몸에라도 새겨 기억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그의 침실에 들었었다.
그런 나를 펠릭스는, 온 힘을 다해 거부하고…….
그날 일레인은 펠릭스의 전부를 몸에 새기는 대신 캔버스에 새겨 넣었었지.
펠릭스의 아름다운 나신의 전신 그림은 지금 일레인의 침실 안에 있는 커다란 클로젯의 맨 안쪽에 은밀하게 잘 숨겨져 있다.
그런데 왜 그 날을.
그러다 문득 한 곳에 생각이 닿았다.
“…설마, 펠릭스!”
“맞아, 일레인. 나 그날 당신이 내 몸을 구석구석 터치할 때마다, 그리고 나중에 그렇게 터치한 감각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나를 바라볼 때마다 너무도 황홀하게 좋았어.”
실은 터질 듯 치미는 욕망을 참기 위해, 거칠어진 숨을 숨기기 위해 이를 악물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수천 번도 더 불렀지만.
그 기막힌 관능의 에로티시즘은, 죽을 것처럼 치미는 육체의 갈망은 내 몸과 영혼에 절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새겨 결국 당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
그러니 이제 내가 그 지워지지 않은 흔적을 당신의 몸과 영혼에 새길 차례야.
절대 나 펠릭스 페일른을 잊을 수 없도록. 잠시만 헤어져도 치미는 갈망에 잠을 못 이루도록 말이지.
펠릭스가 일레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일레인의 머리에 손을 올려 안나가 정성껏 땋아 올려 준 머리를 풀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가 곱슬곱슬 흘러내렸다.
“펠릭스…….”
“쉬잇, 착하지. 나, 당신 없는 3년 동안 밤마다 꿈을 꿨었어. 당신의 이 새하얀 목과…….”
펠릭스의 긴 손가락이 일레인의 입술을 훑고 턱을 가볍게 쓰다듬고 목과 쇄골을 쓸었다.
그리고 벌써부터 가빠지는 숨결에 자꾸 드레스 위로 부풀고 있는 가슴 위를 쓸었다.
“부드러운 가슴과, 일레인.”
“하아.”
일레인은 달뜬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펠릭스는 낮은 소리로 웃으며 일레인의 등 뒤에 섰다.
솜털이 보송한 목 뒤를 살짝 쓸어내린 펠릭스는 다시 젊잖게 거리를 벌리고 등 뒤 드레스의 진주 단추를 차례로 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관능적인 라일락 향기를 실어 오는 작업실에서, 펠릭스는 차례로 일레인의 옷을 벗겼다.
그날, 일레인에게 사내의 몸이 어떤 골격으로 이루어졌는지 만져보게 해 주던 밤처럼 이제 펠릭스가 일레인의 몸을 손끝으로 느끼고 있었다.
“부끄러워, 펠릭스…….”
밤이고 낮이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알몸으로 서로를 탐하는 사이지만, 그리고 그의 아이를 낳은 몸이지만.
이렇게 모델로 서서 몸을 보이는 건 무척이나 낯설고 쑥스러운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치유의 과정도 된다면서. 그래서 나를 모델로 그릴 때 당신이 느끼는 기쁨을, 나도 당신과 이든을 모델로 그리면서 느껴보고 싶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목소리는 왜 거칠게 잠기고, 눈빛은 더욱 검게 가라앉고, 손끝은 왜 근육을 촉지하지 않고 자꾸 가슴에서 집요하게 머물다 자꾸 배꼽 아래로만 향하는지.
“펠릭스으.”
“쉬이, 착하지. 오랫동안 꿈꿔 온 내 로망이야. 저기 멀리 차이나 재스민 꽃 덩굴 아래에서도, 또 홀로 비참함을 곱씹을 때에도. 난 언젠가 당신을 이렇게 그릴 날을 꿈꿨어. 그렇게 버틸 수 있었어. 그러니까, 일레인. 손을 내리고.”
펠릭스가 자꾸 가슴과 몸을 가리는 일레인의 손을 부드럽게 끌어 내렸다.
“자, 여기 앉아.”
펠릭스는 어느 새 폭신한 쿠션까지 놓은 카우치에 일레인을 밀어 앉혔다. 그리고 그 앞으로 캔버스를 올린 이젤을 운반해 왔다.
유화 물감이 가득 덜어져 있는 팔레트가 놓인 작은 협탁을 이젤 옆에 끌어다 놓은 펠릭스가 다시 일레인에게 다가왔다.
“내가 그리고 싶은 당신의 모습은, 일레인.”
일레인이 그날 밤 그러했던 것처럼 펠릭스는 아주 조심스럽게 일레인의 나신을 옆으로 눕게 하였다. 그 고요한 듯 뜨거운 눈빛에 일레인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