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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에로스-109화 (109/112)

#제109화. 증오 끝에 결국 연민 한 자락

다이앤을 생각할 때마다 일레인은 가슴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아버지를 그리 가시게 하고 엄마의 비극을 끔찍하게 조롱했잖아. 그래서 내 손으로 처단하고 싶었어. 내 손으로 책임을 물어야 했다고. 그런데 몰래 빼돌리다니.”

미움과 분노가 가슴을 활활 태운 끝에는 쓰라린 비탄이 뒤따랐다.

“빼돌려서 그렇게 죽게 하다니!”

다이앤은 아빠를 죽였다. 그리고 음탕한 행위를 하며 엄마도 함께 욕보였다.

그런 다이앤 때문에 일레인은 사랑하는 펠릭스를 버리고 해싱턴 공작과 혼인해야 했다.

그런 다이앤을 제 손으로 처단하는 것이 부모님과 가문에 대한 의무라 믿으며 사라진 다이앤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그렇지만, 처단할 때 처단하더라도 그렇게 비참하게 농락당한 끝에 험하게 죽어 가길 바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니 험하게 죽게 하더라도 그건 가족 내에서 일어나야 할 일이었지, 빌헬름 그 개놈의 손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야 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

임신한 일레인을 대신해 다이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갔던 엄마는 비참하게 죽어 가는 딸의 원망 앞에서 가슴이 갈가리 찢겨 돌아왔다.

결코 밖으로 내색은 안 하셨지만, 일레인은 엄마가 밤마다 다이앤을 위해 촛불을 밝히고 눈물로 기도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애를 사랑하지 못한 저를 벌하시고, 부디 그 아이가 그곳에선 신의 사랑 안에 새로이 태어나게 하소서. 그에게 가할 신의 분노는 제발 제게 내리시고, 그 아이에겐 새로운 평온을 허락하소서.”

그렇게 기도하며 바이올렛은 비통하게 울었다.

아서와 손주 이든을 지극히 아끼고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찬 삶을 살고 있지만, 이따금 아름다운 눈에 처절한 슬픔이 어리는 걸 보았다.

이든을 낳기 전이라면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이제는 안다.

어미는 자식을 끝까지 미워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남편과 또 다른 자식을 상하게 한 원수이지만, 끝내 마음 아파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이올렛이었다.

“왜 그 지경이 되게 만들었어, 윌리엄!”

일레인이 매섭게 추궁했다.

그러자 윌리엄이 고통스럽게 변명했다.

“나도 나름대로 사랑했단 말이야. 수녀원에 가서 참회한다길래, 나중에 데려와 너와 숙모님 앞에서 진심으로 용서를 빌게 할 생각이었어.”

일레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좋은 집안에서 고이고이만 커서 서른이 다 되도록 인간이 어디까지 사악해질 수 있는지 배우질 못했구나.

그래서 끝내 더 많이 사랑하는 자는 가슴이 찢기더라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구나.

“그럼 끝까지 돌보든가. 그게……!”

책망하던 일레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가족이 지키질 못하고, 가족이 응징하지 못한 다이앤이다. 아무리 사촌이라 해도 결국 윌리엄은 남에 불과하다.

산 사람은 최선을 다해 삶을 아름답게 꾸려 가야 할 의무가 있다.

이제 일레인과 바이올렛은 다이앤이라는 가슴 아픈 존재를 묻고 앞으로 전진해야 할 때였다.

“…혹시 다이앤의 묘지가 있는 곳을 지날 일이 있으면, 꽃이라도 한 송이 부탁해.”

복잡한 마음으로 부탁을 하자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인은 샬럿 고모에게로 돌아갔다.

샬럿은 일레인이 포장해 가져온 펠릭스의 에로스 신 그림과 아서와 이든을 그린 작은 크기의 유화를 엄마의 그림 옆에 걸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리는 걸 옆에서 보지 못하게 되어서 너무 섭섭하다, 일레인.”

“후년 즈음엔 어느 정도 거처가 안정되어 있을 거예요. 꼭 놀러 오셔야 해요!”

“그래, 아서랑 이든, 그리고 너와 스탠 픽셔 님이 그린 그림들 보러 꼭 가마. 그런데 요새는 그림이 좀 달라지고 있어.”

두 사람이 요새 새로 떠오르기 시작한 인물화 사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저, 일레인 님을 뵙고자 하는 분이 계십니다.”

후작가의 집사 롱본 씨가 긴장한 얼굴로 일레인에게 명첩을 내밀었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찾아온 사람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일레인은 아주 고급스러운 비단 봉투를 열었다.

“아니, 이 분이 왜 나를……?”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샬럿 고모, 마트비아 대공이시래요.”

“뭐? 아니 대공이 왜 펠릭스가 아닌 너를 보고자 한다니? 아니, 이럴 것이 아니라 롱본, 여기 초콜릿 차 치우고 실론 티와 살구 푸딩, 아 그리고 어제 구운 마카롱도 내오게.”

마틸다 여왕 앞에서도 당당했던 샬럿 고모가 마트비아 대공이 왔단 말에 당황해 허둥지둥했다.

딸 같이 일레인을 아끼는 마음이라 시댁이 될 수 있는 펠릭스의 친부 등장에 적지 않게 긴장한 듯했다.

고모의 진심에 가슴이 따스해진 일레인이 샬럿의 손을 잡았다.

“고모. 제가 잘 말씀 나눌게요.”

살롱 밖으로 아주 굉장히 고급스러운 사륜마차와, 시종과 호위병 일행이 보였다. 얼핏 보아도 스무 명이 훨씬 넘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무척이나 고귀해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일레인과 샬럿은 살롱의 입구에서 두 손을 모으고 오토 폰 바덴니히 공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샬럿 해밀턴 후작 부인입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일레인 페일른입니다.”

“오호, 해밀턴 후작 부인. 실례가 많습니다. 내가 우리 며느리랑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며느리래.

샬럿의 입가가 움찔움찔 기쁨에 떨었다.

그러나 일레인은 담담하였다. 펠릭스가 저분을 아버지로 인정할 마음을 내지 않는 한, 자신은 그저 이웃나라 고귀한 대공을 뵙는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일레인,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지?”

“예, 전하.”

그러자 샬럿 고모는 공손히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총총 안쪽 문으로 사라졌다.

롱본 씨가 붉은빛이 투명한 홍차와 곁들인 쿠키를 내왔다.

“들지.”

대공이라서 그런가.

자신이 후작 가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능숙하게 일레인에게 차를 권하고 먼저 잔을 들고 훌훌 마셨다.

일레인도 투명한 하늘빛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펠릭스가 아예 신대륙으로 이주하려 한다고 들었다. 거기에 사업체를 두고 여기 계속 머물면 되는데, 왜 굳이 너와 우리 귀여운 손주까지 데리고 그 미개한 땅으로 이주를 한다는 게냐?”

‘우리 귀여운 손주’라니. 이든을 보신 적이 있나?

일레인의 표정에 떠오른 의문을 읽었는지 마트비아 대공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엘렌이 편지를 보냈단다. 그래서 네가 그린 아이들 그림 중 한 점을 어렵게 구했지. 뒷모습만 봐도 얼마나 귀여운지.”

아하.

펠릭스가 다 사들이고자 그리 애썼다더니, 이분도 사려고 해서 이든 그림 가격이 그렇게 천정부지로 올랐구나.

일레인은 앞에 앉은 마트비아 대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금사와 은사로 직조한 최고급 옷감과, 표정에서 배어 나오는 엄숙한 권위를 살짝 걷어내고 나면 그 밑에 남는 건 결국 아들과 손주를 잃어야 하는 슬픔이 고여 있었다.

그 모습이 일레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잠시만요. 저기 저 그림, 보이세요?”

일레인은 티 테이블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살롱의 안쪽 중앙 벽을 가리켜 보였다.

거기에는 일레인이 그린 펠릭스와, 엄마 바이올렛이 엎드려 있는 그림과 함께 작은 크기의 이든과 아서의 정면 그림도 나란히 걸려 있었다. 초록의 벌판에서 털이 북실북실한 조랑말을 타고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오오, 정면 모습은 처음 보는데…….”

바덴니히 대공은 홀린 듯 의자에서 일어나 그림 앞으로 가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입꼬리가 기분 좋게 위로 치솟고, 눈에는 따스한 애정이 가득했다.

“이든이라고 해요, 전하.”

“이든, 이든.”

절대 잊고 싶지 않다는 듯 몇 번이고 입 속으로 이든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대공이 불쑥 말했다.

“펠릭스가 받지 않겠다면 대신 이든에게 백작 작위를 주마. 마트비아에 정착해 살자고 펠릭스를 설득해 주렴. 철광석 광산 같은 거나 상선 같은 거 달라고 하지도 않으마.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해. 그저 마트비아에 살면서 이따금 이든과 함께 궁을 방문해 주면 그걸로 충분하다, 일레인.”

비굴할 정도로 애처로운 부탁이었다.

후계인 칼 대공자가 아직 아이가 없다던가. 그래서 저렇게 후계에 목을 매는 건가.

“…펠릭스에게 말씀을 전하긴 하겠지만, 그러나 아마 그이는 떠나길 선택할 것입니다. 다만 떠나기 전에 이든과 함께 찾아뵈라고는 설득할게요.”

“오오…….”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이든을 보게 된다는 기쁨은 완연했다.

“아마 8월 말경에 뵙게 될 것 같아요. 9월에는 우리가 떠날 테니까요.”

“펠릭스는…….”

에로스 신의 모습을 한 너무 잘난 아들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대공이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삼켰다.

“왜 기어이 간다더냐?”

“그이는 자유로운 곳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 올리고 싶어 합니다. 그럴 능력도 충분하고요.”

그러니까 자랄 때는 한 번도 찾지 않고, 홀로 성공한 다음에 와서 아비 대접, 할아버지 대접 좀 받아 보려는 속 보이는 짓은 그만하시라는 말이었다.

“…….”

대공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럴 땐 한 나라의 통치자의 면모 따위는 없는, 버림받은 추레한 노인네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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