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네가, 내 아들이구나
일레인을 대신해 작은 이든이 파고들자, 눈을 뜰 듯 말 듯 깨어나려던 펠릭스가 이든을 꽉 안고 다시 쌕쌕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이든, 아저씨 잠 잘 자게 토닥토닥 해 주고 있어. 엄마는 갔다 올게.”
일레인의 말에 이든이 걱정 말라는 듯 씩 웃고 작은 손으로 펠릭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러더니 신기한 듯 펠릭스의 짙은 눈썹과, 오뚝한 콧날을 살살 작은 손가락으로 훑었다.
아빠의 뺨을 훑어보는 이든이라니.
갑자기 숨이 턱 막히도록 기쁨과 감동이 치밀었다.
일레인은 후둑후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며 투왈렛 룸으로 갔다.
양동이 가득 세숫물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안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 있었다. 모든 갈등이 순조롭게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데서 오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핏줄은 못 속이나 봐요. 처음 봤는데도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열린 문 사이로 이든과 펠릭스를 본 모양이었다.
정말.
이든은 일레인을 닮아 막 아무한테나 안기고 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펠릭스에겐 얌전하게 폭 안겨 있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엄마랑 엘렌은?”
“뷰컴 씨가 아까 간밤에 펠릭스 님 오셨다고 말씀드리셨어요. 엘렌 님이 보러 오시겠다고 하는 걸 큰마님이 말리셨어요. 간만에 만난 청춘남녀의 침실에 그렇게 쳐들어가면 어떻게 하냐고.”
일레인의 머리를 땋아 올려 주며 안나가 큭큭 웃었다.
“여기 좀 봐요. 목덜미에 이 자국 좀 봐. 뜨거운 재회의 밤을 보내셨군요.”
“아이, 안나!”
거울 속에서 엄한 표정을 지어 보여 봤자 소용이 없었다.
안나는 큭큭 웃으며 분가루를 듬뿍 묻힌 화장솜으로 목의 흔적을 가려주었다.
“펠릭스는, …어떻더냐?”
1층의 살롱에 내려갔더니 초조한 얼굴로 서성거리던 엘렌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물었다.
“조금 말랐지만,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래. 아직 자는 거니?”
“예, 그간 잠을 잘 못 잤나 봐요.”
“이든은? 아서는 바이올렛과 조랑말 보러 갔는데 이든이 없던데?”
“이든은 펠릭스와 있어요, 엘렌.”
“헙.”
놀란 듯 엘렌이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러더니 펑펑, 주름진 눈으로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이든이 펠릭스와 둘이 있겠다고 하든? 그 애는 낯선 이랑 별로 살갑게 어울리질 않잖니?”
어릴 땐 낯도 꽤 가렸고, 지금은 예의 바르게 인사만 하고 거리를 두는 손주가 펠릭스와는 단 둘이서 함께 있다는 말에 엘렌이 의자에 털썩 앉아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엘렌…….”
갑자기 우는 엘렌이 당황스러웠지만, 일레인은 그 심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든이, 이든이, 흐윽, 제 아빠도 모르고 크게 해서, 흐윽, 미안하구나, 일레인.”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것인가.
오랫동안 펠릭스를 대공의 후계로 키울 생각만 하고 살아와 결국 아들에게서 일레인을 떼어 놓고, 그 결과 손주는 지난날의 펠릭스처럼 사생아 아닌 사생아로 크게 했다.
그게 너무 사무치게 가슴이 아프고 후회되어 엘렌은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일레인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였는데요. 지금부터라도 제자리를 찾으면 되죠.”
펠릭스가 원한다면. 그러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펠릭스가 원하지 않을까 봐 너무나 두려웠다. 배신당한 것에만 분노하여 응징하기만 바랄까 봐 두려워 감히 먼저 연락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는데.
그 모든 게 너무 먼 옛날처럼 벌써 희미해지고 마음 한가득 봄 햇살이 어룽어룽 피어올랐다.
“그래, 그래. 너무 늦지만 않았으면…….”
엘렌이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노아 부인에게 보양식을 준비하라 이르고 다시 올라가 보겠습니다.”
일레인은 주방에 들러 펠릭스에게 먹일 생선 스튜를 주문했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배고프다고 칭얼거리기 일쑤인 식욕 왕성한 아들을 위해 살짝 데운 우유와 갓 구운 흰 빵을 들고 다시 침실로 향했다.
그때, 펠릭스는 마침 턱을 쓰다듬는 간지러운 손길에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
기대하고 있던 일레인의 얼굴 대신 웬 꼬마가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펠릭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놀라 몇 번 눈을 깜빡이니, 자신과 똑같은 색의 검푸른 눈동자를 장난스럽게 반짝거리며 꼬마가 작은 손가락으로 펠릭스의 뺨을 쿡 찔렀다.
“펠릭쯔 아저찌. 여기 꺼끄러워. 천사가, 수염이 있쪄요?”
천사?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자, 꼬마는 아직 머리통이 몸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작은 몸을 일으키곤 펠릭스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날개는 어디 갔쪄요? 왜 날개가 엄쪄요?”
등을 만져 보려 뻗는 팔이 짧아서, 꼬마의 가슴이 펠릭스의 얼굴을 짓눌렀다.
아기 냄새가 코 한가득 훅 밀려들었다.
생명력이 봄꽃처럼 왕성하게 피어나는 어린 아이 특유의 상큼한 체취. 그리고 목 뒤로 쑥 집어넣고 등을 훑은 앙증맞은 손가락의 감촉.
“네가… 이든, 이구나.”
말을 하는데 목소리가 젖어 떨렸다.
당황해서 얼굴을 쓸어 보니, 눈물이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어, 아저찌, 우어요?”
어른이 우는 게 신기한 듯 검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바라보던 이든이 작은 손을 내밀었다.
“우지 마요, 우지 마.”
펠릭스가 작은 손을 내밀어 얼굴을 열심히 토닥여 주며 속삭였다.
“나도 날개 엄쪄요. 안 우어요.”
어린애도 안 우는데 다 큰 어른이 날개가 없다고 울면 되겠냐고 그 작은 손가락으로 정성스럽게 쓰다듬어 준다.
이렇게나 다정한 아이가 내 아들이구나.
펠릭스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든을 바라보았다.
뺨에 와 닿는 말캉한 손이 너무 보드랍고 너무 따스하다.
아아, 내 아들. 이제 네가 내 삶의 등대가 되겠구나.
눈 앞의 작은 생명체를 향해 방금 전까지 느껴 보지 못한 애정이 격렬하게 솟구쳤다.
“아아, 이든.”
펠릭스는 이든을 꽉 껴안고 말았다.
이든에게 빵과 우유를 가져다주려던 일레인이 문가에서 이 장면을 보았다.
이든을 꽉 껴안은 채 어깨를 떨며 눈물을 삼키는 펠릭스와, 너무 꽉 껴안아 답답해 다리를 버둥거리면서도 제 나름대로 위로한다고 애써 손을 뻗어 펠릭스의 머리를 쓰다듬는 이든이 너무 사무치게 정다워 보였다.
아아.
일레인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 *
평소보다 한참 늦게 시작된 아침 만찬에서 이든과 아서는 펠릭스의 양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평소 주변에 남자라고는 늙은 집사 뷰컴과 안나의 남편인 마부 겸 시종 마이클밖에 없어서 어른 사내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이든과 아서는 식당에 들어오기 전 옆에 있는 살롱에 가 펠릭스의 초상화를 보며 둘이서 속닥거린 참이었다.
“날개가 없어서 울었다고?”
“응, 울었쪄. 엉엉 울었쪄.”
“저렇게 멋진 날개가 없어지면 진짜 울고 싶긴 하겠다.”
저렇게 멋진 날개가 없어지다니.
두 꼬마가 너무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식당에 들어왔다.
두 꼬마는 왜 날개가 없어진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속상한 일을 직접 물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 때문에 입술만 달싹거리며 펠릭스를 자꾸 힐끗거렸다.
그러다가 두 살이라도 더 먹은 아서가 먼저 용기를 냈다.
“날개는, 어떻게 잃어버렸어요?”
어른들은 모두 입술을 꽉 깨물며 터지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를 썼다.
펠릭스는 싱긋 웃으면서 잘못을 저질러 하나님께서 도로 날개를 가져가 버리셨다고 대답했다.
“음, 그러엄, 날개 또 생겨?”
이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글쎄, 잘못을 저지른 걸 만회하려면 아마 아주 오래 걸릴 것 같다, 이든.”
창으로 길게 빗겨 들어온 아침 햇살 속에서 펠릭스가 다정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수척해진 뺨에 짙은 음영이 졌다.
‘얼마나 잠을 못 잤으면.’
이든의 그림을 보다 말고 잠이 들었던 지난 밤을 생각하자 일레인은 마음이 아팠다.
어서 많이 먹여서 도로 건강하게 만들어야지. 그래야 눈부신 미모를 되찾아 다시 내 모델이 되어 주지.
그래서 두 꼬마를 향해 엄하게 말했다.
“식사 시간에 그렇게 많이 말하는 거 아니라고 했지? 어서 먹어야 키가 쑥쑥 크지.”
그러나 이든은 일레인의 눈치를 보며 펠릭스의 코트 자락을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응?”
대답하는 펠릭스의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저렇게 좋을까.’
엘렌은 처음 보는 아들의 다정한 모습에 놀라 씹던 것도 잊고 멍하나 펠릭스와 손주를 바라보았다.
“펠릭쯔, 언제 말 탔쪄요?”
이든이 수줍게 물었다.
뭐라도 펠릭스한테 자랑하고 싶은데, 할 것이 딱히 없다. 게다가 아서는 말을 탈 줄 아는데 자신은 타지 못하니 펠릭스 앞에서 창피함과 초조감을 느끼는 듯했다.
“음…….”
바로 전날 오후 내내 이든이 일레인 앞에서 말을 타며 아서를 부러워하는 걸 지켜보았던 펠릭스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보는 순간부터 무한한 애정을 느끼게 된 이 꼬마, 자신의 분신이 실망하는 모습을 정말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열 살이 넘어서야 말 타기를 배웠단다. 가난해서 말을 살 수 없었거든.”
열 살! 난 겨우 이제 세 살인데!
안심한 표정으로 펠릭스와 같은 검은색 머리통을 열심히 끄덕이던 이든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펠릭쯔, 가냔이 머야?”
“응, 가난은 말이지.”
펠릭스가 쉬운 말을 골라가며 가난이 무엇인지 이든에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고개를 펠릭스 쪽으로 숙인 이든이 진지한 얼굴로 ‘가난이란 사고 싶은 걸 살 수 없는 거야.’ 하고 말해 주는 펠릭스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일레인과 엘렌, 바이올렛, 세 여인의 눈길이 서로 부딪쳤다.
촉촉하게 젖어든 눈빛은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피는 못 속이네, 정말.’
식사가 끝나고 아이들은 펠릭스더러 함께 말을 타자고 아우성이었지만, 바이올렛이 엄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펠릭스는 오랫동안 배를 타고 오느라 너무 피곤하단다. 오늘은 하루 종일 좀 쉬시게 하고, 내일부터!”
그러자 아서와 이든은 서운해서 입을 삐죽거렸지만 아이답게 곧 포기하고 마이클에게 와아아아 소리치며 달려갔다.
“마이클이란 청년 혼자 저 혈기 왕성한 꼬마들을 돌볼 수 있을까요?”
나의 소중한 이든이 다치기라도 하면!
여전히 눈 밑이 퀭한 채로 펠릭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