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105화 (105/112)

#제105화. 나와 일레인의 아이

“펠릭스…….”

일레인은 빈틈없이 몸을 겹친 채 온몸으로 울고 있는 사내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눈물을 닦아 주고 싶어 그를 밀어냈지만, 그럴수록 펠릭스의 팔 힘이 강해져서 틈을 벌릴 수 없었다.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어. 당신이 봐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어.”

“…….”

펠릭스는 대답 대신 몸을 떼어 내 옆으로 누웠다.

그사이 일레인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잠옷과 가운을 입었다.

펠릭스의 젖은 시선이 일레인을 따라왔다.

펠릭스는 쓰디쓴 마음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결코 일레인을 거스를 수 없음을.

놓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나 일레인의 말 한마디에 주인에게 복종하는 노예처럼 움직이고 말았다. 이래서야, 일레인이 어떻게 행동한다 해도 졸졸 쫓아다니는 머저리가 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놓으려 했으나 놓을 수 없다. 떠나간다 해도 따라가야만 했다. 결국, 여전히 그는 일레인의 것이었던 것이다.

잠시의 허탈함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일레인에 대한 간절함만 남았다.

“어딜 가려고, 일레인?”

나를 또 버리고 어디로 가려고.

펠릭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또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잔뜩 담긴 목소리였다.

스물여섯씩이나 먹은 사내가 방금까지 몸을 섞은 여인이 잠시 방을 비운다고 저리 버림받은 아이의 공포가 서린 목소리로 묻다니.

투왈렛 룸에 가서 펠릭스를 닦아 줄 면 수건을 가져오려던 일레인은 또 가슴이 저미게 아프고 말았다.

“수건 가져올게, 펠릭스. 씻고 나서 옷 입고 함께 보러 갈 것이 있어.”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하자 펠릭스가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팔꿈치를 괴어 세웠던 상체를 도로 내렸다.

그러자 일레인의 눈에 너무 말라 툭툭 쇄골과 가슴뼈가 불거져 나오는 가슴팍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토록 야위다니.

그래서 일레인은 이따 하려던 다짐을 먼저 말해 주었다.

“펠릭스, 나는 이제 당신을 밀어내지 않을 거야.”

일레인은 오롯하게, 온 마음을 다해 펠릭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먼저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당신을 버릴 일은 이제 절대로 없어. 나와 이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이 말이 가져온 마법적인 효과라니.

짙게 음영 졌던 펠릭스의 굳은 얼굴이 단숨에 느슨하게 풀어졌다.

앙다물었던 입매가 부드럽게 풀리고, 불안에 흔들리던 젖은 눈동자는 차분하게 제 색깔을 되찾는다.

잠깐 외출했다 돌아왔을 때 일레인을 본 이든의 눈동자가 안도감에 진정되듯, 펠릭스의 눈동자도 그렇게 같은 색채로 따스하게 물든다.

아아, 내가 펠릭스, 당신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준 것인지.

치미는 슬픔과 흐느낌을 삼키며 일레인은 펠릭스의 야윈 몸을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

물에 적신 부드러운 옥양면이 야윈 뺨과, 툭 불거진 가슴뼈와, 선명한 윤곽의 갈빗대를 훑고 땀이 고인 홀쭉한 배를 훑었다.

뼈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말라도 펠릭스의 몸은 여전히 신이 빗은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일레인.”

조심스럽게 수건을 움직이는 일레인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안도감이 섞인 욕망이 다시 끓어오른다.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거칠어진 목소리로 일레인을 부르고 말았다.

마침 일레인의 손길은 뿌옇게 더럽혀져 있는 펠릭스의 중심을 향해 가고 있었다.

수건이 치골을 스쳐 아래로 향하자, 펠릭스가 일레인의 손을 붙잡았다.

“…일레인, 한 번만 더, 응.”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펠릭스는 다시 일레인을 파고들었다.

분노도 불안도 없이 오로지 달콤한 쾌락만 있는 정사였다. 리스본의 그날처럼. 날이 밝으면 아무 성당이나 들어가 혼배 성사를 받으려는 꿈만 가득하던 열정의 그 날의 밤처럼.

펠릭스는 일레인을 거세게 파고들었다.

일레인도 온 마음과 욕망을 다해 펠릭스를 끌어안았다.

아하. 의심과 원망이 사라진 곳에 자리한 건 오롯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더 두 사람의 영혼이 하나가 되는 강렬한 쾌락이었다.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을 듯 끝없이 일레인을 내리누르며 펠릭스는 거듭거듭 선언했다.

아아아. 일레인, 너는 이제 죽어도 내 품을 벗어날 수 없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달콤한 입맞춤과 사랑의 밀어와 격한 뒤엉킴으로 영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소진된 시간이 흐르고, 일레인은 지쳐 헐떡이는 펠릭스의 몸 아래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다 깬 이른 새벽.

펠릭스가 포박하듯 일레인의 몸을 칭칭 감은 채 혼곤히 잠들어 있었다.

‘깨우지 말까. 이렇게나 깊게 자는데.’

망설이던 일레인은 펠릭스의 손가락을 보았다.

잃어버릴까 두려운 듯 펠릭스는 일레인의 머리카락을 깊게 말아 쥐고 있었다.

또 버림받을까 봐 두려운 아이처럼.

그래서 일레인은 펠릭스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펠릭스, 펠릭스, 일어날 수 있어?”

일레인을 떠난 후 처음으로 깊게 잠이 들었던 펠릭스가 혼심을 힘을 다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 당신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나쁜 건, 아니지?”

달콤한 밤을 보내놓고 새벽에 해싱턴 공작과 이미 혼인한 몸이라는 말을 하던 리스본의 밤이 생각나 펠릭스가 후다닥 일어났다.

“나쁜 건 아니지? 나 또 버리려는 건 아니지, 일레인? 이번엔 안 돼. 날 버릴 거면 차라리 죽여!”

너무 격렬한 반응에 일레인은 펠릭스를 끌어안았다.

“아니야, 아니야, 펠릭스. 내가 더 이상 당신을 버릴 수 없는 증거를 보여 줄게. 당신이 나를 버리려고 해도 내가 당신 발목을 잡으며 애원할 수밖에 없는 증거를, 보여 줄게, 펠릭스.”

두 사람은 후다닥 옷을 입었다.

한 손으로는 펠릭스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작은 등을 든 일레인은 발소리를 죽여 별채 3층의 작업실로 향했다.

펠릭스는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고분고분 일레인의 뒤를 따라왔다.

다시는 자신을 먼저 버리지 않겠다는 일레인의 말에 오랫동안 쌓였던 불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풀어진 것인지 비척비척 흔들리는 발걸음이었다.

작업실에 들어선 일레인은 펠릭스를 소파 위에 앉히고, 밤 작업을 위해 곳곳에 놓아둔 등에 모두 불을 밝혔다.

대낮처럼 환해진 작업실에는 일레인이 그간 그린 그림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일레인은 펠릭스의 손을 잡고 일으켜 한 줄로 죽 전시되어 있는 그림 앞에 섰다.

“이건 이든이 처음 나와 눈을 마주친 날이야.”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진 그림 속엔 아주 어린데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기가 검푸른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이든은 태어난 날부터 또랑또랑 눈을 뜨고 있어서 신기하다고들 했어.”

일레인이 다정하게 속삭이며 펠릭스를 그림 앞으로 밀었다.

“…….”

펠릭스는 이 한밤중, 일레인이 다짜고짜 자신을 끌고 이슬 젖은 정원을 맨발로 걸어 여기 작업실까지 와 아기 그림을 보여 주는 이유를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면서, 뭐라고 표현하지 못할 감동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여기 좀 봐, 펠릭스. 이건 이든이 처음으로 내 손가락을 잡고 옹알이를 한 날이야.”

면실로 뜨개질한 모자를 앙증맞게 귀에 쓴 아기는, 눈동자처럼 검푸른 색 옷을 고귀한 신의 아이처럼 입고 입술을 반쯤 벌리며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 입술에서 ‘마아아마’ 하는 귀여운 속삭임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아서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그림 속 아기 손을 잡으려 했다.

“후흣.”

옆에서 일레인이 즐겁게 웃고는 세 번째 그림으로 향했다.

“이건 처음으로 몸을 뒤집으려고 애쓰던 날이야. 이날 이든은 하루 종일 얼굴이 벌개지도록 옆으로 힘을 주며 구르려 했어. 토하는데도 멈추질 않아서 걱정되어 말리려고 했더니, 엘렌이 펠릭스 당신도 그렇게 고집스럽게 하루 종일 용을 써서 그날 저녁때 뒤집었다고…….”

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펠릭스는 한동안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 귀여운 아이가 그랬다는 말의 의미는…….

“일레인!”

펠릭스는 빨개진 얼굴로 옆으로 몸을 구르기 위해 힘을 쓰고 있는 아가 그림에서 시선을 떼 일레인을 바라보았다.

일레인의 갈색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똑바로 마주해 오는 시선이 말해 오는 진실이 펠릭스를 덮쳐왔다.

설마. 설마, 정말로!

“일레인. 혹시……?”

“…그래, 맞아 펠릭스. 이든은 우리 아이야.”

우리 아이.

나와 일레인의 아이.

갑자기 지구 전체가 빙빙 도는 것만 같다.

“…미리 알리지 못해 미안해. 보여 주지 못해 미안해. 그래서 나는 그림으로나마…….”

“…….”

“펠릭스!”

일레인은 허물어지는 펠릭스의 몸을 받아 안았다. 너무 오랜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펠릭스가 밀려드는 수마와 뜻밖의 감동에 허물어지고 있었다.

“…나, 일단은 좀 자야겠어. 네 곁에서라면 오래 잘 수 있을 것 같아.”

일레인은 펠릭스를 일단 의자에 앉히고 다시 등을 다 껐다. 그리고 벌써 눈이 거의 감겨 있는 펠릭스를 도로 침실로 데리고 와 침대에 뉘였다.

펠릭스는 일레인을 빈틈없이 안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조차 꾸지 않는 깊은 숙면 속에서도 펠릭스는 일레인이 꾸물거리기라도 하면 더욱 세게, 팔과 다리로 옥죄었다.

너는 이제 나를 버리지 못해.

다시는 버림받지 않을 거야.

열망이 가득 담긴 단호한 몸짓이었다.

한참 동안 펠릭스의 얼굴을 살피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일레인은 몸을 흔드는 작은 손길에 눈을 떴다.

“엄마, 누구?”

어느새 일어나 방을 건너온 이든이 묻고 있었다.

“쉿! 아저씨 더 자야 해.”

일레인은 펠릭스의 손을 떼어 내고 일어나려 하였다. 그러나 펠릭스는 여전히 잠이 든 채로 일레인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이든은 펠릭스와 똑같이 생긴 눈동자를 굴리더니 씨익, 장난스레 웃었다.

“곰도이 이녕, 이 아저씨, 히잇, 나처럼 곰도이 이녕 이떠야 대. 엄마 업을 때 나처럼 곰도이 이녕.”

이든은 펠릭스가 한사코 일레인을 놓지 않으려 하는 걸, 혼자 잘 때 제가 안고 자는 곰돌이 인형이 필요한 것이라고 제 딴에 이해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펠릭스를 처음 보는데도 이든이 별로 놀란 기색이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리 와, 이든. 네가 엄마 대신 곰돌이 인형처럼 아저씨 품에 좀 안겨 있을래?”

그러자 이든이 일레인을 타고 넘어가 펠릭스 앞으로 꾸물꾸물 끼어들었다.

“옳지. 아저씨 오랫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아마 쉽게 일어나지 못할 거야. 엄마가 할머니랑 엘렌 고모님께…….”

습관적으로 엘렌을 ‘고모’라고 칭하던 일레인은 이제 이 명칭도 바로잡을 때라고 느꼈다.

“엘렌 할머니께 펠릭스 아저씨 왔다고 여쭙고 올게.”

“펠릭쯔? 날개 천사? 그, 천사?”

그럼 날개가 어디 있지?

이든은 펠릭스가 덥고 있는 이불을 들추고 꼬물꼬물 날개를 찾았다.

“날개 업쪄, 엄마. 날개가 업쪄.”

“쉿, 이든. 나중에 아저씨 깨면 날개가 어디 있냐고 물어 봐.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아저씨 코 자야 해.”

“응, 코 자.”

이든이 얌전하게 펠릭스의 팔 아래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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