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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에로스-104화 (104/112)

#제104화. 우는 사내

이든과 아서는 서로 꼬꼬마라고 부르며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내일 또 말을 타자. 이든, 너도 내년에는 아서 삼촌처럼 말 한 마리 가지게 될 거야. 그러니까 올해 삼촌이 타는 거 잘 봐 둬.”

그러자 아서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의젓한 표정으로 이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년에 잘 가르쳐 줄게, 이든.”

둘은 나란히 누워 눈을 감았다.

아빠 윌슨 백작을 빼다 박은 소백작 아서와, 펠릭스를 빼다 박은, 아직은 공작 작위를 물려받지 않고 그저 소공자라 불리는 이든 위에 창밖의 어둠이 길게 내렸다.

멀리서 여덟 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가 들렸다.

일레인은 아이들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침실을 나섰다.

‘곧 펠릭스가 온다.’

애써 눌러 두었던 심장의 박동이 쿵쿵 소리를 높이며 현기증이 났다.

무어라 변명해야 할까.

변명을 하면 믿어 주기는 할까.

이든이 사실은 자신의 아이란 걸 알게 되면 또 어떻게 나올까.

너무 많은 근심과, 또 억눌러 두었던 애정과 그리움이 몰아쳐 일레인은 잠시 벽에 등을 대고 숨을 골라야 했다.

그때였다.

“그리 싫은가, 일레인?”

어둠 속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울렸다.

벼락에라도 맞은 듯 몸이 움찔, 움츠러들었다.

‘아홉 시 반이 되려면 한 시간도 더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반가웠다.

너무 반가워서 마음은 펠릭스를 향해 줄달음치는데, 두려움은 혀와 발을 꽁꽁 묶어 무어라 답하질 못하게 했다.

그렇게 옴짝달싹 못하는 일레인에게 펠릭스는 성큼성큼,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더욱 거리낌 없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일레인의 잠옷 사이로 손부터 집어넣었다.

벌을 주듯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더 자극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스물다섯. 한창 피어나는 젊음은 속살을 훑는 단 한 번의 손길에 벌써 흥분을 피워 냈다.

그게 부끄러워 일레인은 부러 쌀쌀맞게 펠릭스를 밀어냈다.

“몬토바 공국의 공녀와 혼인해야 할 당신이 여기서 무얼 하는 거지?”

뒤에서 일레인을 껴안은 채 쇄골을 핥아 내려가던 펠릭스의 몸이, 노여움에 굳어 들었다.

‘공녀와 혼인이라니. 아직도 너는 나를 받아들일 마음이 조금도 없구나, 일레인.’

입으로는 계속 원망과 복수의 말을 내뱉었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이제는 일레인이 결혼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는 것을.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부디 용서해 달라고. 3년 전, 둘이서 손잡고 교회에 찾아가 결혼식을 올리자 했던 약속을 이제는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그런데 일레인은 지금도 여전히 펠릭스, 그와 함께하는 삶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오후부터 차곡차곡 쌓였던 설움이 분노가 되어, 펠릭스는 일레인을 거칠게 안아 올렸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침실로 향했다.

펠릭스는 사실 오후에 벌써 포구에 도착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세오드 성으로 가고 싶었지만, 일레인을 만나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서 천천히 목초지를 걷던 중, 멀리서 일레인 일행을 보았다.

어른의 허리께나 올 듯 작은 조랑말을 타고 잔뜩 굳은 자세로 타박타박 구보하는 꼬마와, 그보다 한 뼘은 더 작은 꼬마를 앞에 태우고 조랑말 꼬마를 주의 깊게 살피는 일레인과, 그리고 혹여 사고가 날까 긴장을 늦추지 않고 뒤를 따르는 마부로 이루어진 일행이었다.

그대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해도 되련만,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후다닥 근처의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일행이 가까워졌다.

고삐를 쥔 일레인의 양팔에 폭 쌓인 꼬마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서가 타는 거, 나도, 나도! 엄마, 막씸 나도! 힝, 나도. 나 애기 아냐!”

등자에 발도 안 닿을 땅꼬마 주제에 패기 좀 보소.

피식 입꼬리를 올리던 펠릭스는 갑자기 가슴에 격통을 느꼈다.

‘일레인이 나와 혼인했다면, 저 하인 대신 내가 조랑말 고삐를 잡고 저 귀엽게 칭얼거리는 꼬마에게 승마를 가르쳐 주고 있겠지.’

일레인은 나 없이도 저렇게 가족과 함께 단단히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었구나.

한때 네가 나의 뿌리가 되어 주길, 나의 둥지가 되어 주길 간절히 바랐건만.

넌 나를 밀쳐내고 너 혼자 이리도 굳건한 가정을 꾸렸구나.

배반당한 꿈이 너무 아팠다.

부평초처럼 이 나라 저 나라, 이 대륙 저 대륙 떠돌며 살아온 삶이 서러워져, 펠릭스는 일레인 일행이 다시 세오드 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멍하니 나무에 기대 앉아 있었다.

시골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어둠이 짙어지고 성의 창문에 그리움처럼 하나둘씩 불이 켜지자 펠릭스는 더 이상 쓰라린 마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약속한 시간이 한 시간 반이나 남았는데도 성으로 들어갔다.

쾅쾅 거칠게 문을 두드리자 뷰컴 씨가 나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

이슬을 흠뻑 맞은 펠릭스의 모습에, 늙은 집사는 말없이 마른 수건을 내밀었다. 그리고 따스한 스프와 차를 내주었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뷰컴이 일러 준 대로 일레인의 거처로 향했다.

3층 복도에 올라서자, 저 안쪽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에서 깔깔거리는 사내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홀리기라도 한 듯 펠릭스는 방문 앞에 서서 안에서 새어 나오는 대화를 들었다.

서로 투덕거리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를 달래는 일레인의 부드러운 목소리. 모두 다 내 것이었어야 할, 나도 속해 있어야 할 이 모든 소리가 사무치도록 서러웠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일레인은 여전히 자신을 밀어내기만 한다.

다시는 밀어낼 수 없도록, 제발 도와달라고 애원하도록 가혹할 정도로 파산의 압박을 가했는데도 여전히 도도하게 거리를 두다니!

용서해 달라 말만 하면 모든 걸 그녀의 뜻대로 이뤄 주려고 했는데!

내가 사생아라서!

서운함은 분노가 되고, 원망이 되어 펠릭스를 거칠게 몰아갔다.

그래서 펠릭스는 대화로 그간의 서운함을 풀려던 원래의 계획을 버리고 막무가내로 일레인의 잠옷을 벗기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손끝에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날, 일레인이 자신을 안던 밤에 입고 있었던 잠옷 레이스의 이니셜이었다.

F.P.

열정적으로 안아놓고 차갑게 차버린 자의 이니셜을 수놓은 잠옷을 여전히 입고 있다니.

조롱일까, 사과일까. 아니면 너무 가난해져서 잠옷 하나도 새로 장만하지 못한 것일까.

무엇이든 괜찮다. 일레인이 내 품 안에 실재하고 있으니. 이제 다시는 벗어나지 못할 터이니.

펠릭스는 잠옷을 끌어 내렸다.

“불, 촛불을 꺼 줘, 펠릭스.”

일레인이 애원했다.

그러나 펠릭스는 일레인의 청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촛불 아래 선명하게 보이는 일레인의 하얀 나신이 까무룩 겨우 찾아온 짧은 잠에서 깨어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허망한 것이 아님을 눈에 새겨 넣어야 했다.

펠릭스는 거칠게 일레인을 파고들었다.

“아흐흐흣.”

일레인이 달뜬 목소리로 신음을 흘리며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 순간 펠릭스는 선명하게 깨달았다.

‘일레인을 놓치면 평생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할 거야.’

불면의 밤마다 기억 속에서 과장되었을 뿐이라고 애써 부정했던 강렬한 쾌락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과장도 아니었다. 리스본의 밤이 바로 어제였던 것처럼, 오늘의 밤도 여전히 너무 생생하게 좋았다.

희미한 촛불 아래 쾌락에 붉어진 얼굴로 눈을 흐린 일레인은 밀면 미는 대로 밀리면서도 다음 순간 빈틈없이 펠릭스의 몸을 붙잡았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온 몸에 느껴지는 쾌락의 강도가 너무 심해서 머리가 어찔어찔 열에 들떴다.

그래서 펠릭스는 부러 거친 말로 일레인을 자극하며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고자 애썼다.

“손 내려, 일레인. 어둠 속에서 네가 마구 베어 먹고 버렸던 내 몸을, 너도 이제는 제대로 봐야지. 그게 예의 아니겠어, 일레인?”

그렇게 내 몸을, 너에 대한 갈망으로 수척해져 버린 내 몸을 네 망막에 선명하게 새기게 되면.

내가 없는 밤이면 너 또한 불면의 벌을 받게 될 거야. 뜨겁게 몰아붙이던 내 몸이 주던 쾌락이 그리워 잠이 오질 않게 될 거야.

그래서 잠 없는 밤의 고통이 커지고 커지면, 너는 감히 나를 버리고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하겠지.

몸의 언어처럼 정직한 것이 또 있을까.

말은 거칠고 모욕적이기까지 하였지만, 일레인을 파고든 펠릭스의 몸짓은 점차 애틋한 쾌락으로 변해 갔다.

가빠지는 숨이 서로를 덥혔다.

서로를 쓰다듬어 안는 손길은 은밀하고 애틋하였다.

펠릭스의 움직임이 가져오는 쾌락에 정신없이 휩쓸려가던 일레인은 빈틈없이 몸을 겹치는 펠릭스이 등을 쓰다듬다, 후흡, 숨을 멈췄다.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견갑골의 지나치게 선명한 감촉.

그러고 보니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등의 척추뼈도 앙상하게 손에 잡힌다.

옆구리의 갈비뼈도 너무 선명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었는데.

리스본에서 밤새 쓰다듬었던 펠릭스의 몸은 오랜 항해에 오히려 단단한 근육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3년 만에 안는 펠릭스의 몸은 애처로울 정도로 야위어 뼈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촉지될 정도였다.

일레인은 자꾸 쾌락으로 흐려지는 눈의 초점을 애써 모아 펠릭스의 얼굴을 살폈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 속의 눈동자는 욕망과 쾌락으로 나른하게 흐려져 있는데, 얼굴엔 광대뼈가 툭 불거지고 뺨이 홀쭉하니 오래 앓은 사람처럼 깊게 패여 있었다.

세상에.

나의 펠릭스가.

눈이 부셔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게 아름다움을 뽐내던 나의 에로스가.

일레인의 눈빛에 어린 애통함을 본 펠릭스가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너 때문이야.”

거칠거칠한 목소리가 일레인의 심장을 긁어 내렸다.

“네가 나를 버렸기 때문에, 나는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어.”

펠릭스의 허기진 눈, 마른 몸, 절망스럽기까지 한 목소리가 그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처럼 맞닿아 있는 그의 몸도 떨려 왔다.

오랜 시간 꾸욱 꾹 눌러 담아 왔던 감정이, 일레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흘러넘칠 것만 같았던 펠릭스는 벌을 주듯 이전보다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일레인의 머릿속에는 3년 만에야 마주한 펠릭스의 얼굴이 가득 찼다.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고 비탄에 잠겨 끝내 죽어 버린 오르페우스처럼, 펠릭스도 나를 잃은 슬픔과 절망에 이토록 수척해졌단 말인가.

“하아, 펠릭스. 펠릭스.”

마음이 너무 아파 일레인은 저도 모르게 펠릭스의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그리고 두 팔과 두 다리로 온 힘을 다해 펠릭스를 끌어안으며 위로를 전했다.

그 순간, 일레인의 온몸이 펠릭스를 단단히 감아온 순간.

절정에 오른 펠릭스가 후드득 몸을 떨며 신음 같은 울음을 터트렸다.

펠릭스는 일레인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흐득흐득 흐느꼈다. 그의 떨림이, 아픔이 피부를 통해 전해져 왔다.

우는 남자라니.

이렇게 형편없이 수척해진 몸으로 나타나, 겨우 맞이한 쾌락의 끝에서 우는 남자라니.

내가 이 남자에게 이토록 커다란 상처를 주었구나.

그러자 이제 펠릭스가 자신을 더 이상 원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펠릭스는 말하지 않았지만 일레인은 느낄 수 있었다.

펠릭스는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

일레인은 용기를 냈다. 지금 용기를 내지 않으면, 펠릭스의 상처는 헤집어진 채 영영 아물지 못할 것이다.

그가 벌겋게 내보이는 진심을 모른 척할 생각 따위는, 일레인에게는 없었다. 외면해서도 안 된다.

상처를 주었다면 치유하는 것도 제 몫이 되어야 했다. 그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자신 또한 제 사랑을 내보여야 했다.

그의 사랑이 초라해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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