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103화 (103/112)

#제103화. 나를 닮은 아이

게인즈 씨와 골든우즈 사무실에서 나온 후 일레인은 일단 샬럿에게 빌린 돈으로 첫 번째 분기의 회사채 이자를 지불하기로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분기의 운영 자금은 펠릭스가 온 후 대처하기로 했다.

파산을 하든, 아니면 지분을 모두 넘기고 영지라도 구하든.

“펠릭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어찌 막겠니? 네가 직접 만났을 때 부탁을 하거라.”

게인즈 씨의 조언이었다.

게인즈 씨의 배웅을 받고 세오드 성으로 돌아오는 길. 올 때와 달리 마음은 수런수런, 기쁨과 두려움 사이를 정처 없이 오갔다.

이든.

펠릭스가 와서 이든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내게는 정말 구원의 보물인 이든을, 펠릭스도 기뻐할까.

쭈글쭈글 빨갛게 태어난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뽀얗게 되고, 처음으로 눈을 맞추고 웃어 보이던 날, 일레인은 넘치는 사랑에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행복했었다.

그 작은 손가락으로 일레인의 손가락을 쥐고 빨려 들 때마다, 한사코 가슴을 파고들며 사랑을 요구할 때마다.

아이가 온몸으로 일레인을 갈구할 때마다 사랑이 퐁퐁 온몸을 채우고 우주를 채울 듯 샘솟아서, 압도적 사랑 앞에 넘치도록 충만해지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머나먼 이역의 땅에서 배신감에 떨 펠릭스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쓰리게 아팠다.

‘나는 우리 아이로 인해 이토록 행복한데 당신 홀로 외롭고 쓸쓸하다면, 펠릭스 당신에게서 나는 무엇을 빼앗아 간 걸까.’

그렇게 미안해지고 그리워질 때마다 일레인은 이든의 그림을 그렸다.

지금은 보여 주지 못하지만, 언젠가 펠릭스에게 전할 날이 오길 기다리면서.

미안하고 아픈 마음을 담아 펠릭스에게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쓰듯 이든을 그렸다.

그리고 마침내 펠릭스가 온다.

마차 밖으로 펼쳐진 새봄의 초원을 보며 일레인은 두 달 후 올 펠릭스를 떠올렸다.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안나가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펠릭스가 와서 이든을 어떻게 생각할지, 또 이든을 숨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서. 사생아라고 모질게 내쳐 놓고, 실은 이든을 사생아 비슷하게 키우고 있던 거잖아. 몹쓸 여자라고 나를 원망할 것 같아 두려워.”

일레인의 말에 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펠릭스 님 입장에서는 마님이 원망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치만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잖아요. 그때 마님은 그러실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가문과 아서 도련님, 이든 도련님까지 모두 잘 지켜 훌륭히 키우고 계신걸요.”

평생 보아온 안나가 그렇게 말해 주니 마음이 좀 평안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안나가 편지의 내용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각진 타이핑 글씨마다 배어 있던 그 원망과 분노를 안나가 몰라서 저리 말하는 것이지.

기분이 다시 꺼질 듯 가라앉았다.

하지만 펠릭스를 다시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를 보지 못 한 지가 벌써 3년이다. 마음 한구석은 늘 그를 향한 그리움에 짓물러 가고 있었다.

펠릭스가 아무리 원망한다 해도, 그래서 험하게 나온다고 해도 그의 얼굴을 다시 눈에 담고, 그의 목소리를 다시 귀에 담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아무래도 좋다.

세오드 성으로 돌아온 일레인은 저녁 만찬 자리에서 5월 중순 경 펠릭스가 여길 방문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정확한 날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밤에 찾아오겠다는 말과, 속옷은 입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으흑, 펠릭스가?”

엘렌이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트렸다.

4년이 가까워지도록 단 한 차례도 연락을 주지 않던 아들이 온다니. 원망스럽던 마음 대신 기쁨이 벅차 눈물부터 쏟아졌다.

간신히 감정을 가라앉힌 엘렌은 일레인 옆에서 오물오물 양고기 구이를 야무지게 씹고 있는 손주 이든을 바라보았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크고 있는 이든은 먹기에 입에 음식을 넣는 데 열중해 있느라 엘렌이 우는 줄도 몰랐다.

세 살 때의 펠릭스를 빼다 박은 모습의 손주가 오물오물 야무지게 양고기를 씹고 있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뭉클하면서 손주를 향한 애정이 주체할 수 없이 솟아올랐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든을 보며 말하고 말았다.

“어쩜, 이든 너는 진짜 펠릭스 판박이다, 판박이!”

그러자 세 살이 되려면 넉 달이 남은 이든이 펠릭스를 닮아 검푸르게 짙은 눈동자를 크게 뜨며 물었다.

“펠릭스? 누구?”

“……!”

“…….”

“…….”

당황한 어른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간 크라몬드 가에서 펠릭스는 일종의 금기어였다.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긴 너무 복잡한 존재였던 까닭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서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나, 알아! 펠릭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서는 꼬꼬마 이든이 모르는 걸 제가 알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운지 볼을 마음껏 부풀렸다.

“왜 샬럿 할머니 집에 날개 달린 천사 그림! 그 천사가 펠릭스랬어! 맞지, 일레인 누나?”

“…응.”

“앗, 날개, 날개! 와 날개 천사! 와 난다, 날아! 아서, 우리도 날아!”

“아이, 바보. 그건 그냥 가짜야! 사람한텐 날개가 없어!”

“우리 엄마는 가짜 안 그려!”

“아니, 날개 달린 새 인간인 척 그린 거라니까.”

“새, 와, 날개 달린 천사.”

다행히 아서와 이든은 날개에 관심을 돌리고 진짜로 날개가 있을 수 있니 없니 말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

“…….”

일레인과 엘렌, 바이올렛은 서로 눈을 맞추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후 두 달 남짓 세오드 성은 보이지 않게 흥분해 있었다.

엘렌은 아들이 와서 기쁘고, 바이올렛은 일레인이 아직도 잊지 못하고 마음에 담고 있는 펠릭스와 이번 기회에 잘 되었으면 내심 바랐다.

일레인은 펠리스를 다시 볼 수 있는 기쁨과, 그가 여전히 자신을 원망할까 두려움 사이에서 마음이 춤을 추웠다.

다행인 건 두 꼬마가 일레인의 혼을 쏙 빼놓아 너무 절망적인 생각에 빠질 겨를조차 없게 만든 거였다.

천사처럼 날개 달린 펠릭스가 온다는 거에 꽂힌 두 꼬꼬마는 안나를 닦달해 잠자리 날개 같은 흰색 비단 천을 얻어 냈다.

그리고 어깨에 천을 날개처럼 두르고 여기저기서, 시도 때도 없이 나는 시늉을 해서 어른들을 식겁하게 만들었다.

“나는 펠릭스 천사야아!”

이든이 이렇게 외칠 때마다 일레인은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뭔가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인가 의아하기도 했다.

그리고 엘렌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아아 피는 못 속이지, 암.’하면서 펠릭스가 유럽에 돌아왔으니 자신과 연결되게 도와달라고 청하며 계속 보내오는 몬토바 산샤 공녀의 편지를 찢어 버렸다.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 드디어 펠릭스가 오기로 한 5월 15일이 되었다.

일레인은 해가 뜨기도 전에 깨, 늘 하던 대로 그림을 그리는 일상의 루틴 대인 일레인은 이든의 그림을 차례대로 정리했다.

손끝이 형편없이 떨려 자꾸 그림을 놓쳤다.

그이는, 펠릭스는 이든을 그린 이 그림들을 보면 무어라 할까.

자신이 놓친 세월 속 아들의 모습에 기뻐할까. 아니면 아들의 귀한 순간들을 놓치게 한 나를 원망할까.

그래서 분노해서 떠나 버리면 어떻게 하지.

그를 다시 한번 보내고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만 같은데.

마음은 떨며 희망과 절망과 설렘과 비통 사이를 정신없이 서성이는데, 손가락 끝은 마침내 제 정신을 차려 그림을 능숙하게 정리했다.

생후 3일, 처음 눈을 맞췄을 때 이든.

손가락을 빨면서 다리를 버둥거리는 이든.

햇살에 춤추듯 움직이는 먼지 입자를 향해 집중한 얼굴로 손을 뻗는 이든.

생후 서른다섯 달이 흐를 때까지 펠릭스가 보지 못한 이든의 지난 시간이 차곡차곡 캔버스 천에 그려져 있었다.

이든의 그림을 시기별로 정리해 놓은 후 일레인은 낮 동안 아이들과 함께 말을 탔다.

아서는 얼마 전 털이 부슬부슬한 조랑말을 선물 받아 타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나도 꼬마 말. 힝. 나도, 응?”

아직 어려 혼자 말을 탈 수 없는 이든은 아서가 부러워 자기도 조랑말 타고 싶다고 온종일 칭얼거렸다.

굼벵이처럼 꾸물거리던 시간도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그이가 온다.

해가 서쪽으로 붉게 지고, 어둠이 짙어질수록 일레인은 손발을 떨며 더욱 초조해졌다.

이제 결혼해서 하녀 거처가 아닌, 손님용 별채 1층에 따로 신혼살림을 마련한 안나가 은밀하게 눈짓했다.

“꽃향기를 푼 목욕물 준비했어요, 마님. 일단 씻으시며 마음을 가라앉히시지요.”

문을 열어 주어야 하기에 뷰컴과 안나만은 펠릭스의 방문을 알고 있었다.

안나는 온 정성을 다해 일레인을 치장해 주었다. 그때처럼, 리스본에서 펠릭스를 맞이하던 날처럼.

다리가 불편한 엘렌과 예민한 바이올렛은 세오드 성 가장 안쪽의 별채에 머물렀다. 그리고 일레인은 아서와 이든과 함께 본성 3층에 머물렀다. 예전에 일레인과 다이앤이 머물던 방이었다.

이날따라 아서와 이든은 쉽게 잠이 들려 하지 않았다.

“누나, 아까 막심은 왜 나를 걷어차려 한 거야?”

막심은 아서가 타는 조랑말 이름이었다. 순한 말이었지만 아서가 다짜고짜 너무 심하게 고삐를 당기자 화를 내면서 걷어차려고 하였다.

“달리다가 속도를 천천히 줄여야지. 무턱대고 고삐를 당기면 안 되는 거야.”

일레인의 대답에 이번엔 이든이 울먹거렸다.

“힝, 엄마. 나도 막씸, 막씸! 막씸 사 줘!”

“바보, 막심은 내 말이고 너는 다른 말을 사야지.”

“아냐, 아냐, 나도 꼬마 막씸, 엄마, 꼬마 막씸 줘요.”

그러자 아서가 배를 쑥 내밀며 잘난 체를 했다.

“안 돼, 이든. 키가 작아서 안 된다고, 꼬꼬마야.”

겨우 두 살 차이로 아서가 하는 건 뭐든 다 따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든은 귀엽게 입을 삐쭉거렸다.

“흥, 너도 꼬꼬마 아기! 요만큼 요만큼빠께 안 크면서, 꼬꼬마야!”

이든이 귀여운 제 손가락을 쑥 내밀며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펠릭스를 닮아 검게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팔랑팔랑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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