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차라리 몽땅 망해 버려요
보스턴을 떠날 때는 곧바로 브리티나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끝이 없이 펼쳐진 바다에서 한 달 넘게 보내다 보니, 펠릭스는 문득 무턱대고 돌아갈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남동생을 백작으로 만들기 위해 나를 버렸는데, 아들 앞길에 누가 될까 봐 끝내 내게 사과하지 않으면! 끝내 나를 외면하면!’
그래서 펠릭스는 이번에는 일레인이 자신을 절대로 거부할 수 없도록 먼저 정교한 덫을 놓기로 결정했다.
‘크라몬드 가문과 해싱턴 가문을 완전한 파산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면 아들과 남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나에게 사죄하며 애원하겠지.’
내가 괴로웠던 만큼 너도 간절하게 나의 존재를 갈망하길.
펠릭스는 당분간 리스본에 머물면서 일레인을 완전한 파산으로 몰아넣을 여러 방안을 시행하기로 했다.
거처로 고른 곳은 바로 일레인과 첫날밤을 보냈던 그 작은 빌라였다.
“아무래도 그때 총에 맞은 게 등짝이 아니라 머리통인 게야. 아니, 저를 버린 여자와 하룻밤 머물렀던 이 초라한 빌라를 시가의 두 배나 주고 사들이다니.”
알베르토가 이죽거렸다.
그러나 펠릭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일레인과 함께 뜨거운 밤을 보냈던 이 침대 위에 일레인을 다시 눕히기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었다.
펠릭스가 리스본에서 맨 처음 한 일은 연락 한 통 없는 괘씸한 일레인에게 먼저 서신을 보내는 일이었다.
석 달 후 5월 15일에 세오드 성에서 만남을 가지자는 통보였다. 그때까지 크라몬드 가문이 절대 갚을 수 없는 금액인 30만 파운드짜리 회사채 상환을 요구할 것이란 위협도 함께 적어 보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빚에 쪼들린 일레인이 자신 앞에 납작 엎드려 애원하게 만들기 위한 덫이었다.
펠릭스는 리스본에서 화려한 밤 생활을 미친 듯이 즐기고 있는 알베르토를 불러 물었다.
“알베르토, 너 아직 연락되는 용병들 있지?”
“왜? 가서 그 대단한 공작 부인을 납치라도 해 오게?”
“돈이 얼마 들어도 좋으니까, 동방에서 오는 크라몬드 상사의 무역선을 모조리 다 나포해. 해적으로 가장해서.”
“하!”
알베르토는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 일레인의 가문만 망하겠냐? 크라몬드 상사에 네 지분이 80퍼센트야, 80퍼센트. 너도 망한다고!”
“상관없어. 해적질 해 온 상선 물건들 내가 다 여기서 처분해 현금화할 거니까.”
그러니까 겉으로는 해적질을 당했다고 하고, 뒷구멍으로 그 물건을 팔아 손실을 메꾸겠다는 기막힌 전략이었다.
“와, 여자에 미치면 약도 없구나, 약도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알베르토가 음흉하게 씩 웃었다.
“10퍼센트 우리 몫. 딜?”
“딜!”
그리하여 당장 열흘 뒤부터 아시아에서 향신료와 도자기, 비단 등 호화로운 무역품을 싣고 오던 크라몬드 상사의 배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적에게 줄줄이 나포되기 시작했다.
* * *
“이제 정말 한계다, 일레인.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
3월이 끝나 갈 무렵, 세오드 성으로 찾아온 게인즈 씨가 창백한 얼굴로 선언했다.
“상선이 줄줄이 나포되자 주식은 곤두박질쳤지, 만기된 회사채는 연장을 거부하지…….”
상선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동방 무역선 한 척 띄우는 데 어마어마한 자금이 든다.
적게는 50여 명에서 많게는 200여 명에 이르는 선장과 항해사, 선원 등을 고용해야 하지, 싣고 갈 무역품을 사들여야 하지, 오가는 데 필요한 식량도 넉넉히 구비해야 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집 한 채 가격인 도자기나 비단 등의 동방의 물품을 사 올 자금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무역 회사는 보통 출항에 앞서 회사채를 발행해 투자금을 모아 무역 대금을 확보한다. 그리고 그 상선이 1년을 훌쩍 넘겨 무사히 돌아와야만 가지고 온 무역품을 팔아 회사채를 상환하고, 빌린 자금을 갚게 된다.
그런데 최근 한 달 새, 귀환하던 상선 다섯 척이 연거푸 북부 아프리카 연안에서 나포되었다.
그러자 크라몬드 상사의 주식은 날로 곤두박질쳤고, 돈을 빌려주었던 채권자들은 만기를 연장해 주지 않으려 했다.
펠릭스를 대신하는 헨리 아셔 측은 회사채를 도로 인수하거나, 이자를 지불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크라몬드 상사 지분을 20퍼센트 가지고 있는 크라몬드 백작가였다. 회사채 기한 연장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지불해 줄 돈도, 또 아직 기한이 남은 회사채의 이자를 지불할 돈도 거의 없었다.
일레인이 그려 파는 그림 대금으로는 겨우겨우 회사채 이자, 그리고 가족 생활비와 고용인들 월급 주는 것만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일레인은 존 게인즈 씨와 함께 루덴에 올라와 고모 샬럿을 만났다.
“일레인, 당장 빌려줄 수 있는 금액은 이 정도야. 일단 이걸로 이번 분기 이자라도 해결하거라.”
고맙게도 샬럿 고모가 10만 파운드나 되는 거금을 융통해 주었다. 하지만, 그건 고작 한 분기 이자에 불과했다. 다음 분기가 되면 원금과 이자까지 합쳐 55만 파운드가 필요했다.
게다가 펠릭스가 차명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30만 파운드의 회사채까지. 도저히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래, 아서가 크려면 한참 남았으니 상사는 포기하자. 대신 세오드 성 일대의 영지만은 보존해야 해.’
영지가 없는 귀족 작위는 우스꽝스러운 놀림거리나 된다. 아서에겐 세오드 성 일대의 영지가, 이든에겐 에딘 항 근처의 해싱턴 공작가 영지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일레인은 헨리 아셔 씨를 만나기 위해 루덴의 중심가 사무실에 갔다. 크라몬드 가문이 가진 상사의 지분을 모두 넘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분을 확대하던 헨리 씨가 뜻밖에도 거절을 했다.
“음, 펠릭스 님은 더 이상 지분을 늘릴 생각이 없다우, 해싱턴 공작 부인. 우리 측은 지분 인수 의사가 없으니 부인께서 알아서 넘길 사람을 찾으시구랴.”
일레인은 낙담했다.
종잇조각에 가깝게 된 크라몬드 상사의 주식을 누가 인수하려 들겠는가. 이대로면 파산을 하고도 빚이 여전히 커, 세오드 성이 있는 영지마저 다 처분해야 할지도 모른다.
영지가 없는 백작 작위가 무슨 소용이랴.
펠릭스를 잃으면서까지 겨우 지킨 백작 작위인데.
온몸에서 힘이 나갔다. 귀에 웅웅, 이명까지 일었다.
본래 일레인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는 헨리 아셔는 절망에 빠진 일레인이 무척 안타까웠다.
2주 전, 리스본에서 펠릭스를 만난 일도 떠올랐다.
헨리 아셔가 일레인의 풍경화를 사들여 펠릭스에게 보낸 건, 펠릭스가 매일 불면으로 무섭게 야위고 있다는 알베르토의 서신을 받은 후였다.
서신의 내용은 일레인을 잊기 위해 죽어라 일을 해서 사업은 번창하는데, 정작 펠릭스는 저러다 곧 죽지 않을까 걱정이란 내용이었다.
헨리 야서는 루덴 시내에서 일레인이 안고 있는 이든을 본 적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긴가민가 싶었지만 두 번째 보았을 땐 확신이 들었다.
‘저 꼬마는 펠릭스의 애다.’
검푸른 눈동자는 해싱턴 공작도 가지고 있고 펠릭스도 가지고 있어서 그것만으로 이든이 펠릭스 아들이라고 결론짓기는 무리였다.
그런데 저 턱선, 벌써부터 강인한 성정을 나타내는 각진 턱선은 펠릭스만의 것이었다. 해싱턴 공작은 선이 호리호리한 여성적인 미남자였기 때문이다.
‘제 새끼는 알아보겠지.’
그래서 그 아이의 옆모습이 살짝 드러난 그림을 사서 보낸 거였다.
아이의 앞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사고 싶었지만, 그토록 천사처럼 어여쁜 아이의 정면 모습을 일레인은 절대 그려 팔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그 그림을 보자마자 펠릭스가 돌아왔다. 또 돌아오자마자 일레인의 아이 그림을 닥치는 대로 사서 리스본의 초라한 빌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니, 해싱턴 공작 부인의 그림이 나오면 여기 리스본의 화상이 얼마든 막 사들인다더니 그게 자네였는가?”
헨리가 묻자 펠릭스의 눈이 죽 늘어놓은 그림을 훑었다.
그 눈 안에는 감출 수 없는 애정과 집착이 넘실거렸다.
그러고 보니 바닷가의 습기에서 유화의 변색이나 변질을 막기 위해서인지 봄이 벌써 왔는데도 작은 화로에 불이 피워져 있었다.
“하! 대체 무슨 생각인 게야?”
헨리가 짐짓 혀를 끌끌 차며 다시 묻자 펠릭스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 그림이 훌륭하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 손에 들어가 자꾸 세간의 눈에 띄면 그림값이 점점 더 높아져서 일레인이 제게 굽히질 않을 것 같아 제가 미리 손 써 수거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괴변이야. 자네 대리인이 미친 듯이 사들여서 요새 일레인이 그렸다 하면 천정부지로 가격이 오르는데.
“하이고, 퍽이나. 자네가 늘 입이 닳도록 말한 그 희소성의 원칙에 따르자면…….”
말을 하다 말고 헨리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마이더스의 손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냉철한 투자자이자 사업가인 펠릭스는 일레인 크라몬드, 아니 이제는 일레인 해싱턴 공작 부인에 관계된 일에는 늘 저렇게 이성을 잃고 막무가내니.
제가 품은 집착이 결국 저도 어쩌지 못하는 사랑임을 얼른 깨달아서 둘이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은 게 늙은이의 소망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헨리는 아버지 같은 애정으로 일레인에게 충고했다.
“차라리 그냥 빨리 망해 버려요, 일레인. 그게 나을 거유. 펠릭스 님이 바라는 게 그거니까.”
“…그럼?”
일레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선을 나포하는 것도 펠릭스가 벌이는 일인가요?”
“배신감에 미쳐서 날뛰는 거라우. 그럴 땐 그냥 날뛰게 놔두고, 일레인. 납작 엎드려요. 미안하다고 말하고, 납작 엎드려 이제 우리 행복하자, 왜 말을 못 해?”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끝날 일일까요?
불안하면서도 마음이 쿵쿵 기쁨에 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일레인은 엘렌에게 몬토바의 공녀가 계속 연락을 해 온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기, 그 몬토바의 공녀가 아직도 혼인을 안 하고 펠릭스를 기다린다던데.”
헨리 씨가 입을 비틀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마트비아 대공의 욕심과 몬토바 공녀의 사심이 결합된 결과지요.”
그 정도로만 이야기했다.
사람 일이 어찌 될지 어찌 알겠는가.
저 불운한 연인은 너무 오랫동안 서로 엇갈려만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