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질투의 귀환
3년 전, 일레인이 해싱턴 공작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안 순간 펠릭스는 미련을 버렸다.
‘해싱턴 공작의 아이를 가졌다면, 일레인이 내게 올 일은 없다.’
자신이 지키고자 마음먹은 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내는 여인이니까.
그래서 펠릭스는 암살자 무리에서 일레인을 구해 낸 직후, 쓰라린 배신감을 품고 아메리카로 떠났었다. 헨리 아셔에게 크라몬드 상사의 지분을 최대한 확보하고 해싱턴 공작의 파산을 집요하게 추구하란 지침을 남기고서였다.
유럽의 각 나라에서 아메리카에 온 이민자들은 대개 가난을 피해, 아니면 신앙의 자유를 위해 본국에서의 삶을 버리고 온 자들이었다. 그래서 사회 전체가 강인한 생활력과 도전 의식으로 가득 찬 역동적인 분위기였다.
펠릭스는 이미 철광석과 석탄 광산을 소유한 거부에, 유럽에서의 투자 귀재인 점도 알려져 재산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렇지만 새 땅에 완전하게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기는 이미 성공한 재력을 가진 스물셋의 청년에게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보스턴에 정식으로 골든우즈 투자회사를 내고, 먼저 정착한 이들과 합작으로 걸음마 단계인 주식과 채권 시장을 키워 가는 일이 시급했다.
펠릭스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에 매진했다.
기존의 투자 일에다 산업의 판도를 바꿀 것이 분명한 증기 기관 연료를 개발하는 신기술 회사를 세우고, 무역 회사도 하나 더 세웠다.
그런데 아무리 몸을 혹사시키며 밤낮으로 일을 해도, 심지어 새로 건조한 배의 선적량을 확인한다고 일용직 인부들과 함께 몸소 20kg짜리 석탄 자루를 차곡차곡 쌓는 중노동을 하고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는데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하게 깨어났다.
“일레인,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이 하염없이 일레인에 대한 원망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버릴 거면, 이미 해싱턴 그 파렴치한과 혼인을 한 상태였으면, 그냥 사실을 말할 일이지 왜 구태여 밤은 보낸 거야? 그렇게 내 몸이 좋았나?”
그렇게 막 있지도 않은 일레인을 향해 화를 내다가.
“아니, 그런데 사실 일레인, 나쁘지 않았어. 네가 시미치 뚝 떼고 그렇게 애틋하게 내 머리를 감겨 주고, 몸을 씻어 준 모든 행위가…….”
사실은 굉장히 좋았어.
서툴면서도 열정적으로 반응해오던 네 몸이 너무 좋았어서 잊혀지지가 않아, 제길.
대체 무슨 저주를 건 거야.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렇게 뜨겁게 유혹하고 차갑게 버린 거냐고.
그렇게 또 훌쩍거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날도 있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는 동안 유럽 대륙에 돌았던 소문이 여기 신대륙의 상류층에도 건너왔다. 펠릭스가 마트비아 대공의 사생아이고, 브리티나 백작가 아가씨와 혼인 직전까지 갔다가 버림받은 꽤 잘난 신분의 사내라는 소문이었다.
그러자 본국에서 꽤 신분이 높았던 귀족 집안에서 펠릭스에게 혼인 적령기의 딸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펠릭스 눈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괴로운 불면의 밤도 지속되었다.
괴로움을 참다 못한 펠릭스는 특단의 조치로 브리티나와 관련된 일을 모두 헨리 아셔에게 넘겨 버렸다. 알아서 크라몬드 상사의 지분을 확대하고, 해싱턴 공작은 쫄딱 망하게 하고, 그 사람들이 살든 죽든 이쪽에 알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더 나아가 아예 브리티나 쪽에서 오는 연락을 거부했다. 누군가 소식을 보내면 사무실의 사환이 대신 받아서 따로 보관하였다.
열어 보지 않은 편지들이 어른 키 만한 철제 금고 속에 그득 쌓여만 갔다.
그렇게 철저하게 단절해도 어둠이 내린 밤이 되면 흐느끼며 다리를 감아오던 부드러운 몸과,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애처로운 음성만이 쟁쟁 울려 대었다.
그래서 흰 대리석처럼 매끈하던 펠릭스의 피부는 날이 갈수록 퍼석거리고, 조각처럼 아름다웠던 얼굴은 푹 꺼져서 점점 몽유병에 걸린 환자 몰골이 되어 갔다.
보다 못한 알베르토가 화를 냈다.
“너 믿고 우리 용병단들 이제 손 털고 여기 와서 저기 카리브 해 연안에 농장들 개척하면서 살 방도를 찾고 있는데.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다 같이 쫄딱 망하자는 건가?”
아니지, 사업은 날로 확장 중이지.
하지만 이 모든 게 다 펠릭스의 능력으로 쌓은 성이라, 펠릭스가 상사병에 죽으면 곧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거였다.
그래서 알베르토는 제가 확신하는 비법을 처방했다.
“펠릭스, 여자한테 받은 상처는 자고로 여자로 잊는 거야.”
알베르토는 매일 밤마다 어여쁜 여인들을 펠릭스의 처소에 들이밀었다.
그렇지만 펠릭스는 그 어떤 미인을 봐도 감흥이 일지 않았다.
아니, 여인들이 교태로운 미소를 지으며 달려들 때마다 오히려 그날 밤, 자신의 머리를 감겨 주던 일레인, 자신의 등을 안고 떨던 일레인만 더 생생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는 알베르토도 펠릭스의 불면을 고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사업은 날로 탄탄하게 확장되어 가나 몸은 꼬챙이처럼 말라가면서 3년을 버틸 무렵이었다.
카리브 해에 개척한 농장과 은 광산을 총괄하고 있던 찰스가 오랜만에 펠릭스를 찾아와 불쑥 말했다.
“해싱턴 공작이 죽은 건 알고 계십니까?”
“…응?”
“그때 펠릭스 님께서 일레인 아가씨…….”
찰스에게 일레인은 늘 펠릭스의 아가씨였기 때문에 말실수를 했다. 해쓱한 얼굴로 입을 쩝쩝 다신 찰스가 다시 말했다.
“공작 부인을 구할 때 말이에요. 그때 해싱턴 공작이 여왕이 보낸 암살자들에게 옆구리에 총알 빵을 맞았었는데, 그 상처가 덧나 다음 해에 죽어 버렸다는데요?”
“!”
펠릭스의 심장이 3년 만에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했다.
‘해싱턴 공작이 죽은 지 벌써 2년이나 되었는데, 그 사이 혹시 일레인이 재혼이라도 했으면!’
“그런 중요한 정보를 대체 왜 이제야 말하는 건가, 찰스? 대체, 왜!”
“아니, 편지를 다 거부했다면서요? 오죽 답답했으면 헨리 씨가 나한테 사람을 다 보냈겠냐고요. 가서 좀 당신이 한사코 외면하려는 여자가 그지 새끼가 되게 생겼다고, 진짜로 알거지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작정이냐고 물어보라고 해서 왔는데!”
“…그럼 일레인은 재혼하지 않은 건가?”
“내가 그걸 어찌 알아요? 직접 가서 확인하시든가. 그리고 이거.”
찰스는 습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잘 포장된 커다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낸들 아나? 헨리 씨가 전해 주라고 해서 가져온 거유.”
찰스가 나간 후, 사무실에 홀로 남은 펠릭스는 직각의 포장 상자를 한참 노려보았다.
화가인 어머니 밑에 커 왔기에 저 상자의 포장법은 익숙했다. 저건, 유화 그림을 포장하는 방식이었다.
무슨 그림일까.
풀어 보고 싶은 마음과, 풀어서 보고 나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심정이 들까 두려운 마음에 한참 망설이던 펠릭스는, 이윽고 결단을 내렸다.
밀납 먹인 속 포장지를 풀어 낸 순간.
“!!!”
펠릭스는 가슴이 콱 막히는 통증을 느꼈다.
그림 자체는 평범했다. 아주 어여쁜 봄날의 정원에서, 색색의 봄꽃들이 피어난 속에 두 아이가 나비를 잡으려고 뒤뚱대며 걸어가는 순간을 그린 풍경화였다.
약간의 키 차이가 나는 아이들은 거의 뒷모습만 보이고, 그중 작은 아이는 팔랑거리는 나비를 향해 손을 뻗느라 몸을 옆으로 살짝 튼 상태였다. 그래서 꼬마의 옆모습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얼굴 전체를 본 것도 아니고 크면 분명히 대단하게 아름다운 콧대가 될 옆선만 본 것인데도.
아이를 본 순간 가슴이 콱 막혔다.
가슴이 무너지듯 아파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악마의 장난인가.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려 한참 아이 얼굴을 들여다보던 펠릭스가 마른세수를 한 순간이었다.
손바닥에 흥건하게 물기가 묻어나왔다.
눈물을, 저도 모르게 눈물을 아주 거하게 흘리고 있었다.
여동생 엘리노어가 죽은 이후로 이렇게 눈물을 떨궈 본 적이 없는데.
펠릭스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밀납 먹인 종이로 다시 그림을 덮고 사무실을 서성거렸다.
왜 이러는가. 왜 이렇게 가슴이 쪼개질 듯 먹먹하게 아픈가.
그러다 문득 일레인이 저 아이들을 어떤 눈빛과 포즈로 그렸을지가 너무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신을 그릴 때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해부를 하듯 냉철하게 살피겠지.
그러다 어느 순간. 절제했던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그 마법 같은 순간에 갈색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따스한 애정이 넘실거리겠지.
자신을 모델로 그릴 때처럼.
그러자 맹렬한 질투가 들끓어 올랐다.
원래 일레인의 모델은 나였는데. 왜 저런 애새끼들이 일레인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 거야.
왜 일레인의 그 시선이 내가 아닌 저것들을 향해 애정을 담아야 하는 거야.
나는 버렸으면서 짐만 될 저 애새끼들은 왜 계속 사랑하는 건데, 왜!
그 순간부터 펠릭스의 마음은 대서양을 건너 일레인에게 분노의 질주를 시작했다.
펠릭스는 씩씩대며 사무실로 돌아와 사환을 불렀다.
“대륙에서 온 편지를 어디에 보관해 두었지?”
그러자 사환이 사무실 안쪽의 금고를 열고 보낸 사람 별로 분류한 편지 뭉치를 꺼내 왔다.
펠릭스는 편지 뭉치를 뒤졌다.
가장 많이 편지를 보낸 이는 헨리 아셔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엘렌 페일른, 모친이었다. 리처드 해싱턴 공작이 밀봉해 보낸 편지도 있었다.
그런데.
“없다…….”
아무리 뒤적거려도 일레인이 보낸 편지는 단 한 통도 찾을 수 없었다.
공작이 죽은 지 벌써 2년이나 지났다는데, 그 이후로도 보낸 편지가 단 한 장도 없다는 것은 영영 자신을 잊었다는 뜻인가.
해싱턴의 새끼를 기르고 그리는 재미에 푹 빠져서 나 따위는 털끝만큼도 생각을 안 했다는 거지.
나는 저 때문에 매일 잠을 못 자 죽어 가고 있는데.
나를 버린 너는 왜 그렇게 잘살고 있는 거야.
그래. 정녕 네가 나를 찾지 않는다면, 네가 나를 찾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겠어!
절절 끓는 원망은 차가운 분노가 되었다.
그래서 펠릭스는 회사 운영을 찰스와 몇몇 쓸 만한 이들에게 맡기고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