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가난 속에 예술은 피어나고
이든까지 재운 깊은 밤이 오면 어쩔 수 없이 그날의 밤이 떠올랐다.
끝없이 파고들던 펠릭스의 몸과, 죽을 때까지 나에게 여인은 너뿐일 거라 속삭이던 열기 어린 음성이.
너무도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우리 해싱턴 가문의 사람들은 그리 쉽사리 사람을 놓지 못하지. 나나, 엘렌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소?”
공작의 시선이 옆에서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연인 닐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일레인에게 맞춰졌다.
“…그리고 난, 일레인 당신의 그 변치 않는 굳건함이 좋았소. 지켜야 할 이가 있다면 끝까지 지켜 내고자 하는 그 단단함이. 아마 펠릭스도 그래서 그렇게 끝까지 복수하려 드는 것일 거야……. 당신이 지켜야 할 사람 안에 포함되고 싶었을 테니까. 그 안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싶었겠지.
뿌리 없이 떠도는 삶을 지긋지긋해 했으니까.
겨우 맛본 단단함에서 쫓겨난 배신감이 너무 커서, 당신을 망가뜨리고 싶은 거야.
해싱턴 공작의 입에서 나오는 열기가 점점 더 뜨거워졌다.
일레인은 망설이다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펠릭스에게 권력이 없기 때문에 결국 여인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수모를 가르쳐 주기 위해 저와 혼인하신다고 했지요. 그 결정에 대해 지금도 후회는 없으십니까?”
“…영애.”
해싱턴 공작의 열에 들뜬 눈빛이 흐려졌다 지나치게 밝아졌다 기이한 점멸을 지속했다.
“후회는 선택권을 가지지 못한 약자들이나 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이들은 선택한 것에 대해 그 결과가 어찌하든, 책임을 질 뿐…….”
그러니까 일레인 영애. 그대도 펠릭스를 버리기로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뿐.
끝까지 냉철한 말을 내뱉던 공작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마님, 이만 물러나요. 우리 리처드, 너무 힘들어요.”
공작을 그만 내버려 두라고 닐이 일레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것이 아마 맑은 정신으로 나누는 마지막 대화가 되리라.
“리처드, 고마웠어요. 당신 덕분에 지켜야 할 가족을 지켜 낼 수 있었어요.”
일레인은 벌써 죽음의 냄새가 한층 더 짙어진 공작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등 뒤로 꺼질 듯 연약한 공작의 말이 따라붙었다.
“…다 지나간단다, 일레인. 사랑도, 기쁜 일도, 슬픈 일도, 그러니 너무 미래의 일을 당겨 걱정하지 말고. 후흐.”
힘에 겨운지 공작은 말을 하다 말고 쌕쌕거렸다.
“그만 리처드으, 그만.”
애정 어린 타박을 주고받는 두 연인을 두고 정원으로 나오니, 온통 푸르른 새싹이 앙증맞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어쩐지 한 세월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지켜야 할 이들은 지켜 냈는데 정작 가장 지키고 싶었던 연인은 잃어버린 잔인한 봄이 오고 있었다.
공작의 상태는 꾸준히 나빠지다가 일주일 후 종부 성사를 받고 세상을 떴다.
“나는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연인의 품에서 죽어 가며 공작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공작은 후회 없이 생을 끝냈지만, 일레인은 미우면서도 슬픈 복잡한 심경을 정리할 새도 없이 현실적인 일을 처리해야 했다.
“다음 달까지 2만 파운드를 갚아야 한단다, 일레인.”
조문객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이런 종류의 빚 독촉이었다. 정치 세력을 키우는 데 의외로 자금이 많이 들어갔는지 여기저기 깔아 둔 빚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일레인은 루덴의 해싱턴 공작 저부터 헐값에 처분해 급한 빚을 갚았다.
나머지 빚은 크라몬드 상사의 동방 무역선이 들어오면 갚기로 사정해서 몇 달 미뤘다.
상선이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파산할 수도 있단 두려움이 일레인과 엘렌을 초조하게 했다.
이 와중에 홀로 남겨진 연인 공작의 연인 닐은 해싱턴 공작이 따로 남겨 준 유산을 가지고 제 나라로 돌아갔다.
“마님, 저두 후회 하나도 업써요. 리처드를 만나 늘늘 행복했으니께.”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득 담고서 닐이 일레인에게 한 말이었다.
마음껏 사랑한 닐과 해싱턴 공작은 후회 없이 떠났지만, 남겨진 일레인과 엘렌은 나날이 거세지는 재정 압박에 더욱 초조해졌다.
엘렌은 일레인 모르게 펠릭스에게 해싱턴 공작이 죽었다는 연통을 보냈지만,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했다.
엘렌은 헨리 아셔를 찾아 왜 펠릭스에게 답이 없는지 따져 물었다.
“펠릭스 님은 벌린 사업이 많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편지를 받지 못하시는 게지요. 하지만, 만약에…….”
아셔는 잠시 망설이다가 수염을 쓸며 큼큼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해싱턴 공작 부인께서 직접 연락을 하시면 혹시 답을 하실지도…….”
“…그 애가 그럴 리가요.”
엘렌은 숨이 막힐 정도로 재정적인 압박이 심해지는데도 펠릭스에게 연락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일레인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저는 그이를 처참하게 버렸어요. 이제 와 무슨 염치로 아이를 구실로 그에게 연락을 하나요.”
그게 일레인 크라몬드, 아니 이제는 일레인 해싱턴이 된 일레인이 펠릭스에게 속죄하는 방식이었다.
“오라버니가 보낸 편지도 펠릭스에게 닿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분은 여기 소식을 다 거부하고 계십니다. 그만큼 배신감이 깊으신 게지요.”
해싱턴 공작은 죽기 전 펠릭스에게 이든이 펠릭스의 아이란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고 하였다.
그 편지를 읽었다면 펠릭스는 당장 돌아왔겠지.
엘렌은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한 채 빈손으로 아셔의 사무실을 나와야 했다.
일레인은 이든을 데리고 크라몬드 백작 저로 옮겨갔다. 크라몬드 가문의 사정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올렛과 일레인이 살림을 합쳐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오갈 곳이 없어진 엘렌도 군식구로 따라왔다. 명목은 여전히 아서와 이든의 그림 선생님이자 이든을 돌봐 줄 고모였다.
집 안팎의 대소사로 바쁜 일레인을 대신해 이든은 주로 엘렌이 돌봤다.
“엘 꼬모, 잇거, 잇거!”
빚을 갚는 문제 때문에 일레인이 게인즈 씨와 외출한 초봄의 오후였다.
엘렌의 손을 잡고 정원을 산책하던 이든이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꽃밭의 한쪽을 가리켰다.
“꼬모, 뿡뿡, 잇거!”
이제 세 살이 되는 이든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집요하게 물어봤다. 지금 통통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건 땅에 딱 붙어 핀 들꽃에서 꿀을 모으는 벌이었다.
날개에서 나는 소리가 신기한지 이든은 엘렌의 손을 놓고 뒤뚱뒤뚱 뛰어가 얼굴을 벌에게 들이밀었다.
엘렌이 뒤따라 뛰어가며 소리쳤다.
“이든! 쏘이면 아파. 벌이란다. 꼬리에 침이 있어서 너무 가까이 이놈 화를 내면서 찔러요.”
“꼬이, 꼬이에 독!”
아프다는 말은 신경도 안 쓰고 이든은 벌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팔을 휘둘렀다.
이렇게 귀여운 이든을 볼 때마다, 자신을 ‘할머니’가 아닌 ‘고모’라고 부르는 손주를 볼 때마다, 엘렌은 가슴이 벅찬 기쁨과, 할퀴듯 슬픈 아픔을 동시에 느꼈다.
‘저리 귀한 아이에게서 아빠를 빼앗다니.’
일레인에게서 펠릭스를 떼어 내기 위해 부린 술수가 내 손주를 사생아 처지로 만들었구나.
이제 와 펠릭스의 아이라고 밝힌들, 해싱턴의 성마저 잃은 이든은 정말로 사생아가 되어 버리고 말아 일레인과 엘렌은 이든을 그냥 해싱턴 공작의 아들로 말하고 있었다.
뒤늦게 후회하며 돌아오란 편지를 연거푸 보냈지만 펠릭스는 묵묵부답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징그럽겠지.’
제대로 된 사랑을 주지도 않았으면서 겨우 찾은 사랑마저 빼앗아 버렸으니.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새긴 엘렌은 온힘을 다해 이든을 정성껏 돌보는 걸로 속죄를 삼았다.
그런데 신기한 건 몸이 나아지는 거였다.
유독한 성분이 들어 있는 물감과 붓 대신 한시도 쉬지 않고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는 이든을 쫓아다녀서일까.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던 심장과 폐가 이제 이든을 쫓아 달려도 그닥 아프지 않았다. 회색으로 죽어 있던 낯빛이 점차 혈색을 되찾았다.
‘이든만이라도 제대로 키워 내라는 신의 가호야.’
엘렌은 이따금 수채화 물감으로 풍경화를 그리는 시간 외에는 바이올렛과 함께 아서와 이든을 돌보는 것에 전념했다.
한편 일레인은 본격적으로 화가로 데뷔했다. 재산만 처분해서는 매일처럼 몰려오는 청구서를 감당할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
다행히 엘리자베스 공주나 산샤 공녀 등 그간 그렸던 유명 인물의 초상화가 인물을 아름답게 표현한 걸로 제법 입소문이 나 주문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엔 샬럿 해밀턴 후작 부인의 지원도 큰 몫을 했다.
샬럿은 후작 저 살롱의 가장 중앙 벽에 에로스 신으로 분장한 펠릭스 초상화와 바이올렛을 그린 초상화를 함께 걸어 놓았다.
예술에 대한 안목으로 정평이 나 있는 후작 부인이 당당하게 내세우는 화가니 모두 일레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레인을 둘러싼 낭만적인 소문도 데뷔탕트를 치른 귀족 영애들을 매혹하기에 충분했다.
“마트비아의 숨겨진 사생아였던 펠릭스 님의 청혼을 받았던 유일한 여인이 아닙니까? 청혼을 거절당한 것이 얼마나 충격이었으면 아예 미개인들의 땅으로 가 버렸겠어요?”
“맞아요. 그림을 그리게 하면서 대체 그 가난뱅이 공작 부인에게 무슨 매력이 있는지 알아봐야겠어요.”
“여전히 사랑하는 거 아닐까요? 잊었다면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텐데, 펠릭스 님은 기어이 해싱턴 가문과 크라몬드 가문을 파산시킬 작정이시라면서요?”
“아, 정말 낭만적이에요. 자신을 버린 여인을 못 잊어 기어이 벌을 주려는 에로스 신. 아아, 마성의 펠릭스 님이에요.”
이렇게들 속삭이며 일레인에게 자신들의 초상화를 의뢰했다.
그러면 일레인은 평범한 얼굴이 숨기고 있는 사랑스러운 특징을 아주 역동적으로 잡아내 강렬한 초상화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점차 구애자들에게 감춰진 매력을 돋보이고 싶어 하는 혼인 적령기의 청년들, 그리고 인생 최고의 한때를 그림으로 간직하고 싶어 하는 자아도취형 부유층에게서 의뢰를 많이 받게 되었다.
바이올렛과 엘렌이 이든과 아서를 함께 키우면서 일레인이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일레인이 그린 풍경화나, 이든과 아서가 함께 뛰노는 뒷모습을 그린 개인적인 그림이 무지막지하게 비싼 값에 팔려 나가는 거였다.
‘대체 누가 내 그림을 이렇게 비싼 값에 사들이는 걸까.’
일레인은 궁금해 게인즈 씨에게 알아보게 하였지만 화상 뒤에 숨어 있는 구매자를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