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요?
“펠릭스와 판박이구나.”
일레인을 돌보며 오히려 점차 건강을 찾아가고 있는 엘렌이 아이를 보고 난 후 기뻐하며 속삭였다.
“펠릭스도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찬찬히 주변을 살폈거든.”
“흥, 있지도 않은 펠릭스 타령 그만하고 내 딸이나 좀 살피라고.”
아서를 데리고 해싱턴 성에 내려와 일레인을 보살피던 바이올렛이 타박했다.
이름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아들이면 이든, 딸이면 발렌티나. 둘 다 강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이었다.
일레인은 아이가 펠릭스처럼 강인하고 아름답게 자라기를 바라며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제 한 살하고 6개월이 되어 가는 아서 크라몬드와, 펠릭스 페일른의 아들이지만 해싱턴 성을 물려받게 된 이든은 브리티나의 동북쪽 끝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는데, 크라몬드 가문도 해싱턴 가문도 재정적으로 착실하게 파산의 길을 걸었다.
제대로 된 경영인이 없는 크라몬드 가문은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를 갚을 능력이 없었고, 그럴 때마다 펠릭스를 대리하는 골든우즈 사의 헨리 아셔는 그만큼 크라몬드 상사의 지분을 확보해 갔다.
이제 크라몬드 상사는 이름만 크라몬드 상사이지, 실은 펠릭스 페일른이 대표로 있는 골든우즈 사가 지분의 팔십 퍼센트를 가지게 되었다.
“펠릭스는 아메리카로 떠난 지 오래라오.”
지분의 오 퍼센트를 또 회사채 이자 대신 넘긴다는 서류에 바이올렛의 사인을 받기 위해 찾아온 헨리 아셔 씨가 말했다.
“동부에 터를 잡고 철광석과 석탄 광산을 계속 개발하며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아우를 기업을 세워 나가고 있소, 해싱턴 공작 부인.”
헨리 아셔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일레인에게 말했다.
헨리 아셔는 일레인을 좋아했다. 펠릭스를 내심 아들처럼 진심으로 아껴 온 아셔는, 냉혹하기만 한 돈벌레 펠릭스가 유일하게 젊은이다운 풋풋함으로 활짝 웃을 때가 일레인 곁에 있을 때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심, 여기저기 떠다니는 부평초 같은 펠릭스가 저 여인 곁에서라면 든든하게 뿌리내리고 행복하겠구나, 기대했던 미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호감이 여전하기에 이렇게 크라몬드 상사가 파산으로 달려가고, 일레인이 차명으로 소유했던 회사채의 지분까지 교묘히 빼앗는 상황이 마음 아팠다.
“일레인.”
일레인이 아직 해싱턴 공작 부인이 되기 전 부르던 대로 헨리가 친근하게 불렀다.
“비시오, 일레인. 직접 찾아가 펠릭스에게 빌어. 미안하다고. 상황이 그러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러면 펠릭스가…….”
“아니요, 아셔 씨.”
일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펠릭스의 믿음을 배신했어요. 처절히 농락당한 기분이었을 텐데도 펠릭스는 또 저를 구해 주기까지 했지요. 그런 펠릭스에게 제가 곤궁해져서 곤란하니 용서해 달라고 할 염치가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크라몬드 백작가도, 그리고 일레인 당신도 다 파산하고 말 거요.”
“아니요, 아셔 씨. 저도 나름 재산을 지키고 늘려 갈 방법을 찾고 있어요. 친절에 감사합니다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일레인은 아셔 씨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는 이든을 보며 삶을 의연하게 지속했다.
일레인과 바이올렛은 루덴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싱턴 성에 계속 머물렀다. 이든이 여섯 달을 넘겨 어느 정도 튼튼해질 때까지 루덴의 복잡한 상황에서 멀찌감치 피해 있기 위해서였다.
일레인은 이른 아침, 안나와 바이올렛에게 이든을 맡기고 엘렌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아이에게 해가 될까 유독한 성분이 많은 유화 물감보다 수채화 그림을 많이 그리는 나날이었다.
“일레인, 네가 이든을 키우는 걸 지켜보니 알겠어. 펠릭스가 왜 내게 분노했는지, 내가 무엇을 펠릭스에게 잘못했는지.”
엘렌은 이따금 일레인에게 고백하곤 했다.
“펠릭스가 아름답게 태어나자마자 나는 매일 작업실에 모델로 세워 그림을 그려 대었어. 그중 제일 잘 그려진 그림을 주야장천 오토한테 보냈지. 유화가 유독한 성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런 물감과 붓을 어떤 때는 펠릭스가 질겅질겅 씹는 걸 보았으면서도.”
내게 펠릭스는 그저 날 버린 사내에게 다가가기 위한 끈이었는데.
“그런데 너는 정말 다르구나. 이든을 정말 정성으로 돌보고 사랑하면서도 섣불리 그림으로 그리려 하지 않지도 않고, 무엇보다.”
엘렌은 자신의 과오가 새삼 너무 크게 다가와 마른 얼굴을 찡그렸다.
“이든이 펠릭스의 아이라는 걸 알리기만 하면 곧바로 달려올 터인데도 한사코 알리지 않는 것을 보니, 일레인 너는 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할 땐 그 사람을 위해서 행동하고 배려하더구나.”
너무 지나친 칭찬이어서, 일레인은 고개를 저으며 코발트 색과 크림슨 색을 섞어 제 마음처럼 복잡하고 어두운 색깔을 만들어 냈다.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
일레인은 이제 아이의 할머니이기도 한 엘렌을 여전히 페일른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모든 계약은 신성한 것이니까요. 해싱턴 공작과 혼전에 맺은 계약이 있고, 또 하나. 저는 펠릭스가 아이 때문에 저에게 얽매이길 원하지 않아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두려워서 알리지 못하는 거였다.
알렸는데도 펠릭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차라리 이대로 언젠가는 서로 오해를 풀고 다시 얼굴을 맞대고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한 자락을 가지고 싶었다.
힘을 기를 수 있을 때까지. 정말로 펠릭스가 자신을 완전히 잊고 돌아보지 않는다고 해도 홀로 살아갈 힘을 가질 때까지.
일레인은 모두에게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그림을 그리며 화가와 엄마로서 나날을 보냈다.
질척하게 차가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이제 다시 루덴으로 돌아가야 할 시기였다.
바이올렛은 두 돌이 되어 어엿한 꼬마가 된 아서 크라몬드를 데리고 루덴 외곽의 크라몬드 백작 저로 돌아갈 차비를 했다.
일레인도 이제 마차 여행을 해도 될 만큼 충분히 튼튼해진 이든을 데리고 루덴 중심가에 있는 해싱턴 공작 저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었다.
출발을 사흘 앞두고 이른 아침 루덴에서 사람이 왔다.
“공작 부인 마님. 어서 루덴으로 가시지요. 해싱턴 공작께서 위독하십니다.”
“리처드가!?”
해싱턴 공작은 겨울 내내 남색가를 처벌하는 소도미 법을 폐지하도록 귀족들과 힘을 모았다. 그리고 새해 들어 열린 첫 귀족 의회에서 드디어 소도미 법의 공식 폐지를 의결하고 새 왕에게 재가까지 받아 냈다.
그러는 동안 전왕 마틸다 측이 보냈던 저격수에게 입었던 옆구리의 총상이 다시 덧났다.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정치 활동을 하다가 탈이 난 거였다.
“살이 괴사되어 더는 손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버드나무에서 추출한 약제를 바르는 것도 내성이 생겨서…….”
고름 가득한 염증 반응으로 열이 올라 의식까지 종종 혼미해지자, 의사는 최후통첩을 해 왔다.
해싱턴 공작은 아내 일레인을 보길 원했다. 그래서 그의 연인 닐이 일레인을 데려오도록 발 빠른 자들을 보낸 거였다.
일레인은 이든을 바이올렛과 엘렌에게 맡기고 데리러 온 시종들과 함께 루덴으로 달렸다.
해싱턴 공작 저의 침실에 들었을 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방 안에는 이미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배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님, 이리로.”
울 듯 눈물을 머금은 집사장 닐이 일레인의 손을 잡고 해싱턴 공작의 침대 옆에 앉혔다.
“리처드, 저 일레인 왔어요.”
열에 들떠 기이하게 빛을 내는 눈동자가 일레인의 얼굴 뒤를 자꾸 살폈다.
“…이든은?”
이든 해싱턴이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해싱턴 공작은 이든이 유아 세례를 받을 때 딱 한 번 보고 그 이후 보질 못 했다. 비록 자신의 친자는 아니었지만, 해싱턴은 이든이 해싱턴 공작가에 내려진 축복이라고 믿었다.
“급하게 오느라 함께 오지 못했어요. 닷새 후 정도면 도착할 거예요.”
으흥.
실망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던 해싱턴 공작이 다시 기운을 내려 애썼다.
“…닐, 그거.”
해싱턴 공작이 닐을 불렀다. 그러자 닐이 자문 변호사의 검토를 마친 유언장을 들고 왔다.
“일레인. 내가 죽으면 이든이 해싱턴 공작의 작위를 물려받게 될 거다. 그런데 만일 이든이 커서 해싱턴 성을 버리고 제 친부 펠릭스의 성을 받고자 한다면, 작위에 딸린 영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이든에게 상속되게끔 유언을 작성해 두었단다.”
그러니까 해싱턴 공작은 이든이 펠릭스의 아들로 인정받고자 할 때 생겨날 수 있는 법적 제약을 미리 거둬 준 거였다.
“리처드.”
일레인은 불타듯 뜨거운 해싱턴 공작의 퉁퉁 부어오른 손을 잡았다.
한때는 펠릭스와 혼인하지 못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공작을 지독하게 원망했었다.
그러나 공작과 혼인한 덕에 일레인은 크라몬드 가문과 엄마 바이올렛, 그리고 남동생을 지켜 낼 수 있었다. 혼자 힘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고마워요.”
“…펠릭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
일레인의 눈에서 순식간에 눈물이 말랐다.
“죽을 때가 되니 가장 후회되는 것이 펠릭스를 저리 떠돌게 한 것이더구나. 그래서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상세히 설명하는 편지를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 펠릭스에게 보냈다. 그러니 일레인.”
헉헉거리며 뿜어내는 병자의 열기가 일레인의 얼굴을 달궜다.
“펠릭스가 돌아오면 용서를 구하고, 그와 재혼하거라.”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요?”
일레인은 너무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꺼내 놓지 못했던 질문을 죽어가는 이에게 꺼내 놓고 말았다.
“거기서 새로이 사랑을 이미 찾았으면요? 그래서 저따위는 아예 잊고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요?”
흐흐흑.
펠릭스가 자신에게 주었던 마음을 도로 거둬들였을지 모른다는 것. 그것이 사실 일레인을 두렵게 했다.
그래도 된다고. 펠릭스의 사랑을 배신한 건 저였으니 펠릭스는 그래도 된다고 말은 했지만, 저 깊은 속마음엔 아직도 펠릭스가 자신을 사랑하길. 자신을 원하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