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성모 마리아여, 성모 마리아여
“다이앤.”
이름을 부르며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처음 바이올렛을 맞이한 건 강렬한 악취였다.
오물이 가득한 침대 위에 한때 ‘브리티나의 블루 다이아몬드’라 칭송받았던 다이앤이 바이올렛보다 더 주름진 얼굴로 벌벌 떨며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몇 번이나 다잡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다이앤!”
“물, 무을.”
얼마나 혼자 버려져 있었던 것일까.
탁한 눈빛에 온통 갈라진 입술로 다이앤은 물을 애원했다.
바이올렛은 방을 나와 거실 끝 주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다가갔다.
더러운 주방에 다행히 도자기 병에 물이 조금 담겨 있었다. 바이올렛은 희미한 어둠 속에서 빈 컵 하나를 찾아내 물을 담고 다시 다이앤에게 향했다.
온통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침대 속 다이앤을 안아 일으켜 바이올렛이 다이앤의 입에 컵을 대어 주었다.
정신없이 벌컥벌컥 물을 마신 다이앤의 눈빛이 일순 맑아졌다.
“…엄마?”
흐흑.
볼 때마다 끔찍했던 순간이 떠올라 단 한 번도 마음 놓고 사랑해 주지 않아 끔찍한 괴물이 되어 버린 딸이 ‘엄마’라 부른다.
바이올렛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후두두둑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바이올렛은 집 밖으로 나와 뷰컴을 불렀다.
“뷰컴, 다이앤을 숙소로 옮겨야겠어요.”
바이올렛은 집사와 보리스 부인, 엘렌의 도움을 받아 다이앤을 숙소로 잡아 둔 외곽의 작고 깨끗한 집으로 옮겼다.
너무 창백해 회색빛을 내는 피부에 형편없이 마른 다이앤에겐 무엇보다 무얼 먹이는 것이 중요했다.
보리스 부인이 생선과 향신료, 우유, 포리지 약간을 넣어 끓인 죽을 가져왔다.
겨우 다섯 수저 먹고 다시 잠든 다이앤을 두고, 바이올렛은 목욕물을 데우게 했다.
“제가 씻기겠습니다.”
보리스 부인이 현지에서 단기 고용한 하녀 셋과 함께 다이앤을 씻기겠다고 나섰지만 바이올렛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했으니, 비누로 머리와 온몸의 오물을 1차로 씻어 낼 때까지만 도와줘. 그다음에는 나 혼자, 나 혼자 저 아이를 씻기겠네.”
하녀들마저 코를 막을 정도로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엉킨 머리카락을 비누로 칠하자 시커먼 물이 줄줄 흘렀다.
그래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비누로 한 번 씻어내자 제법 사람 꼴이 났다.
라벤더와 캐모마일 오일을 우유에 타 희석해 넣은 목욕물에 다이앤의 몸을 비스듬하게 담근 후, 바이올렛은 홀로 다시 머리를 감기기 시작했다.
한때 잘 익은 밀밭처럼 찬란한 황금빛을 내었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은 오랜 기간의 영양실조와 약물 중독으로 거의 흰색으로 탈색되어 한 움큼씩 빠져나왔다.
그래도 바이올렛은 올리브 오일에 탠저린과 레놀린 꽃향을 섞어 만든 최고급 비누로 정성껏 머리카락을 감겼다.
“…엄마.”
상큼한 오렌지 향과 꽃향이 의식을 깨운 것일까. 어느새 정신을 차린 다이앤이 바이올렛을 불렀다.
“그래, 다이앤.”
“왜, 왜, 이제 와서…….”
눈꺼풀을 들어 올릴 기력도 없어 축 늘어진 채 감고 있는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이올렛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코가 막히도록 뜨겁게 치미는 오열을 입술을 깨물어 삼키며, 바이올렛은 따스한 물로 머리카락을 헹궈 냈다.
“미안하다, 다이앤. 진작에 사랑하지 못해, 미안해.”
바이올렛은 늘 다이앤이 끔직했다. 자신과 똑같이 짙푸른 물빛 눈동자에, 구불구불한 금색 머리카락을 흔들며 천사처럼 웃는 딸아이를 볼 때마다 그 끔찍했던 순간이 생각났다.
다이앤의 흐린 눈동자가 울음을 삼키는 바이올렛은 낯설게 담다가 불쑥 말했다.
“…엄마가, 나를, 일레인처럼 사랑해 주었으면, 내가, 내가, 이렇게, 흉측하게…….”
“그래. 네가 이런 괴물 같은 살인자가 된 것이 다 내 탓이더구나. 미안하다, 다이앤.”
뿌연 수증기 사이로 후드득 후드득 회한의 눈물이 뜨겁게 흘러내렸다.
드레스 자락으로 눈물을 훔쳐 낸 바이올렛은 다시 향 비누를 들어 몸에 칠하기 시작했다.
정성스럽게. 아프지 않게. 곧 먼 길 떠나 신의 준엄한 심판대에 설 내 딸이 겉모습이나마 너무 초라하지 않게.
바이올렛은 진작 주었어야 할 사랑을 뒤늦게 온몸과 마음으로 손끝에 담아 다이앤의 몸을 씻겨 주었다.
“아서를 키워 보니 알겠더라, 다이앤. 아이에겐 엄마가 전부고, 엄마의 사랑이 전부라는 걸. 너를 키울 땐 난 매일 죽고만 싶었고, 일레인을 키울 땐 아주 어린 그 애가 오히려 날 엄마처럼 돌봐 줬어.”
물에 불은 때를 벗겨 내고, 붉게 달아오른 피부에 피부를 진정시키는 캐모마일과 라벤더 유로 만든 마사지 오일을 바르며, 바이올렛은 처음으로 딸에게 마음의 자락을 펼쳐 보였다.
“늘 내 상처만 아파하느라 네가 어떻게 비틀리는지 살피지 못해, 미안하다, 다이앤.”
“…….”
너무 늦었지만, 그만큼 마음이 담긴 사과였다.
나는 평생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일까.
이 말이 듣고 싶어서, 엄마의 사랑이 받고 싶어서 그렇게 착실하게 끔찍한 곳만 골라 딛어 온 것일까.
다이앤은 온 힘을 다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린 시야에, 자신이 제대로 늙었다면 가졌을 고운 모습의 여인이 쓰라린 회한과 사랑 가득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평생.”
이렇게 정신이 맑아 본 적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다이앤은 온 힘을 다해 명료한 발음을 만들어 냈다.
“평생, 반성하면서, 살아, 엄마. 속죄하면서, 살아. 내 대신, 내 대신.”
용서를 말하지 않을 거야, 엄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러 버린 끔찍한 내가, 어떻게 엄마를 용서하겠어.
그러니까 엄마가 내 대신 속죄하면서 살아. 절반의 책임은 엄마에게 있으니까.
온힘을 다한 말을 끝으로 다이앤의 몸은 다시 축 기력을 잃고 늘어졌다.
“으흐흐흑.”
바이올렛은 치미는 오열을 참아 내며, 눈물로 다이앤의 몸을 씻어 냈다.
한 시간이 넘는 목욕 끝에 다이앤의 부러질 듯 쇠약해진 몸은 깨끗함을 되찾았다.
바이올렛은 다이앤을 희디흰 옥양면 시트가 깨끗하게 깔린 침대에 뉘었다.
“…엄마, 저기 드레스 주머니 안에.”
마지막을 예감한 다이앤은 마른 입술을 열어 넝마자락이 된 드레스를 가리켰다.
“짐머, 짐머가 준 반지가 있어.”
넉 달 전, 브라바트의 수도에 온 다이앤은 상당한 금화를 건네고 겨우 대공자 빌헬름에게 자신이 왔다는 소식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사흘이 되도록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흘째 되어서야 빌헬름의 시종이 이륜마차를 끌고 와 다이앤을 수도 외곽의 작은 저택으로 데려갔다.
“벗어!”
다이앤을 맞이한 빌헬름이 뱉은 첫 말이었다.
애완동물을 살피듯 겨울의 차가운 눈초리로 온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뜯어보고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볼만하네. 과연 그 속도 겉처럼 어여쁜지. 와서 보여 줘 봐.”
그제야 다이앤은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똑똑히 알게 되었다.
창부. 로열 미스트리스는커녕 거리의 고급 창부 대접이 전부였다.
그래도 처음에는 빌헬름이 시중을 드는 하녀 다섯과 집사장, 건장한 마부와 풋맨까지 붙여 주었다.
그러나 어지간한 귀족 부인 못지않게 대접해 주면서 극진하게 대하던 빌헬름의 애정은 석 달을 가지 못했다.
“네가 어떻게 놀아났는지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이제 와서!”
함께 어울려 다니는 귀족들과 차례로 관계를 맺으라는 변태적인 성행위를 거절하자 비웃듯 말한 빌헬름은 그 길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많던 하인과 하녀들도 모두들 돌아가고. 화려한 집에 홀로 남겨진 다이앤은 꽃병에 꽂힌 장미처럼 속절없이 시들어 갔다.
처음에는 빌헬름이 주었던 패물과, 윌리엄이 주었던 금화로 그럭저럭 버텼지만, 절망에 빠진 마음은 쉬운 위안인 마약에 손을 대게 했다.
몸도 마음도, 재물도 모두 소진되어 남은 건 세상에 대한 원망과 굶주림과 끔찍한 금단 현상의 환상만이 이어졌다.
모두에게 버림을 받는 처지가 되자 비로소 일레인과 양부 윌슨이 얼마나 자신을 위해 주었는지와, 그런 그 둘의 배려를 자신은 얼마나 끔찍한 배신으로 돌려주었는지가 실감이 났다.
‘아아, 아빠. 아빠. 미안해요. 미안해요.’
몸부림치며 죽고만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생을 다할 용기가 없어 자비로운 죽음이 내려지길 바라는 가운데 유일한 위로가 되었던 것이 짐머 왕자가 주었던 청혼 반지였다.
‘짐머와 결혼했더라면.’
행복했을 것이다. 아빠 윌슨이 만신창이로 무너졌던 엄마를 사랑으로 다시 살게 하였던 것처럼.
짐머도 사랑에 굶주려 비틀리고 악의가 가득한 자신을 치유해 사람답게 살게 해 주었을 것이다.
일레인이 말한 것처럼 짐머와 혼인했더라면.
반지를 손에 쥐면 어쩌면 가질 수도 있었을 따스한 삶이 환상처럼 몸을 감쌌다.
“…엄마, 짐머에게 미안하다고…….”
유언과도 같은 말을 들으며, 바이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너무, 피곤해요, 엄마.”
바이올렛은 다이앤의 몸을 감싸 안았다.
가르릉거리는 숨 속에서 다이앤은 처음으로 엄마의 사랑을 느껴 보았다.
너무 따스하고 너무 포근해서, 다이앤은 다이앤답게 끝까지 한 자락의 원망을 놓지 않았다.
“엄마는, 일레인 없었으면 진짜…….”
나처럼 망가지고 말았을 거야.
그러니까 일레인한테나 고마워하라고요.
“평생, 속죄해요.”
다이앤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마지막 숨을 내뱉는 딸을 안고 바이올렛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회한을 끅끅거렸다.
성모 마리아여.
사랑의 성모 마리아여.
사랑받지 못해 비틀린 가여운 내 딸을 불쌍히 여기사, 다이앤이 지은 죄는 모두 내게 물으시고.
나를 지옥 불에 넣으시고.
부디 가여운 영혼을 받아 주소서.
성모 마리아여.
어미가 버렸던 가여운 신의 아이를, 제발 보듬어주소서.
바이올렛은 오래도록, 새벽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싸늘히 식어가는 딸의 시신을 안고 울고 또 울고 또 울며 기도했다.
다이앤의 장례는 이틀 뒤 작은 교회에서 기도와 눈물 속에 치러진 후, 생 마리 수녀원에 딸린 묘지에 묻혔다.
[죄인 바이올렛의 속죄로, 다이앤은 천국에서 웃길]
다이앤이 가지게 된 묘비명이었다.
그리고 3개월이 흘렀다.
9월 말.
하늘이 유난히 높고 푸른 날, 일레인은 열 시간의 산고 끝에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