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괴물이 되어 버린 딸을 입술에
“이 모든 게 다 너와 펠릭스의 희생으로 이루어 진 거잖니. 생각하면 할수록 너도, 펠릭스도 너무 가엾구나.”
따지고 보면 해싱턴 공작이 여왕을 몰아낼 힘을 얻게 된 것도 일레인과의 혼인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크라몬드 가문의 비극이 자신의 가문에도 닥칠까 두려워하던 귀족을 성공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으니.
그 과정에서 대부분이 원하는 걸 이루었는데, 가여운 한 연인, 일레인과 펠릭스만이 희생했다.
바이올렛은 그것이 못내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딸과 어린 아들 아서 백작을 위해 이를 악물고 강해졌다.
“엄마, 느껴져요?”
일레인은 주름진 바이올렛의 손을 가져다 제법 많이 부푼 배 위에 놓았다.
“어머! 이 힘찬 발길질을 좀 봐.”
태동이었다.
임신 6개월에 접어들면서부터 배 속의 아기는 힘차게 움직이며 놀았다.
방금도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들리자 외할머니라는 걸 아는지 퉁퉁 배를 차며 힘차게 환영하고 있었다.
“대양을 누비고 다니시던 외할아버지와 또 제 아빠를 닮아 아주 씩씩하구나.”
외손주가 건강하게 크고 있는 걸 확인한 기쁨도 잠시, 바이올렛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쉬고 있어라, 일레인. 나는 엘렌을 좀 볼게.”
“엄마.”
일레인은 바이올렛을 불렀다.
“너무 심하게 대하지는 마세요.”
총격 사건이 있은 후 엘렌은 일레인을 헌신적으로 돌봐 왔다. 아들의 아이가 일레인의 몸속에 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펠릭스에게 주었어야 마땅할 사랑을 뒤늦게 일레인과 손주에게 퍼붓고 있었다.
“엘렌은 정말로 지극 정성으로 저와 이 아기를 위하고 계세요. 그래서인지 아기가 너무 잘 놀아요.”
바이올렛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일레인이 장차 태어날 아기를 위해 만드는 장난감이 가득했다.
자식에게는 저렇게 사랑을 주었어야 했는데,
‘사랑을 주지 못해 괴물이 되어 버린 또 다른 나의 딸은…….’
바이올렛은 자신이 쌓은 업보를 떠올렸다.
배불러 낳았으면서도 단 한 순간도 그 존재를 환영하지 못했더니 끝내 괴물이 되어 버린 다이앤이 떠오르자,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다이앤이 죽어 가고 있어.’라는 말을 삼켰다.
아이를 품고 있는 일레인에게 지울 짐이 아니었다.
모든 비극은 모두 다 어미 노릇을 제대로 못한 자신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종결도 자신의 손으로 지어야 마땅하다.
“…그래. 좀 쉬고 있어. 이따가 같이 산책하자꾸나. 출산이 가까워 올수록 신선한 공기도 많이 쐬고 걸어 다녀야 한단다.”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고 일레인의 처소를 나선 바이올렛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엘렌이 있는 작업실에 갔다.
엘렌은 푸른 목초지에 피어난 들꽃을 수채화로 그리고 있었다.
“…….”
“…….”
바이올렛이 온 기척을 느끼고도 엘렌은 그린 계열에 노란색 물감을 혼합해 햇살에 찬란히 빛나는 어린 잎을 칠했다.
뒤에 앉아 묵묵히 엘렌의 작업을 지켜보던 바이올렛이 불쑥 말했다.
“널 용서한다고는 말할 수 없어, 엘렌. 그렇지만 자식을 가진 입장에서 네가 왜 그랬는지 이해는 한다.”
자식을 위해서라고, 펠릭스를 위해서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자식이 잘못되라고 기원하는 부모는 없으니까. 너도 펠릭스를 귀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엘렌의 붓이 그대로 한참 허공에 머물렀다.
“…미안하다.”
“나한테 미안해 할 일이 아니고 우리 일레인한테 미안해야지. 우리 일레인을 잘 돌봐 줘. 나는 다녀올 데가 있거든.”
그제야 엘렌이 붓을 놓고 바이올렛을 돌아보았다.
어릴 적부터 친자매처럼 자라나, 벼랑 끝에 몰린 바이올렛의 상처투성이 손을 잡아 끌어올린 친우 엘렌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열여덟 막 피어나는 젊음이 아닌 마흔다섯, 삶의 황혼에 다다라 병색 짙은 얼굴로.
“큰딸에게 가는 거니?”
역시, 친우는 친우였다. 한동안 소원했어도 바이올렛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가장 잘 아는 이는 엘렌이었다.
“…아이를 가진 일레인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야. 이미 일레인은 너무 많이 희생했고. 이건 내가 매듭짓는 것이 맞아.”
“함께 가 줄게. 함께 가자, 바이올렛.”
아무리 괴물이 되었어도, 남편을 죽인 원수라 해도 자식은 또 자식이었다.
그 무자비한 쓰린 고통의 길을 친구 홀로 가게 버려둘 수 없는 것이 엘렌의 우정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브라바트로 가기로 했다.
바이올렛이 떠나기 전 사흘 동안, 일레인은 두 모친의 사랑 안에서 마음껏 어리광을 즐겼다.
아서를 키우면서 엄마는 모름지기 어떠해야 하는지를 비로소 깨치게 된 바이올렛과, 펠릭스와 손주까지 잃을 뻔한 일을 겪고 자식은 무조건 사랑하고 응원해야 하는 존재라는 걸 뒤늦게 깨진 엘렌 두 사람은 지극하게 일레인을 위해 주었다.
두 사람은 온 정성을 다해 일레인과 산책하고, 맛있는 보양식을 하게 해서 먹이고, 그리고 함께 배 속의 아기에게 아름다운 세레나데도 불러 주었다.
어릴 적부터 어른의 삶을 살아야 했던 일레인은, 이제 스물 하나가 되어 엄마가 되고서야 어리광을 마음 놓고 부릴 수 있었다.
사흘 후, 바이올렛은 루덴으로 돌아갔다.
“일레인, 건강하게 잘 있거라. 또 보러 오마. 그땐 아서도 함께 올게.”
“안나, 일레인 잘 부탁해. 하녀장에게도 각별히 부탁을 해 놓았으니 불편한 것은 없을 거야.”
다정하게 인사를 남긴 바이올렛과 엘렌이 짙은 갈색의 마호가니 사륜마차를 타고 성을 떠났다.
“두 분은 다시 친우가 되신 건가 봐요. 하긴 엘렌 큰마님이 워낙 지극정성으로 마님께 잘하셨잖아요. 그럴 만도 하지요.”
그러나 예리한 일레인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봄,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조지 크라몬드가 드디어 처형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임신을 자각하고 있던 일레인은 처형장에 가지 않았었다.
불쾌한 장면을 봐 아이에게 심적인 동요를 전달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평소 다친 고양이조차 무서워 쳐다보지도 못하던 엄마 바이올렛은 직접 가서 조지의 처형을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왜 그랬느냐는 물음에 바이올렛은 ‘죄를 지은 만큼 죗값을 받는 걸 봐야지. 그래야 다시는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마음을 강하게 먹을 수 있지.’하고 말했었다.
‘엄마도 아시는구나.’
조지 그 흉악한 놈이 크라몬드 뱆작 저에서 다이앤을 데리고 어떤 끔찍한 짓을 벌였는지 아시게 된 거구나.
그런데도 저렇게 담담하다니. 엄마는 정말로 담대하게 어머니다움을 갖추게 되셨구나.
가슴이 아프면서도 벅차올랐었다.
‘그러니까 한시도 곁에서 떼어놓지 않는 아서를 데리고 오지 않은 이유는, 또 다른 일이 있으셔서 일 거야. 선생님은 그런 엄마를 홀로 보내지 않으려 하신 것이고.’
일레인의 짐작대로 두 사람은 루덴의 남쪽 아이덴 항으로 가 배를 타고 북쪽 브라바트 공국으로 갔다.
닷새 후, 바이올렛과 엘렌은 보리스 부인과 뷰컴과 함께 브라바트 수도 외곽의 허름한 저택 앞에 서 있었다.
축대도 거의 허물어지고, 마당에는 잡풀이 허리까지 자라나 폐가처럼 보이는 저택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창문에 내려진 두꺼운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불빛이 흘러나왔다.
“나 혼자…….”
“함께 들어가자, 바이올렛. 너 혼자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아니, 이건 짐승만도 못한 살인자를 세상에 내놓은 어미가 마땅히 홀로 겪어야 할 일이야.”
바이올렛은 결연하게 엘렌의 손을 뿌리치고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보리스 부인에게서 작은 꾸러미 하나를 받았다.
엘렌과 보리스 부인, 뷰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바이올렛은 홀로 안으로 향했다.
뷰컴이 말하길 열쇠는 세 번째 화분 밑에 놓아둔다고 했지.
바이올렛은 이미 죽고 줄기만 앙상하게 말라 비틀어져 있는 화분 밑에서 작은 열쇠를 찾아냈다.
딸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한때는 화려했을 저택은 휑하게 빈 먼지투성이였다. 상주하는 하녀 하나 없는지 온통 먼지와 거미줄이 어지럽게 늘어진 거실 안쪽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 있었다.
‘저 안에 다이앤이 있겠지.’
친딸처럼 키워준 윌슨을 죽이고, 제 어미마저 더러운 욕정의 풀이 대상으로 전락하게 한 다이앤이.
다이앤의 소식을 알게 된 건 샬럿과 윌리엄을 통해서였다.
일레인과 별도로 뷰컴에게 다이앤의 자취를 추적하게 한 바이올렛은 다이앤이 사라지기 전 윌리엄과 접촉했었다는 걸 알아냈다.
“…브라바트의 생마리 수녀원으로 간다고 했는데, 찾을 수 없었습니다. 죄송해요, 바이올렛.”
수척한 얼굴로 윌리엄이 말했었다.
샬럿이 윌리엄에게 오는 다이앤의 편지를 가로채 태워 버리고 있다는 건 뒤늦게 알았다.
“그 아이의 존재는 아서에게나 일레인에게나 하나도 득이 될 것이 없어요. 그래서 말하지 않은 거야.”
마음 약한 바이올렛이 혹시라도 다이앤을 도로 불러들일까 봐 샬럿은 크라몬드 저택에서 조지 크라몬드와 다이앤이 벌인 행각을 말해 주었다.
바이올렛은 그때 가슴을 치며 소리도 못 내고 오열했다.
그 지옥 같은 치욕을 들었으니 일레인은 조지를 죽여야 했던 것이고. 그래서 그리 사랑하는 펠릭스를 버려야 했던 것이야.
그리고 다이앤은…….
아무리 사랑으로 품지 못한 죄 많은 어미였다지만 어떻게, 사람이 되어 어떻게 그리 험한 꼴로 타락할 수가 있다더냐.
사람이 되어 어떻게 자신을 친자식보다 더 아낀 윌슨을 죽일 수 있다더냐.
이 모든 건 결국 내 탓이다.
배에 생겨난 걸 안 순간부터 치욕스러운 일의 결과물인 그 아이의 존재를 괴물처럼 여겼고, 그래서 단 한 번도 사랑으로 보듬어 주지 못한 이 어미의 죄.
괴물을 만들었으니, 그 괴물을 거두는 것도 어미의 의무다.
그날 바이올렛은 다이앤을 제 손으로 거둘 것을 맹세했다.
“다이앤.”
바이올렛은 끔찍한 괴물의 방문을 삐걱,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