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94화 (94/112)

#제94화. 흰색 가면의 구원자

공작이 일레인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 아이를 해싱턴 가문의 후계로 만드는 것이, 펠릭스에게서 일레인 당신을 빼앗은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속죄가 되는 길 같아서 그러오.”

“아이, 리처드. 무순 구런 불길한 말을 하구 구래요. 이러케 좋으은 날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해싱턴 공작을 닐 카오르가 타박했다. 그러자 공작은 허리에 단 술을 매만져 주고 있는 닐 카오르의 손을 잡았다.

“그러게. 닐이 있는데.”

하하하.

세 사람은 오랜만에 한마음으로 마음 편하게 웃었다.

닐은 해싱턴을 사랑하는 만큼, 일레인의 아이가 해싱턴 가문을 잇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일레인도 닐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해싱턴 공작은 신의 있는 동지였고, 닐은 그 동맹자의 소중한 연인이어서 세 사람은 이따금 일레인이 그린 그림을 함께 보면서 정답게 담소하기도 하였다.

아침 열 시부터 성 앞 교회의 너른 공터에서 세족식이 시작되었다.

공작가 영지민들이 마을 별로 함께 공작 앞에 서서 인사를 하면, 해싱턴 공작은 촌장과 젊은이들의 발을 씻겨 주며 덕담을 해 주었다.

네 번째 마을의 촌장과 그 부인, 그리고 마을의 젊은이들이 해싱턴 공작에게로 다가왔다.

아무리 해싱턴 공작가가 영지민들에게 너그럽고 관대하다고 해도, 지난해와 그 지난해는 겨울 가뭄이 심해 밀 소출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앞선 마을의 촌장과 젊은이들은 영양 상태가 썩 좋지 않아 파리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이상을 느낀 일레인이 일어서려 했지만, 공작은 벌써 촌장의 발을 씻겨 주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공작 뒤로 한 줄로 늘어선 젊은이 중 하나가 일레인을 바라보았다. 깊게 모자를 눌러쓰고 있지만, 앉아서 올려다보는 각도 덕분에 눈썹 위로 흉하게 진 칼자국이 보였다.

“리처드.”

일레인이 해싱턴 공작의 이름을 부르자 닐이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일레인, 걱정하지 말구 안자 있어요.”

그제야 공작 주위에 보이지 않게 칼과 채찍을 숨긴 호위병들이 물을 떠오거나 대야를 대령하는 시종들로 분장해 지키고 있는 걸 알아챘다.

아, 공작씩이나 되는데. 이런 상황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일레인은 안도했다.

촌장과 건장한 젊은이들은 본래부터 불순한 의도가 없었는지 아니면 호위병을 보고 계획을 포기했는지 순순히 발을 내밀고 세족을 받고 돌아갔다.

세족식 이후에는 가면을 쓴 축제가 열렸다.

벌써부터 아름답게 색색의 옷을 차려입은 선남선녀가 가지각색의 가면을 쓰고 백 파이프에 맞춰 겅중겅중 춤을 추고 있었다.

“?”

유난히 키가 큰 이 하나가 일레인의 눈길을 끌었다. 그 사내는 짙푸른 색 고급 천을 뒤로 늘일 수 있게 만들어진 흰색 가면을 쓰고 검은색 비단 망토를 입고 있었다.

가면의 사내는 줄곧 일레인만 응시하고 있었다.

흰 가면의 구멍 뒤로 검푸르게 빛을 내는 강렬한 눈동자는 너무도 익숙했다. 너무도 그리웠던 눈동자와 같아서…….

“펠, 펠릭스……?”

여전히 자신만을 오롯이 응시하는 사내를 향해 일레인이 걸음을 뗄 때였다.

댕댕댕댕.

다급한 종소리와 함께 와아, 하는 함성 소리와 타당탕탕 총소리가 귀를 때렸다.

깜짝 놀란 일레인이 몸을 돌렸다.

“마님, 이리로!”

황급하게 뛰어온 안나가 일레인을 보호하기 위해 팔을 잡는데 갑자기 해싱턴 공작 저택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마적 떼다! 마적 떼다!”

다급한 외침과 함께 다시 댕댕댕댕 종이 울리고, 방금 전 세족식을 받았던 젊은이들이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쥔 채 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공작 각하, 공작 부인, 이쪽으로!”

경호를 서던 이들이 해싱턴 공작과 일레인을 둘러싸고 교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타당, 타다당, 총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안나가 일레인을 안은 채 나뒹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일레인은 안나를 꽉 껴안고 몸을 낮췄다.

“도적 떼가 저택을 약탈하나 봐요. 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해싱턴 공작의 영지는 브리티나 동북쪽의 커다란 땅이었다. 가로로 달려도 40km가 넘도록 큰 영지라, 해안가를 지키는 영지 소속 병사들이 있다곤 해도 영지민들이 돌아가며 보초를 서는 수준에 불과했다.

“금고를 열었다! 마차를 가져와라! 금덩이다, 금덩이!”

“금덩이! 이야! 은화도 실어라!”

“금고를 싹싹 긁어 실어라!”

갑자기 불타는 성 쪽에서 도적 떼가 저희끼리 외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금덩이’ ‘금화’ ‘은화’라는 말은 기묘한 효과를 나타냈다.

초라한 반쪽짜리 가면이라도 쓰고 있던 영지민들부터 슬금슬금 성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금화 한 잎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성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탐심은 전염병처럼 퍼져 아이들까지 성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세족식이 있던 교회 앞 공터에는 공작과 공작의 호위군, 그리고 안나와 일레인이 남게 되었다.

그 순간 교회 지붕에서 탕탕, 총이 울리기 시작했다. 매복해 있던 자들이 총을 쏘기 시작한 거였다.

“일레인!”

누군가 일레인을 불렀다.

“알베르토, 교회 지붕의 저격수들을 죽여!”

누군가 이렇게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알베르토라니! 그럼 펠릭스가!’

생각한 순간, 탕 소리와 함께 뜨끔 무엇인가 불덩이처럼 뜨거운 것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앗!”

팔을 움켜쥐는데, 누군가 일레인을 확 끌어안고 땅을 굴렀다. 그와 함께 다시 ‘타당’ 총소리가 귀를 울렸다.

으읏.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데도 일레인을 끌어안은 사람은 한사코 온몸으로 일레인을 감싸고 있었다.

가면.

흰 가면을 쓴 사내.

검푸른 눈빛이 흰 가면 사이로 새어나오는 사내는 일레인이 꿈에서도 잊지 않은 체취를 흘리고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

뒤늦게 안나가 소리치며 일레인을 쫓아 달려오기 시작했다.

일레인을 안은 자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달려 총알을 피해 묘지로 향했다. 묘지 입구에 성모 마리아를 커다랗게 조각한 흰색 대리석 상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달려 석상 뒤 움푹 팬 공간에 들어선 사내는 조심스럽게 일레인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강렬하게 맞물렸다.

‘펠릭스?’

일레인이 가면으로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타다다당!

연속적인 총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울리고, 곧 이어 닐 카오르의 날카로운 비명이 공기를 찢었다.

“리처드으! 리처드으! 죽지 마!”

해싱턴 공작이!

놀란 일레인이 몸을 일으킬 때였다.

타당.

다시 총 소리가 울리며 흰 가면의 사내가 일레인 위로 쓰러졌다.

‘펠릭스가?’

놀란 일레인이 몸 위로 쓰러진 사내를 살피려 할 때였다.

“아흣!”

배가, 배가 너무 아팠다.

아랫배가 무겁게 뭉치면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일었다. 눈앞이 하얗게 탈색될 정도의 격한 통증이었다.

그러나 일레인은 배의 통증보다 온몸으로 자신을 덮어 총탄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흰색 가면의 남자, 그녀의 펠릭스가 더 걱정이 되었다.

끙끙 통증을 삼키며 몸을 빼내려 하는 순간. 격통이 밀려왔다.

“아앗.”

아래쪽에서 뜨거운 것이 흐르는 느낌에 일레인은 저절로 신음을 터트렸다.

총격 때문에 일레인에게 오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 있던 안나가 그 모습을 보았다.

“아이고, 마님! 이를 어째, 아기!”

아기, 아기라니!

총탄에서 일레인을 보호하기 위해 엎드려 있던 펠릭스가 몸을 굳혔다.

설마, 설마 그날 밤에 우리 아기가!

그 순간 펠릭스의 온몸에 기쁨이 휘몰아쳤다.

‘우리 아기라면, 그러면 우린 함께할 수 있어. 나 펠릭스 페일른은 나 같은 사생아를 만들지 않을 거니까.’

펠릭스는 서둘러 일레인의 몸을 살피기 위해 상체를 일으켰다.

그때, 다시 타당 탕 소리와 함께 무건가 뜨거운 것이 펠릭스의 등을 스쳤다.

매를 피해 머리만 숨긴 닭처럼 얼굴을 땅에 댄 채 엎드려 있던 안나가 흐느끼며 소리쳤다.

“아가씨! 아이고, 해싱턴 공작가의 후계가! 아이고!”

안나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펠릭스의 귀를 파고들었다.

“아, 펠릭스!”

일레인은 펠릭스의 이름을 부르다 다시 격한 통증에 신음하며 정신을 잃었다.

펠릭스는 일레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등에 타는 듯 통증이 일고 있었다.

‘스쳤다, 죽을 상처는 아니야.’

펠릭스는 안나를 불렀다.

“일레인을, 일레인을 보호해, 안나!”

소리친 펠릭스는 몸을 떼고 일어났다.

저 멀리서 교회 지붕의 저격수를 향해 개량 머스킷 총을 쏘는 알베르토 일행이 보였다.

오랜 경험으로 해상전과 배 위의 전투에 익숙한 알베르토의 용병들은 두 패로 나뉘어 한 패는 총을 쏘아 저격수를 못 움직이게 하고, 다른 한 패는 뒤쪽에서 지붕으로 올라 도륙하고 있었다.

“펠릭스 님! 우리 마님을 어째요?”

땅 위를 기어온 안나가 펠릭스의 팔을 잡고 울먹였다.

펠릭스는 일레인을 살폈다. 맥박은 제대로 뛰고 있었다. 그렇지만 화려한 드레스 자락은 벌써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아이고, 이걸 어째. 아기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안나가 흐느끼며 일레인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아기, 해싱턴 공작가의 후계!’

아까 안나가 달려오며 외친 말이 펠릭스의 심장을 찔러 들었다.

‘나의 아이가 아니고 해싱턴 그 개자식의 아이를 품고 있었던가.’

펠릭스는 새삼스러운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새삼 왜 자신이 해싱턴 공작의 영지에 왔는지 후회했다.

그렇지만 그 후회는, 이렇게라도 일레인을 구할 수 있어 다행이란 안도감보다 크지 않았다.

“아니, 펠릭스 님. 등에 피가! 아이 이걸 어째.”

일레인의 목에 손을 대 맥박을 살피기 위해 펠릭스가 몸을 기울였을 때 총알에 스친 상처를 본 안나가 울먹거렸다.

“쉿! 나는 저쪽을 가서 상황을 볼 터이니, 안나는 일레인을 잘 보살피게. 반드시 지켜야 해.”

펠릭스는 마지막으로 일레인의 얼굴을 살피고 해싱턴 공작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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