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93화 (93/112)

#제93화. 네가 잊혀지지 않아서

바이올렛은 훗날이 걱정이었다.

“일레인, 펠릭스에게 알려야 하지 않니? 나중에 제 아이인 걸 알면 얼마나 더 배신감이 크겠어?”

그러나 일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이를 핑계로 펠릭스의 발목을 잡는 건 너무 이기적인 일이에요. 게다가 지금 해싱턴 공작은 여왕과 정면으로 대치 중이기도 하고요.”

일레인은 펠릭스와 자신의 사이가 잘못 꿰어진 단추 같다고 생각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져 어떻게 해도 우그러진 신세를 벗어날 수 없는, 그런 단추.

“펠릭스는 자신의 삶을 찬란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엄마. 아서는 어떻게든 저와 엄마가 잘 키워요. 아빠가 남겨 주신 주식과 채권도 있으니까, 그걸로.”

사실 그 주식과 채권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레인이 차명으로 만든 뉴월드 투자회사의 대표가 헨리 아셔의 비서를 오랫동안 한 펠릭스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일레인이 숨겨 놓은 투자 자산에는 아직 펠릭스가 손을 쓰지 않았다.

‘그리 큰 규모가 아니라서 잊고 있는지도 몰라.’

일레인은 배 속 아이와 아서를 키우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이 확보되어 있어 다행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일레인의 임신 사실을 들었을 때 해싱턴 공작은 몇 초간 멍한 시선으로 일레인을 보았다. 그러다가 점차 주름진 눈 가득 기쁨이 들어찼다.

“우리 해싱턴 공작가의 직계가 끊기나 했는데, 신의 도우심이로구나.”

젊어서 몇 번 억지로 전처를 안은 적이 있지만 아이를 만드는 단계까지 결코 도달해 본 적이 없는 해싱턴 공작이었다.

그래서 방계 중에서 차기 공작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나치게 탐욕스럽거나, 음흉하거나 멍청하거나 방탕했다.

그런데 조카 펠릭스의 핏줄이라면. 영민하고 수려한 펠릭스와 심지 굳고 신의가 있는 일레인 사이에서 난 아들이라면. 그보다 더 나은 후계는 찾기 어렵지 않겠는가.

이미 불길한 끝을 예감해서였는지, 해싱턴 공작은 유난히 일레인의 임신을 기뻐했다.

한편 마틸다 여왕은 해싱턴 공작을 필두로 한 귀족 보수파의 세력이 날로 커지는 것이 불안했다.

게다가 마트비아에 있는 폐왕 제임스가 해싱턴 공작 측과 손잡고 암암리에 복귀를 노린다는 소문까지 은밀하게 돌았다.

시종장이 해싱턴 공작의 세력을 더 이상 방관해서 안 된다면서 은밀하게 고했다.

“해싱턴 공작의 여동생 엘렌 해싱턴이 마트비아의 대공과 과거 인연이 있었지요. 그 둘 사이의 아들이 거부로 알려진 펠릭스 페일른이니, 퍼즐이 맞춰지지 않습니까?”

“누가 그걸 모릅니까? 그래서 제거하려 했는데, 소도미 법에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으니 어찌한단 말이오?”

“그런데 좀 색다른 소문이 있습니다, 전하.”

시종장은 최근 해싱턴 공작과 펠릭스 페일른 사이가 일레인을 두고 틀어졌다는 소문을 전했다. 펠릭스가 해싱턴 공작에게 골든우즈 사의 지분을 모두 사들이고 공작을 퇴출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해싱턴 영지의 공작 저 금고에는 지분을 팔아 사들인 금덩이가 어마어마하게 들어 있다는 소문이 돕니다, 전하.”

“흥, 은행이 있는 요즘 세상에 누가 저택에 돈을 보관…….”

비웃던 여왕의 눈이 반짝, 음흉한 빛을 내었다.

시종장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소신이 알아서 처리할 터이옵니다. 심려 마시지요.”

여왕의 암묵적인 승인을 얻어 낸 시종장은 국무대신과 여왕파 핵심 귀족 서넛과 은밀하게 계획을 짰다.

4월, 대지를 적시는 촉촉한 비가 풍요를 약속하는 가운데 부활절이 다가왔다.

부활절이 되면 중앙의 정치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귀족들도 각자 영지에 내려가 영주민들을 격려하는 것이 브리티나의 오랜 전통이었다.

해싱턴 공작가도 예전부터 부활절 축제를 크게 열었다.

부활절을 앞둔 고난 주간에는 영지 내의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게 식량과 약을 제공하고, 성목요일에는 공작이 직접 각 마을의 촌장과 그 부인, 그리고 마을의 중추가 되는 젊은이들의 발을 씻겨 주는 세족식을 거행한다.

이 세족식이야말로 300년이 넘는 동안 해싱턴 공작가의 영지를 가능하게 한 뜻깊은 의식이었다.

일레인도 해싱턴 공작과 함께 브리티나 동북쪽 해싱턴 공작가 영지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마차로는 무리가 아니겠소? 그냥 여기 백작 저에서 쉬어도 되는데.”

해싱턴 공작이 만류했지만, 일레인은 해싱턴 공작 부인이 되어 처음 맞이하는 부활절 행사를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오랫동안 백작가 안살림을 책임져 오면서 절기마다 영지민을 정성스럽게 챙겨야만 영지 경영이 순조롭다는 걸 잘 알게 된 까닭이다.

“요새 입덧도 줄었고, 이제 아이도 안정기에 접어들어서 천천히 마차로 가면 괜찮다고 합니다.”

샬럿 고모는 일레인을 위해 축이 단단해 흔들림이 적은 사륜마차를 특별히 주문해 주었다.

떠나기 전, 일레인은 해밀턴 후작 저에 들렀다. 살롱에 걸려 있는 펠릭스의 초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펠릭스, 다녀올게요. 어디서든 몸 건강히 잘 있어 줘요. 그리고 배 속의 우리 아기, 잘 지켜 줘요.’

크라몬드 상사의 지분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며 냉엄한 복수를 행하고 있는 펠릭스가 초상화 속에서는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그 시각, 펠릭스도 해싱턴 공작의 영지로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레인의 얼굴 한 번 보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떠나기 위해서였다.

지난 3개월 남짓 펠릭스는 지중해의 작은 섬에 칩거하며 분노를 곱씹고 있었다.

‘일레인은 나를 철저히 농락했다!’

처음 만난 순간에 가문을 위해 해싱턴 공작과 혼인했다고 말을 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함께 밤을 보내고 나서야 혼인할 수 없다고 말하다니.

농락당하고 버려졌다는 배신감에 펠릭스는 크해싱턴 공작가와 크라몬드 백작가 모두를 파산시키기 위한 복수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중이었다.

크라몬드 상사를 조금씩 집어삼키고, 해싱턴 공작이 사들인 회사의 주식이나 채권의 가격이 폭락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도 일레인을 잊을 수가 없다.’

알베르토의 용병단이 터를 잡고 있는 지중해의 작은 섬에 주로 머물고, 일은 헨리 아셔를 통해 대리하고 있지만.

일레인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날,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감겨 주고, 장미 향이 물씬 나는 기름으로 마사지해 주던 부드러운 손길과, 뿌연 수증기 속에 보이던 짙은 슬픔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일레인은 정말로 나를 사랑했을 거야.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싱턴 공작과 결혼해야 했지만, 나를 그대로 보낼 수 없어서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이 들면 한없이 밉던 일레인이 미칠 정도로 가여워져서, 마음이 정처 없이 절절 끓었다.

보다 못한 알베르토가 제안했다.

“마, 다 버리고 가자! 아메리카로 가서, 거서 새로 시작하자. 나도 우리 단원들하고 같이 거, 무법 지대라대? 거서 터 잡고 왕 노릇 하면서 살아 볼라고. 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있다더냐?”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크라몬드 상사의 지분도 확보할 만큼 확보했고, 해싱턴 공작의 재산을 줄이는 건 헨리 아셔 씨를 통해 진행하면 되니, 한 3년 떠나서 새로 개발한 철광석 광산과 석탄 광산으로 철광석 산업체를 크게 세우고 신대륙의 투자 시장을 장악할 계획이었다.

여기 유럽을 영영 떠나기 전, 펠릭스는 마지막으로 일레인을 보기 위해 해싱턴 공작가의 영지에 들르기로 했다.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보고 가자.’

얼굴을 직접 보고 나면 대체 자신이 일레인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확인이 될 것 같았다.

증오인지, 미련인지, 아니면 고된 뱃길을 버티게 해 주었던 인생의 등불 같은 것인지.

펠릭스는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는 일레인을 딱 한 번 더 보고 떠날 생각으로 해싱턴 공작 영지로 숨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한 날부터 영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흥, 해싱턴 공작은 사방이 적인가 봐.”

오랫동안 용병단을 이끈 알베르토는 영지 각 마을에서 모여든 청년들을 스윽 훑어보고 펠릭스에게 말했다.

“저기 저 검은색 모자 쓴 놈, 그 옆의 절름발이 놈 등등은 결코 목동이나 농부가 아니라는 데 내 용병단 전체 재산을 걸지!”

그러니까 해싱턴 공작한테 수상쩍은 자들이 영지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릴지 말지는 네가 결정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알리지 않았다. 그 정도의 신의가 없었을뿐더러, 마음 한구석엔 잔혹한 복수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차라리 일레인을 사랑해서 빼앗아 갔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권력이 없으면 무슨 꼴까지 당할 수 있는지 내게 보여 주기 위해서 일레인과 혼인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 권력을 가지고서도 무슨 일을 당하는지 나도 지켜볼밖에.’

그래서 펠릭스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마을 여관의 2층에 방을 두 개 잡아 호위로 온 자들 다섯과 함께 머물면서 공작의 성에 들르지도, 어머니 엘렌을 찾아보지도 않았다.

사흘 후. 해싱턴 공작가의 유서 깊은 세족식 행사가 열렸다.

원래 공작 부인인 일레인도 함께 참여해야 하나 임신을 한 관계로 올해는 옆에서 앉아 지켜보기만 하기로 했다.

이른 조식을 끝내고 일레인은 해싱턴 공작이 브리티나 전통 복장을 공들여 차려입는 걸 지켜보았다. 시중은 공작의 연인이자 집사인 닐 카오르가 들었다.

“일레인, 배 속의 아이가 딸이면 알렌을 짝으로 맺어 줄까? 고작 일곱 살이긴 하지만 해싱턴 공작 작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방계 중에선 제일 나아 보이오.”

공작이 뜬금없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혼사를 결정하는 말을 하자 일레인은 웃고 말았다.

“농담이 아니오, 일레인. 나는 펠릭스의 아이가 꼭 해싱턴 가문의 후계자가 되거나, 만일 딸이라면 우리 가문 후계자의 반려가 되길 바라오.”

공작은 여전히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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