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펠릭스의 아기
“무슨 개소리야, 일레인 크라몬드. 알아들을 수 있게 똑바로 말해.”
펠릭스가 드디어 부드러운 태도를 버리고 거칠게 물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부드럽지도, 욕망에 들끓지도 않았다. 대신 차갑게 가라앉아 금방이라도 일레인을 후려칠 듯 싸늘한 빛을 내뿜었다.
“교회가 엄마와 아빠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했어. 그래서 나뿐 아니라 태어날 남동생까지 사생아가 되었다고, 펠릭스.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어. 가문의 작위를 되찾아 줄 사람이 너의 외삼촌 해싱턴 공작밖에 없어서…….”
“공작이 그 미친 제의를 받아들였고.”
“…….”
침묵이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었다.
펠릭스는 눈을 꽉 감고 이를 악물었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사생아란 신분 때문에 받았던 설움이, 일레인을 만나 다 사라진 줄 알았던 치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펠릭스의 몸과 정신을 마구 헤집었다.
“으아아아!”
상처 입은 짐승처럼 소리치며, 펠릭스가 벽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내가 사생아였던 것이 그렇게 걸렸던가, 일레인?”
쾅쾅.
펠릭스가 주먹으로 벽을 칠 때마다, 일레인은 차라리 제 몸을 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저렇게 딱딱한 돌벽에 그의 손이 상할까, 그것부터 걱정이 되어 정신없이 몸을 일으키던 일레인은 문득 흘러내린 시트 때문에 파고든 냉기에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펠릭스에게 이제 상처밖에 줄 것이 없는 인간이다.
싸늘하고도 비통한 자각이 온몸을 휩쓸었다.
다시 두 사람의 땀과 쾌락으로 얼룩진 시트를 몸에 감으며, 일레인은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 정해진 대사를 읊었다.
“사생아로 큰 당신이 그 설움을 제일 잘 알잖아. 남동생에게 그 짐을 지울 수 없었어.”
일레인의 말은 비수처럼 펠릭스의 가슴을 찔러들었다.
펠릭스가 벽에서 몸을 돌려 일레인을 바라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금방 꺼질 듯 상처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사생아로 자라는 설움뿐 아니라 가난의 설움도 잘 알지, 일레인 크라몬드.”
‘펠릭스, 펠릭스,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 수조차 없이 미안해.’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입안의 살만 짓씹고 있는 일레인에게 펠릭스의 마지막 말이 떨어졌다.
“네 남동생은 백작은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거지로 살게 될 거야. 너와, 해싱턴 그 개새끼도 마찬가지고!”
펠릭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알몸으로 방을 나갔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지고 또 멀어져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석상처럼 얼어붙어 있던 일레인은 비로소 정신을 놓고 허물어졌다.
* * *
골목 끝 작은 빌라에서 나온 펠릭스는 그 길로 알베르토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갔다.
“어, 벌써 결혼식을……?”
묻던 알베르토는 무섭게 가라앉은 펠릭스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무서운 일이 있었구나.
“나, 좀 잘 테니까, 출항 준비해 줘. 해싱턴 공작가 영지가 있는 에딘 항으로 가자.”
“…응, 알았어. 좀 자라.”
알베르토는 제 침대를 내주고 밖으로 나갔다.
사흘 후, 펠릭스는 해싱턴 공작가 영지에 머무르고 있는 엘렌 페일른을 찾았다.
“펠, 펠릭스!”
엘렌 페일른의 얼굴은 한층 더 병색이 짙어져 있었다.
“일레인을 해싱턴 공작에게 넘기면 제가 고분고분 마트비아의 대공에게 갈 줄 예상하셨습니까?”
펠릭스가 무서운 어조로 물었다.
엘렌도 그에 못지않게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러길 바랐다!”
“헛된 바람이셨네요, 그럼. 궁지에 처한 이를 돕지는 못할망정 이런 구렁텅이에 넣으시다니요. 일레인이……!”
펠릭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미웠다. 일레인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그러나 미운만큼 가여웠다.
자욱한 수증기 사이로 슬픔에 떨던 눈동자와 머리칼에 향유를 바르던 손길에 담겼던 진심이 너무 가여웠다.
“모두 벌을 받으실 거예요. 일레인에게 저지른 잔혹한 일에 대해, 대가를 치르셔야 할 것입니다.”
“최종 결정을 내린 건 일레인이야.”
“일레인과 크라몬드 백작가도 저를 버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해싱턴 가문도 마찬가지고요. 그 말씀 드리러 왔습니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도록, 저의 행보를 지켜보시길.”
그렇게 통보하고 펠릭스는 떠났다.
그 후, 펠릭스는 브리티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펠릭스가 실질 오너인 골든우즈 투자사는 종전대로 아메리카인 헨리 아셔가 대리인으로 총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펠릭스가 복수의 행보를 착착, 가차 없이 밟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든우즈 투자사는 해싱턴 공작과의 합작 투자를 청산하기를 요청해왔다.
“지분을 다 인수하거나, 아니면 다 팔라니? 갑자기 이러면 인수 대금을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헨리?”
골든우즈 사가 보유한 각종 회사채와 탄광 등의 투자 지분은 전도가 유망했다. 묵혀만 두면 3년 내로 두 배에서 세 배도 넘게 오를 것이 확실한데 다 팔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다 사들일 대금도 물론 없었다. 있다고 하여도 다 사들이고 나면 펠릭스가 그 회사채 가격을 그냥 두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원래 주식과 채권 시장은 소문에 움직이고, 펠릭스는 소문을 만들어 낼 실력과 인맥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냥 다 파시지요, 공작 각하. 운용할 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앉은 헨리 아셔는 다 팔길 재촉하였다.
“펠릭스는 어디 있나? 내가 한 번 펠릭스를 보고…….”
“어허, 공작 각하는 참 간도 크시오. 감히 어떻게 펠릭스 님을 본다고 하시오?”
해싱턴 공작은 모든 지분을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름 유망하다는 회사를 골라 주식이나 채권을 사들였다.
당연하게도 공작이 사는 주식과 채권은 그 다음 날부터 무섭게 가격이 떨어졌다. 해싱턴 공작가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무섭게 줄어들었다.
재산이 줄어드는 건 해싱턴 공작가뿐이 아니었다.
펠릭스는 골든우즈 사가 보유한 크라몬드 상사의 지분 오십 퍼센트를 팔아 치우지 않으면서도, 펠릭스 개인 자격으로 사들인 크라몬드 상사 회사채의 기한 연장을 거부했다.
“아셔 씨, 회사채를 도로 사들일 자금이 저희에겐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한 돌 겨우 된 꼬꼬마 크라몬드 백작을 대리하여 재산을 관리하는 게인즈 씨가 애원했지만, 돌아온 건 싸늘한 거절이었다.
“회사채를 사들일 자금이 없으시면, 대신 주식을 내놓으시지요. 시중가로 넉넉하게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크라몬드 상사의 주식을 오십 퍼센트 가량 소유하고 있던 조지 크라몬드는 6개월 짧은 기간에 이십 퍼센트나 헐값에 팔아 치웠다. 그래서 크라몬드 백작가는 현재 크라몬드 상사의 지분을 삼십 퍼센트밖에 가지고 있지 못했다.
회사채 만기를 연장하지 못해 사들여야 한다면, 또 지분을 십 퍼센트 가까이 펠릭스에게 넘겨야 한다.
절망한 게인즈 씨는 일레인을 찾아왔다.
펠릭스가 떠난 후, 일주일을 꼬박, 펠릭스의 체취 가득한 방 안에서 현실과 비탄의 경계를 오가며 죽지 못해 살았다.
그렇지만 끝까지 펠릭스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방을 청소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세상이 이대로 허물어지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일주일 가까이 물 한 모금 못 넘긴 일레인도 결국 죽지 않았다.
“돌아가지. 펠릭스가 움직이기 시작해서, 대처를 해야 할 것 같소.”
해싱턴 공작이 재촉한 후에야 일레인은 겨우 몸을 일으켜 쇠약해진 상태로 루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루덴 중심가에 있는 해싱턴 공작의 저택에서 안나와 집사장 닐 카오르의 보살핌 아래 점차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펠릭스는 영영 떠났다.’
슬픈 자각이 찾아올 때마다 일레인은 눈과 몸에 새겨 넣은 펠릭스를 화폭에 옮기며 슬픔을 이기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절망이 너무 깊어서일까. 몸은 점차 회복되는데 몸에서 음식을 받지 않았다.
평소 잘 먹던 생선 구이의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제 모든 음식 냄새가 참을 수 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레인, 너 혹시……?”
계속 몸이 아프다는 일레인을 찾아왔던 엄마 바이올렛이 미심쩍게 물었다.
“아이 가진 거 아니니?”
아이라니.
“아, 정말 그러고 보니 마님, 그간 달거리를 한 번도 안 하셨잖아요.”
리스본에서 돌아온 지 벌써 석 달째, 달의 주기에 맞춰 규칙적으로 이어지던 달거리가 그간 한 번도 없었다.
‘아이라니! 펠릭스의 아이라니!’
일레인은 순간 강렬한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펠릭스의 분신이 몸속에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살아갈 용기와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펠릭스의 아이로 인정받지 못하고 해싱턴 공작가의 아이로 자라나게 될 생각을 하자 깊은 슬픔이 몰려왔다.
‘그를 닮은 아이를 낳아, 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데.’
아이는 영영 아버지를 모른 채 살아가야 할 터이고, 아이를 볼 때마다 일레인은 펠릭스를 그리워 할 것이다.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심정을 품고, 일레인은 일단 바이올렛과 함께 크라몬드 백작가로 돌아왔다. 백작저의 요리사 노아 부인이 해 준 음식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겨우 음식을 목에 넘길 수 있게 된 4월, 게인즈 씨가 찾아왔다. 회사채 대금을 지불할 수 없는 사정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네가 아셔를 만나 좀 사정해 보면 어떻겠니? 펠릭스는 아마 유럽 어디나 아예 신대륙에 가 있는 것 같은데 헨리 씨는 평소 너를 아꼈으니 사정을 좀 봐주지 않겠니?”
그러나 일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원래 작년부터 채권 이자 지급이 어려웠는데, 펠릭스가 인수해 1년 동안 유예해 준 거였잖아요. 앞으로도 상사의 어려움이 나아질 기미가 없고, 우리쪽 크라몬드 상사도 더 버틸 여력이 없을 거예요. 그냥 지분을 넘기세요, 존.”
엄마 바이올렛도 동의한 일이었다. 펠릭스가 느낄 배신감이 얼마나 클지 공감해서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가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