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펠릭스가 왔다
아이덴 항에 도착했지만, 풍랑이 심해 바로 출항할 수 없었다.
“근처 호텔을 잡아 두었소, 일레인.”
해싱턴 공작이 말을 마치고 바로 마차를 돌리려 했다.
“잠시만, 잠시만 바다를 보고 싶어요.”
일레인이 말하자, 해싱턴 공작은 물끄러미 일레인을 응시했다.
“브리티나를 벗어나기 전까지, 아니 벗어나서도 세간의 이목은 주의해야 하는데. 여왕의 눈들이…….”
“알아요. 다만 가슴이 답답해 숨을 좀 쉬고 싶어요.”
공작과 둘이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숨이 막히도록 답답했다.
일레인은 공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잡이를 스스로 당겨 문을 열었다.
“매튜!”
공작이 안에서 소리치자, 마차 뒤에 서 있던 시종 하나가 발받침을 가져다 놓아주었다.
일레인은 마차에서 내려 천천히 항구로 걸어갔다. 심한 풍랑에 배들이 요동을 치며 위태롭게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가까운 바다도 이렇게 파도가 심한데.
일레인은 보이지도 않는 저 남동쪽으로 멀리멀리 시선을 주었다.
‘하나님, 펠릭스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게 보살펴 주세요. 그에게 미칠 바다의 노여움이 있다면 모두 내게, 내게 주세요.’
이 기도를 위해 일레인은 마차에서 내린 거였다.
차가운 진눈깨비가 사정없이 망토 깃을 파고들어 목덜미를 쓰리게 적셨다.
간절한 기도를 마친 일레인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그대의 기도가, 하늘에 닿길.”
일레인이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기도하던 모습을 마차에서 지켜보았던 해싱턴 공작이 손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일레인은 손수건을 받아 젖은 얼굴과 목을 닦았다.
두 사람은 집사 닐이 잡아 둔 오션 파라다이스 호텔의 스위트룸에 들었다.
곧 저녁 만찬이 마련되었다. 레몬 즙을 뿌린 굴과 버터와 향신료를 넣어 구운 바다가재 등 각종 해산물 요리가 진한 풍미를 풍기며 놓였지만, 일레인은 대합이 들어간 스프만 몇 스푼 들고 말았다.
진짜 서번트라도 되는 양 정중하게 식사 시중을 들던 해싱턴 공작의 연인 닐 카오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배 고프슬거구요, 내일 바다 출렁거르믄 또 멀미해서 더 배고프구요.”
서툰 발음이지만 일레인을 걱정하는 마음은 진실하게 느껴졌다.
“…먼저 올라가서 좀 쉬는 것이 나으려나, 일레인?”
공작이 먼저 일레인을 배려해 주었다. 일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닐이 빼준 의자에서 일어서다가 다시 공작을 보았다.
“침실 준비, 해 놓겠습니다.”
“……?”
일레인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몰라 의아한 눈빛을 했던 공작이, 으흠, 고개를 끄덕였다.
침실로 돌아온 일레인은 안나의 시중을 받아 두꺼운 벨벳 드레스를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준비해 놓았어요, 아가씨. 저기 협탁 위에.”
묵묵히 잠옷을 입혀 주고, 머리를 풀어 빗겨옆으로 땋아 준 안나가 협탁 위 작은 은제 상자를 가리켜 보였다.
“안나, 고마워. 가서 쉬어.”
일레인은 안나를 물리고, 등의 불까지 끈 채 침대 위에 누웠다. 윙윙 바람이 울부짖고 유리창을 덜컥거리는데, 짐승의 털이 푹신한 침대는 포근했다.
‘지중해 쪽은 괜찮겠지.’
펠릭스가 오고 있을 해로를 그려 보다가 일레인은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딸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등불 빛이 나타났다. 잠옷 위에 양털로 짠 가운을 입은 해싱턴 공작이었다.
“그대로 누워 있게.”
해싱턴 공작은 협탁 위에 등을 놓고 일레인 곁에 누웠다.
침대가 출렁이며 가라앉자 일레인의 마음도 덩달아 저 아래 심해까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여왕의 눈을 먼저 배려해 줘서 고맙네, 일레인.”
“…우린 좋은 동맹군이니까요.”
“동맹군…….”
어둠이 실체적인 무게를 가지고 몸을 짓눌러 오는 느낌이었다.
“신혼의 첫날이니, 아무래도 새벽까진 있어야 할 거요. 편하게 잡시다.”
그렇게 말한 공작이 먼저 등을 보이며 옆으로 누웠다.
일레인도 몸을 옆으로 돌렸다. 덜컹거리는 유리창 밖의 어둠은 짙고도 짙었다.
다음 날, 공작이 일어나 침실을 빠져나간 다음, 일레인은 하얀 시트를 침대 위에 깐 후 안나가 마련해 준 함을 열었다. 안에는 얼음 위에 천에 싸인 돼지 간이 놓여 있었다.
일레인은 함 째 들어 침대로 와 시트 위에 피를 뿌리고, 입고 있는 잠옷의 뒤에도 피를 묻혔다. 그리고 설렁줄을 당겨 안나를 불러들였다.
“피가 갈색으로 굳어야지요, 아가씨.”
“마님.”
“아, 마님! 차 한 잔 준비할까요?”
“그래, 안나. 너도 함께 마시자.”
일레인은 잠옷을 벗고 나서 간편한 실내복 드레스로 갈아입은 후 의자에 앉았다. 이제 여왕의 개들이 호텔에 심어 놓은 염탐꾼들에게 보일 혼인 성립의 증거도 마련했으니, 출항을 기다리면 되었다.
닷새 후, 일레인과 해싱턴 공작은 리스본 항에 도착했다.
신혼여행 숙소로 마련된 고급 빌라는 리스본 항구와 저 먼 바다까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성모상 근처에 있었다.
“펠릭스는 닷새나 엿새 후에 도착할 거란다, 일레인.”
빌라에 도착한 날, 오후 내내 잿빛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바다를 그리고 있는 일레인을 향해 해싱턴 공작이 말했다.
펠릭스가 온다.
드디어 그 사람이 온다. 나는 이미 해싱턴 공작 부인이 되었는데. 나를 등대 삼아 돌아오겠다던 이가 드디어 온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어떻게 펠릭스의 눈을 봐야 할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 막막한 마음을 일레인은 화폭 위에 펼쳐 놓았다. 사납게 일렁거리는 파도 위에 금세라도 침몰할 듯 위태롭게 출렁거리는 범선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펠릭스가 오기로 되어 있는 1월 10일 즈음,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쳤다.
바다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절대 펠릭스를 무사히 돌려주지 않을 것처럼 일레인을 을러댔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포르타스 광장에 서서, 일레인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펠릭스만 무사히 귀환하게 해 주신다면, 저는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제발 펠릭스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성모 마리아여, 돌봐 주세요.”
일레인의 기도가 통했는지 다음날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져 있었다.
항구에 마중을 나가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한 일레인에게 해싱턴 공작이 말했다.
“항구에서 성 마틴 성당이 있는 골목길 맨 안쪽에 조그만 빌라를 마련해 놓았다. 하룻밤 보내기에 아늑할 게다.”
하룻밤.
펠릭스와 보낼 처음이자 마지막 밤.
흰 담비 망토를 쥐는 손이 덜덜 떨렸다. 보다 못한 공작이 망토 깃을 여며 주고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의연하게 견디길, 바란다.”
일레인은 고개를 들어 공작의 눈을 직시하였다. 펠릭스의 눈동자와 똑같이 검푸른 눈동자가 세월의 흔적을 담고 일레인을 마주 보았다.
“…….”
일레인은 돌아섰다.
명목상 남편인데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부인의 옷깃을 여며 주는 남편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하긴, 다른 이도 아닌 외삼촌과 결혼해 놓고 옛 연인을 마중하러 가는 나만큼 웃긴 인간이 또 있을까.
그러나 참담한 마음 아래로 기쁨이 수런수런 속삭여 대었다.
‘펠릭스가 온다. 펠릭스가 온다. 나의 펠릭스가 온다.’
나의 펠릭스로 돌아와 곧 처절한 배신감을 곱씹으며 남의 펠릭스가 될 내 연인이 온다.
일레인만큼이나 손을 떨어 대는 안나의 시중을 받으며, 일레인은 펠릭스가 선물했던 옷 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하늘빛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흰 담비털 망토를 입고, 안나와 함께 항구로 향했다.
두 개의 배가 그려진 크라몬드 상사의 깃발을 단 배는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오가는 많은 사람들과 뱃사람들의 거친 눈길과 비속한 농담 속에서도 일레인은 꿋꿋하게 사륜마차에 앉아 펠릭스를 태운 배가 오길 기다렸다.
“아가씨, 바람이 찬데요. 거처에 가서 기다리세요. 여긴 길버트한테 지키라고 하고.”
몸을 덥히기 위해 가져왔던 손난로와 뜨거운 물주머니도 이미 차가워진 지 오래. 시퍼렇게 얼어붙은 입술로 안나가 일레인에게 권했다.
“이렇게 기다릴 수 있는 것도, 다행이야.”
기다릴 자격만 된다면, 평생이라도 기다릴 수 있어.
웃는 얼굴이 더 슬퍼서 안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크라몬드 상사의 범선은 오후 세 시 넘어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깃발이 보이기 시작하자 일레인은 배가 항구에 정박하기까지 한 시간은 걸릴 수 있다는 말에도 항구의 높은 곳에 가서 섰다.
가슴이 둥둥 북치듯 뛰고, 기쁨과 슬픔이 강렬하게 혼재된 감정 때문에 입술을 계속 우는 듯 웃는 듯 파르르 파르르 떨렸다.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 펠릭스를 보고 싶은 마음과, 아직 헤어지지 않은 이 시간이 차라리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일레인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 드디어 선착장에 거대한 범선이 들어오고, 우르르 서너 명이 먼저 내리기 시작했다.
일레인은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살폈다. 오늘의 재회를 위해 세심하게 골라 입은, 웨딩드레스처럼 희디흰 망토에, 펠릭스가 보내 준 청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었다.
“안나, 절대 티를 내어서는 안 돼. 알겠지?”
다시 한번 다짐을 받은 일레인이 빠른 걸음으로 마중을 나갔다.
심장이 먼저 펠릭스를 알아보았다.
오랜 항해를 거쳐 오면서 바닷바람에 찌든 머리와 추위를 막기 위해 검은 모피로 꽁꽁 온몸을 감싼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는데, 일레인의 심장은 그중 가장자리에서 큰 키 때문에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사내를 향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펠릭스!”
비명처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펠릭스가 고개를 돌렸다.
“…일레, 인?”
“펠릭스!”
일레인은 펠릭스를 향해 달렸다. 너무 급한 마음에 망토 자락이 전날의 눈비로 질척해진 바닥에 더렵혀지든 말든, 드레스 자락에 발이 걸려 넘어지려 휘청이든 말든.
일레인은 온 힘을 다해 펠릭스를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