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88화 (88/112)

#제88화. 네가 없는 나의 결혼식

크리스마스가 닷새 남은 날이었다.

아빠 윌슨 백작이 돌아가신 후 반 년이 지난 지금, 일레인은 백작의 관 앞에서 맹세한 일들을 모두 이뤄 냈다.

혼인 무효화가 철회되면서 엄마는 백작 부인의 작위를 되찾았고, 유복자로 태어나 넉 달째 접어든 남동생 아서도 한 살이 되는 생일날 크라몬드 백작 작위를 승계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루덴 탑 지하에 갇힌 조지는 새해가 되면 성난 군중의 돌세례 속에서 목이 매달릴 것이다.

그리고 다이앤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 사람을 풀었으니 조만간 찾아내 죄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해싱턴 공작 또한 이뤄야 할 일을 절반은 성취했다.

해싱턴 공작은 일레인과 약혼을 하면서 동성애자 처벌법인 소도미 법을 피했고, 또한 일레인이 가문을 되찾는 과정을 측면에서 지원하면서 반여왕파 귀족 세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이제 두 사람의 결혼으로 동맹의 완성을 증명해야 할 때.

일레인은 바이올렛의 거처 앞에 서 있었다. 사흘 뒤 있을 해싱턴 공작과의 결혼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간 바이올렛은 조지 크라몬드가 남편 윌슨을 살해했다는 것과, 그런 조지를 따라 다이앤이 백작 저에 거주해 왔다는 것만 알았을 뿐 나머지 소식은 전혀 몰랐다.

아서를 키우는 데만 전념할 수 있도록 일레인과 샬럿이 철저하게 시종들의 입을 단속했기 때문이다.

바이올렛은 아서가 4개월이 될 때까지 한시도 옆에서 떼어 놓지 않고 정성으로 키웠다. 다만 일레인 몰래 큰딸 다이앤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정도였다.

덕분에 바이올렛은 이 모든 일을 위해 일레인이 무엇을 겪어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결혼식까지 엄마 몰래 올릴 수는 없어서, 사흘 남겨 두고 일레인은 엄마의 거처에 온 거였다.

“보리스 부인, 아서를 앨리 유모에게 데려다주시겠어요?”

아이 정서에 좋다는 탠저린 향이 물씬 풍기는 엄마의 거처에서 일레인이 말했다.

아서를 무릎에 앉히고 흥얼흥얼 엉터리 곡조의 노래를 불러 주고 있던 바이올렛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일레인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보고 순순히 아서를 보리스 부인에게 넘기고, 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저, 사흘 후에 결혼해요, 엄마.”

“응?”

아름답게 각이 진 옅은 갈색의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던 바이올렛의 얼굴이 환해졌다.

“펠릭스가 오는구나. 1월 말이나 되어야 오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아, 혹시나 해서 웨딩 베일에 달 레이스를 떴거든. 진주알만 달면 되니까, 어서 수잔을 불러서…….”

흥분해서 일어서는 바이올렛의 손을 일레인이 꾹 잡아 도로 앉게 하였다.

“리처드 해싱턴 공작이랑 결혼하는 거예요, 엄마.”

리처드 해싱턴 공작.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곱게 눈을 흘겼다.

“무슨 그런 기분 나쁜 농담을 하고 그러니, 일레인? 네가 왜 그 늙다리 남색가랑 결혼을 한다고.”

“…….”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던 바이올렛은 계속 침묵하는 일레인을 보자, 차차 혈색을 잃었다.

“아니라고, 농담이라고 해야지, 일레인.”

농담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부질없는 바람 따위는 무시하며, 일레인은 바이올렛의 손을 잡았다.

“…농담 아니에요, 엄마. 조지를 몰아내고 아서에게 백작 작위를 되찾아 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

이번에는 바이올렛이 침묵했다. 일레인을 바라보는 푸른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이 애원했다.

“작위 없어도 된다, 일레인. 펠릭스는 심지어 사생아였는데도 훌륭하게 컸잖니. 그러니까 백작 작위를 동생에게 찾아 주기 위해 해싱턴 공작하고 결혼할 필요 없어.”

엄마가 그런 말을 진작에 해 주실 상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엄마께 허락을 구하기 위해 말씀드리는 거 아니에요. 이미 결혼을 전제로 해싱턴 공작과 많은 일을 이뤘어요. 사흘 후 결혼하고 곧바로 리스본으로 갈 거예요.”

‘리스본’이라는 말에 바이올렛의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펠릭스를 만나러 가는 거니?”

“…….”

늘 눈물을 머금거나 부드럽게 빛을 내던 바이올렛의 눈동자가 파랗게 얼어붙었다.

“리처드와 엘렌이 네게 그것까지 요구하든? 가서 펠릭스를 만나 네 입으로 파혼을 통보하라고 하든? 기어이 펠릭스를 대공의 후계자로 만들겠다고 하든?”

가냘픈 바이올렛의 몸이 배신감에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이제야 모든 상황을 짐작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난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겠다. 그런 협잡으로 이루어진 결혼식에, 가고 싶지 않아!”

“엄마!”

그럴 수는 없다.

결혼식 자체는 루덴의 작은 교회에서 가족끼리만 진행한다. 그렇지만 결혼식 직후 정오부터 열리는 피로연에는 여왕은 물론 브리티나의 어지간한 귀족은 모두 참석할 예정이었다.

특히 보수파와 중도파의 귀족은 모두 참석해 마틸다 여왕에게 반여왕파가 얼마나 공고히 결합하였는지 과시하는 단합의 피로연이었다.

그런 결혼식에 단합의 한 축이 된 신부의 어머니가 참석하지 않는다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엄마, 아서를 위해서요. 아직 너무나 어려 엄마가 지켜 줘야 할 아서를 위해서 참석해야 해요. 그러니까 드레스와 장신구 미리미리 챙겨 두세요.”

“…….”

“엄마, 제발.”

“…미안하다, 일레인. 흐흑, 미안하다.”

바이올렛은 오래도록 흐느껴 울었다.

결혼식을 치르기까지, 시간은 한없이 느리게 흐르다 어느 순간에는 또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흘렀다.

결혼 피로연은 커다란 연회를 여러 번 주최한 샬럿이 맡았다. 장소는 해밀턴 공작이 소유한 루덴 중심가의 대저택이었다.

해밀턴 공작과 일레인은 결혼식 피로연이 시작된 후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아이덴 항으로 가 리스본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날씨가 나빠 출항이 불가능하면 아이덴 항 바로 옆의 호텔에 묵으면서 바다가 잠잠해지길 기다리기로 했다.

드디어 결혼식 날이 밝았다.

일레인은 안나와 다른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장미꽃 향이 진동하는 물로 목욕을 하고, 분홍색의 화려한 새틴 웨딩드레스를 입고 교회로 갔다.

리처드 해싱턴 공작은 흰색 셔츠에 검은색 결혼 예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일레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모부 해밀턴 후작의 팔에 손을 올리고 교회의 통로를 걸어 해싱턴 공작에게 다가설 때, 후작이 속삭였다.

“일레인,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도 좋다. 나와 샬럿은 언제나 네 편이다.”

오른편에 앉은 샬럿 고모와 엄마 바이올렛은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일레인은 현실감 없이 멍한 느낌이었다. 영혼은 저 혼자 빠져나가 펠릭스가 있는 푸른 바다 위를 갈매기처럼 날아다니고, 몸만 여기 교회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후작에게서 일레인의 손을 넘겨받을 때, 해싱턴 공작이 속삭였다.

“일레인, 우린 좋은 동지가 될 거요.”

좋은 동지.

두 사람은 최고의 배우처럼 속내를 숨기고 활짝 웃으며 신성한 혼인 서약을 하고, 피로연에서 하객에게 함께 인사를 했다.

해싱턴 공작은 끊임없이 귀족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오는 쟁쟁한 귀족들의 태도가 해싱턴 공작이 이제 브리티나 귀족의 핵심 권력자임을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여왕은 꽃분홍색 웨딩드레스를 아름답게 차려입은 일레인을 무감한 눈길로 훑었다.

“사랑 없이 결혼하면 결국 결혼 밖에서 사랑을 찾게 되지. 해싱턴 공작 부인.”

일레인이 무릎을 굽히고 여왕께 예를 표했을 때, 마틸다 여왕이 속삭인 말이었다.

“대개의 결혼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전하? 전하의 왕실 생활도 그러하신 걸 보니 말입니다.”

더 신랄한 말로 받아쳤지만, 일레인은 격식을 갖춰 화를 내는 자신의 모습도 다른 이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온통 현실감 없이 멍했다.

귀족 부인들은 모두 일레인에게 지극히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일레인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주 침착하고 그럴 듯하게 막 결혼한 공작 부인 노릇을 해냈다.

광대뼈가 뻐근하고 입술 가장자리가 떨릴 정도로 활짝활짝 웃으면서 새로 얻은 공작 부인의 작위에 만족해하는 것처럼 가장했다.

인사를 마치고 이제 항구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짐은 이미 네 개의 커다란 짐마차에 실려 있었다.

샬럿 고모는 말없이 일레인을 꽉 안아 주기만 했다. 눈물을 참기 위해 하도 깨물어서 입술이 벌겋게 부어오른 바이올렛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다가 뒤에 사각의 가죽 트렁크를 들고 서 있는 보리스 부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보리스 부인이 일레인 앞으로 다가왔다.

“이거, 부인께서 아가씨, 아니 공작 부인을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따로 실어 둘 터이니 리스본에 도착하자마자 꼭 풀어 보세요.”

“예, 고마워요. 엄마와 아서를 잘 부탁해요, 보리스 부인.”

일레인은 부인과 살짝 포옹하고, 그리고 바이올렛에게로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깊게 껴안았다.

“엄마, 너무 떨지 마세요. 나, 잘 할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도 아서 잘 키우고요.”

“그래, 일레인. 미안하다.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너 힘들면.”

오래 전에 들었으면 좋았을 말을 뒤늦게야 듣게 되었지만, 그리고 다시 돌아올 일도 없지만 위로가 되는 인사였다.

“일레인, 미안하다.”

뒤에 홀로 서 있던 창백한 안색의 엘렌이 다시 한번 사과했다. 일레인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해싱턴 공작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어색한 침묵이 마차 안에 흘렀다.

아빠와 펠릭스를 제외하고 성인 남성과 이렇게 가까이 단 둘이 있어본 적은 처음이라, 일레인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았다.

“그냥, 나를 윌슨 대신이라고 생각하거라, 일레인.”

진짜로 아빠라도 된 것처럼 해싱턴 공작이 편한 어조로 말을 놓았다.

“우린 정상적인 부부는 아니지만 아주 신의 있는 동지는 될 테니까.”

“…그럼 저는 아주 든든한 후견인을 얻은 걸로 생각하겠습니다.”

덜컹덜컹, 공작가의 화려한 사륜마차가 언 땅 위를 달린다. 소리는 요란하지만 흔들림이 거의 없도록 지어진 마차 안에서 일레인은 눈을 감았다.

펠릭스, 네가 없는 나의 결혼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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