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가엽슨 사랑이니께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각하.”
단 하룻밤이라도 그에게 모든 걸 다 주고, 모든 걸 다 받고 싶다. 그렇게 새겨진 그의 체온과, 그의 체취와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나머지 생을 살아갈 힘을 얻고 싶다.
“…….”
해싱턴 공작은 물끄러미 일레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공작의 머릿속이 조금 복잡했다. 여왕 측에선 이 결혼이 정략적 결합인 증거를 찾아내 무효화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켤 것이다.
그런데 일레인이 비록 먼 곳이지만 리스본에 가 펠릭스와 밤을 보낸다라. 모두가 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이 민감한 시기에. 아무리 따져 보아도 득될 것 없는 제안이었다.
그건 안 된다고, 그 하나로 여왕을 허수아비로 만들려는 계획도, 너희 가문을 되찾는 일도, 펠릭스를 마트비아의 대공으로 세우려는 계획도 모두 엉망이 되어 버릴 수 있다고 거절하려는 순간이었다.
옆에 그림처럼 서 있던 그의 연인 닐 카오르가 조용히 공작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그르케 해 주어요, 리처드. 가엽슨 사랑이니께.”
‘가여운 사랑.’ 가엽고 기구하긴 하지.
자신이 목숨보다 아끼는 연인이 청하자, 공작의 마음이 비로소 누그러졌다.
“신혼여행으로 위장해서 가자꾸나. 같이 마중을 나가되, 펠릭스 귀에 우리가 혼인한다는 사실이 안 들어가게 미리 조치해 두겠다. 밤을 보낸 후, 네가 그 아이에게 냉정하게 통보를 하도록. 펠릭스가…….”
‘그대로 물러날지 잘 모르겠지만.’ 이라는 말을 하려다, 공작은 도로 삼켰다.
해싱턴 공작이 겪어온 조카 펠릭스는 필요할 땐 필요한 만큼 무자비하게 냉혹해지는 사내였다.
젊은 혈기 왕성한 조카가 하룻밤을 보낸 여인이 다른 이도 아닌 외삼촌과 혼인하였고, 너는 사생아라서 안 된다고 하면…….
휴우.
화가 날 때면 북해의 얼음처럼 검푸른 빛을 내뿜는 눈동자가 떠오르자, 잘한 결정인지 새삼 회의가 들었다.
그렇지만 공작 자신에게도 일레인에게도 이제 돌아갈 길은 없었다.
공작은 피식,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인생은 이렇게나 잔혹하다. 뭐 하나를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걸어야 하는, 계산이 명확한 판이 바로 인생.
“그럼 1월에 리스본에 가겠습니다.”
그렇게 잔혹한 만남을 위해 가야 하면서도 설레는 마음 한 자락만은 끝내 감추지 못하는 일레인을 공작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인 11월의 첫날.
해싱턴 공작은 여왕을 만나기 위해 케싱 왕궁의 알현실에 들었다.
여왕은 최근 발생한 모든 일의 배후가 해싱턴 공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대놓고 자신에게 반기를 든 해싱턴 공작이 다른 이도 아닌 일레인 크라몬드, 아니 지금은 사생아가 된 것과의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알현을 청한 것이다.
당장이라도 공작을 베어 죽이고 싶은 증오를 감추며 여왕은 옥좌에 길게 몸을 기댔다.
“귀천상혼에 있어 우리 브리티나가 대륙보다 느슨하다고는 하나, 해싱턴 가문은 유서 깊은 공작 가가 아닙니까? 하필 사생아를 들고 와 혼인을 허락해 달라니요? …아니면, 그 사생아가 남다른 공작의 그쪽 취향을 딱 맞추기라도 한답니까?”
“…….”
빈정대는 여왕의 말에도 해싱턴 공작은 표정의 변화 없이 여전히 우아하게 서 있기만 했다.
“하긴 그 어미도 그런 꼴을 당하고도 윌슨 크라몬드 백작을 유혹했었으니, 그 사생아도 제 어미를 닮아 그쪽에 워낙 탁월한 것인가요?”
여왕이 부러 상스러운 말로 공작을 자극했다.
“…….”
해싱턴 공작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한심하다는 듯 싸늘한 눈빛으로 여왕을 마구 질책했다.
‘흥. 불충한 무리들의 중심에 서서 권력을 쥐게 되었으니, 이제 나를 주군으로도 취급하지 않겠다는 건가.’
최근 일로 심기가 불편하던 여왕은 쉽게 이성을 잃었다.
“노리개로 취하세요. 그 사생아는 벌써 그대의 조카랑 꽤나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데, 외삼촌이 되어 조카의 여인과 정식 혼인을 올리다니요? 이 나라 도덕이…….”
“사적인 애정 생활에 있어서 전하께서 도덕 운운하실 처지는 아니시지 않습니까?”
해싱턴 공작이 덤덤하게 여왕의 말을 잘라 들었다.
늘 깔끔하게 고양을 갖추던 공작에게서 이런 직설적인 말이 나올 줄이야.
모욕을 당한 여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 무엇이?”
“그만하시지요, 전하. 정적에게만 적용하는 편협한 도덕률로는 더 이상 이 나라 귀족을 제어하실 수 없습니다.”
해싱턴 공작은 당당하였다. 일레인과의 약혼으로 공식적으로는 남색 혐의를 벗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 리처드, 그대는 예나 지금이나…….”
불경하기 짝이 없구나.
여왕이 노성을 터트릴 때였다.
무엄하게도 알현실 밖에서 ‘전하, 급보입니다!’ 하는 외침과 함께 허락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리고 시종장이 들어왔다.
‘일레인이 시작하였군.’
해싱턴 공작은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시종장이 보고를 올릴 수 있도록 우아하게 몸을 비켰다.
“고 윌슨 크라몬드 백작의 사생아 일레인이 크라몬드 백작의 죽음에 관해 재조사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무어라!”
“또 윌슨 크라몬드 백작과 그의 어미 바이올렛 템슨과의 혼인 무효화 판결을 취소해 달라고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
여왕은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해싱턴 공작에게 눈을 돌렸다.
“이걸 노린 겐가, 해싱턴 공작? 정교하게 덫을 쳐놓고 오늘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전하께서 윌슨 크라몬드에게 덫을 놓는 걸 방관하신 것처럼, 저 또한 저의 애처로운 약혼녀가 정당한 권리를 되찾는 것을 응원할 뿐입니다.”
이제 결정은 네 몫으로 던져졌다는 듯, 해싱턴 공작은 우아하고도 여유롭게 여왕의 답을 기다렸다.
밖에서 와 하는 함성과 함께 군중의 성난 외침이 왕궁을 뒤흔들었다.
“재조사를 허락하라! 혼인 무효화 판결을 철회하라!”
지금으로부터 30분 전, 해싱턴 공작이 여왕의 알현을 위해 입궁할 때, 일레인도 왕궁 앞에서 외치기 시작했다.
“고 윌슨 크라몬드 백작의 여식 일레인, 아버님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재조사를 요구합니다! 윌슨 크라몬드와 바이올렛 템슨의 혼인이 무효라는 판결의 철회를 요청합니다!”
온통 새하얀 눈발 속에 갈색의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어린 영애의 모습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요새 한참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크라몬드 백작 가라니!
호기심과 연민을 동시에 느낀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일레인을 둘러쌌다.
일레인은 더욱 힘을 내 다시 온 힘을 다해 외쳤다.
“크라몬드 백작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의 재조사를 요청합니다! 선대 크라몬드 백작 부부의 결혼 무효화 판결 철회를 요구합니다!”
그러자 일레인이 군중 속에 미리 숨겨둔 이들이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크라몬드 백작 피살 사건 재조사를 요청합니다! 백작 부부 결혼 무효화 철회를 요구합니다!”
군중은 쉽게 분위기에 휩쓸렸다.
그렇지 않아도 윌슨 백작의 죽음에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여왕의 허가로 너무나 쉽게 백작 작위를 이어받은 조지 크라몬드는 신께서 진노할 음탕한 행각을 벌이고 있다.
10분도 되지 않아 다른 이들도 함께 재조사와 혼인 무효화 철회를 외치기 시작했다.
군중의 목소리는 금세 커지고 커져 왕궁을 뒤흔들 정도가 되었다.
아아.
일레인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눈물은 금세 얼어 서걱거리는 얼음이 되어 일레인의 턱 끝에 매달렸다.
“아가씨, 이거라도 좀 들고 계세요.”
추운 날씨에 새파랗게 질린 모습을 보다 못한 안나가 미리 작은 석탄 두 덩이를 넣은 법랑 손난로를 일레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 펠릭스가 돌아온다는 편지와 함께 보내온 색색 덩굴무늬 도자 손난로였다.
얼어붙었던 손끝이 사르르 풀렸지만 마음은 타는 듯 쓰리고 괴로웠다.
부모님의 명예를 되찾고, 남동생 아서에게 백작의 작위를 되찾아 줄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지만, 기쁨만큼이나 짙은 슬픔이 영혼을 태웠다.
그래도 울지 않는다. 이제 더 이싱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일레인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외쳤다.
“크라몬드 백작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의 재조사를 요청합니다! 선대 크라몬드 백작 부부의 결혼 무효화 판결 철회를 요구합니다!”
커지는 소란에 붉은 제복을 위엄 있게 차려입은 왕실 근위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레인은 들어라. 왕께서 재조사를 재고하실 수도 있으니 소란 그만 피우고 돌아가라!”
성도, 영애란 존칭도 붙이지 않고 평민을 대하듯 고압적인 태도였다.
“영애다! 시종장은 사과하라!”
군중 속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왕실 정문이 활짝 열리며 두두두 땅 울리는 소리와 함께 기마병이 쏟아져 나왔다.
금세라도 발굽으로 짓밟을 듯 달려오는 기마병의 기세에도 군중들은 주눅 들지 않았다.
“음탕한 탕녀의 개가 가여운 백성을 물려 한다!”
누군가 군중 속에서 선동적 어구를 외쳤다. 그러자 저절로 찌라시의 선정적인 삽화를 떠올린 사람들이 동조하여 외치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일레인은 재빨리 근위대장에게 다가섰다.
“자칫 소요가 커질 수 있으니, 어서 재조사가 진행될 거라 외치세요, 경. 그래야 소요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근위대장은 나이답지 않게 품격이 몸에 밴 어린 여인을 바라보았다.
‘저 어린 여인이 곧 해싱턴 공작의 부인이 된다지. 여왕에게 불만을 가진 귀족들이 해싱턴 공작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고.’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인 처세를 가진 근위대장은 시종장에게 어서 여왕께 군중의 소요를 전하라고 재촉했다.
그래서 지금, 시종장이 알현실에 부랴부랴 든 거였다.
“재조사와 무효화에 대한 교회의 평결 재고를 할 것이라 전하라.”
점점 커지는 군중의 함성과 냉정한 공작의 압력 속에서 여왕은 마침내 일레인의 청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시종장이 다시 왕궁 밖, 일레인이 서 있는 곳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