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해싱턴 공작과 손을 잡고
“일레인!”
일레인과 윌리엄이 루덴의 해밀턴 후작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마중 나온 샬럿이 일레인을 껴안고 흑 울음을 터트렸다.
“아들이야, 아들. 크라몬드 백작 가의 후계자가 태어나셨어.”
일레인이 집을 비운 일주일 새, 바이올렛이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은 것이었다.
“…….”
샬럿은 기쁨에 들뜬 표정으로 우는데, 일레인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눈을 꽉 감았다.
“어머니, 먼저 의논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일레인을 대신해 윌리엄이 말을 꺼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윌리엄은 해싱턴 공작과 엘렌 페일른의 제안을 수락하려는 일레인의 결정에 맹렬하게 반대했었다.
“딸이면 어떻게 하려고, 일레인? 네가 그 변태 늙은이랑 혼인해서 조지를 제거했다 쳐. 그런데 태어난 아이가 딸이면? 그럼,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럼 어차피 백작 직위는 다른 방계한테 넘어가거나 아예 환수된다. 모욕에 대해선 자신이 직접 나서 조지를 납치해 살을 포 터서라도 주겠으니, 어차피 일레인의 되지 못할 백작 작위 따위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오는 내내 달리는 말 등 위에서 지치지도 않고 소리치는 윌리엄에게 내내 침묵하던 일레인이 도착 직전 어렵게 입을 뗐었다.
“동생이 태어난 후에, 결정할게.”
사실 일레인의 마음도 갈팡질팡이었다. 부모님과 가문을 위해 펠릭스를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가도, 다음 순간 도저히 포기하고는 살 수가 없을 것만 같아 가슴이 타들었다.
그래서 윌리엄의 설득을 핑계로 만약 동생이 여자아이라면, 그러면 펠릭스를 포기하지 않기로 겨우 마음을 정했었는데.
동생이 사내아이다.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일레인은 샬럿 고모와 해밀턴 후작에게 해싱턴 공작과 혼인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
“…….”
샬럿 고모와 해밀턴 후작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했다.
“저 씻고, 엄마랑 아기 보러 갈게요.”
일레인은 여전히 침묵한 채 눈을 맞추지 못하는 해밀턴 가 사람들을 남겨 두고 응접실을 나왔다.
“어머니, 저대로 둘 순 없다고요!”
울부짖는 윌리엄의 소리와,
“너는 입 좀 닥치거라. 지금 가장 속이 문드러지는 건 일레인이야.”
소리치곤 흐윽, 기어이 낮은 울음을 터트리는 샬럿 고모와,
“해싱턴 공작과 크라몬드 가문이 손을 잡는 건 필승의 전략이긴 하오.”
하는 냉철한 후작의 말이 등 뒤를 따라왔다.
“아가씨…….”
안나는 보자마자 일레인을 안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가문의 후계가 태어났으니 이제 정말 우리 아가씨는 빼도 박도 못하고 펠릭스 님과 혼인을 물러야겠구나. 이렇게나 서로에게 애틋한 연인이 헤어져야 하다니.
“어떻게 해요, 아가씨. 히잉, 우리 아가씨 가여워서 어쩌나.”
일레인은 안나의 울음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공작의 제안 따위는 모르는 가문의 시녀마저도 자신의 희생이 당연한 것이라고 가정하고 슬퍼한다.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일레인은 누가 봐도 가문과 부모님, 그리고 태어난 백작 가의 후계를 위해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안나, 뜨거운 물 좀 준비해 줄래? 씻고 아기 보러 갈 거야.”
“아! 내가 정신을 어따 두고! 예, 예. 곧 올리겠습니다.”
일레인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라벤더 향이 짙은 목욕물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머리를 감겨 주고, 피부에 두껍게 달라붙어 있는 흙먼지를 떨어내 준 다음 비누로 씻어 내는 안나의 손길 속에서 일레인은 까무룩 졸다가 깨다가 했다.
욕탕에서 일어서는 일레인의 얼굴은 평온했다.
펠릭스에 대한 애타는 연심은 이 목욕물 속에 다 놓아두고, 나는 이제 크라몬드 백작 가를 되살리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일레인은 화려하게 성장을 했다. 펠릭스가 선물해 준 하늘빛 새틴 드레스를 화려하게 차려입고, 바이올렛과 아기가 있는 별채로 건너갔다.
이제 막 사흘이 된 아기는 누가 보아도 아빠의 핏줄이었다. 일레인과 같은 짙은 갈색 눈동자가 제법 영민해 보였다.
일레인은 아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위태로울 정도로 작은 아가의 손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크라몬드 가문의 후계를 뵈옵니다.”
일레인의 말에 직접 젖을 물리고 있던 바이올렛이 쿡쿡 웃었다.
오랫동안 산고를 치른 바이올렛의 얼굴은 사흘이 지나도 여전히 퉁퉁 부어올라 평소의 고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검버섯 핀 얼굴로 가슴을 내놓고 아이를 안고 있는 바이올렛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아빠가 정말로 좋아하실 거야. 이제 마음 놓고 천국에서 휴식을 취하시겠지. 일레인, 내가 더 잘할게. 그간 못했던 엄마 노릇, 이제부턴 내가 제대로 할게.”
처음부터 잘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다이앤이 태어났을 때 사랑으로 돌보고, 저 태어난 후라도, 아니 세오드 성에서 펠릭스를 만나기 전에라도 엄마가 조금만 더 백작 부인다우셨더라면…….
그러나 이제 와 이런 원망이 다 무슨 소용인가.
“엄마 노릇, 정말 잘하셔야 해요. 조만간 조지를 제거하고 이 아이가 백작 작위를 물려받게 될 거에요. 그럼 엄마가 꼬마 백작님을 잘 지키셔야 합니다!”
일레인은 밝게 말하고 일어났다.
“왜, 벌써 가려고? 엄마 곁에서 좀 더 쉬지. 엘렌한테 편지 받아다 주느라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
“아, 엄마. 그 편지 제가 당분간 가지고 있을게요.”
마침 아기가 뭔가 마음에 안 든 듯 얼굴을 찡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고 등을 토닥이며 트림을 시켜 주느라 분주해졌다.
그 틈을 타 일레인은 바이올렛의 거처에서 나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열흘 후.
루덴의 귀족 사회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리처드 해싱턴 공작이 사생아로 전락한 전 백작가 영애 일레인과 약혼했다는 소식이 증권가 투자 소식지와 가십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그중 발행 부수가 가장 많은 켕캉 리치 지는 비탄에 빠진 가여운 영애를 위로하다 사랑을 느끼게 된 철 심장 해싱턴 공작의 러브스토리를 선정적으로, 길게 독점 보도하였다.
이 결합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건 온갖 비극과 막장적인 요소가 다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백작가 고귀한 영애의 위치에서 한순간 사생아로 전락한 아가씨.
더 충격인 건 일레인 크라몬드는 바로 해싱턴 공작의 외조카 펠리스 페일른의 연인으로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비극적 운명의 아가씨는 백만장자 조카를 버리고, 마음만 먹으면 귀족 권력의 정점에 오를 외삼촌을 선택한 거였다.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루덴의 모든 일들이 이 기막힌 막장적 삼각관계에 주목했다.
“이 무슨 개막장이랍니까? 그러니까 외삼촌이 조카가 없는 틈을 타 가여운 처지의 영애를 가로챈 꼴이 아닙니까?”
“제인 영애는 참 순진하시네요. 두 사람의 결합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습니까? 사생아 처지가 된 일레인 영애가 신분을 되찾기 위해 작정하고 공작을 꼬신 거지요.”
“어떻게 꼬셨을까요? 저도 그 비법을 좀 전수받았으면 좋으련만. 일레인이 해밀턴 후작가에 의탁하고 있다는데, 찾아가면 가르쳐 줄까요?”
“하, 앨리스 영애, 듣고 보니 그렇네요. 세상에 신처럼 아름다운 펠릭스 님의 사랑을 얻더니, 남색 취향인 삼촌까지 유혹한 영애라니! 대체 무슨 재주일까요?”
“아유, 저는 어제 안톤 영식과 진지하게 만나 보려던 계획을 다 철회했답니다. 펠릭스 님이 오실 테니까요!”
“꺄아! 맞아요. 드디어 우리도 멋진 에로스 님의 눈길을 받을 수 있어요. 아, 황홀해라. 저는 그날, 온갖 꽃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음 짓던 펠릭스 님 꿈을 매일매일 꾸고 있답니다!”
미혼의 철부지 귀족 영애들은 이렇게 떠들어 댔지만, 가문을 이끄는 어른들은 달랐다.
“이리 되면 해싱턴 공작을 옥죄고 있던 남색 의혹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여왕의 전횡을 성공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이는 유서 깊은 가문의 해싱턴 공작뿐입니다!”
“맞습니다! 교회와 여왕이 요새 소도미 법이다 뭐다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어요. 잘못하면 우리도 윌슨 크라몬드 백작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도 그게 걱정이었소. 또 어떤 시건방진 서자 나부랭이가 여왕 측에 줄을 대고 적법한 가주를 해쳐 작위를 훔치면 어떻게 한답니까? 차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이번 기회에 확실히 우리의 힘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자 재물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은밀하게 해싱턴 공작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골적인 정치 공작이 시작되었다.
제일 처음은 현재 크라몬드 가문의 가주인 조지 크라몬드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일으키는 거였다.
귀족 가문의 추문을 주로 다루는 삼류 가십 지 루머 라운지에서 최근 크라몬드 백작 저택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수라 황음무도의 현장을 보도했다.
[요즘 루덴 외곽의 크라몬드 백작 저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기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본 지가 이틀 동안 밤낮으로 취재하는 내내, 마약에 취한 남녀가 반라의 상태로 서로를 희롱하다 그대로 몸을 섞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또 사내가 사내를 희롱하고, 여인이 여인과 뱀처럼 얽히기도 한다.
타락한 귀족 가문의 영식과 영애가 가면을 쓰고 음탕한 쾌락을 찾아 드나든다는 목격담도 꼬리를 물고 있다.
아아, 우리 브리티나의 도덕은 어디에 있는가. 소돔과 고모라에 내렸던 하나님의 유황불 진노가 우리 루덴에도 들이닥칠까 진실로 두렵도다!]
기사 중앙에는 기기괴괴한 포즈로 난교 파티를 벌이고 있는 선남선녀의 사실적인 삽화가 선정적으로 곁들여 있었다.
잡지는 한 부에 20실링이나 되는 거금이었음에도 오전에 이미 다 팔렸고, 찍어 내는 족족 매진되었다.
사흘 후, 심지어 마틸다 여왕까지 흰여우 가면을 쓰고 백작 저에 드나들었다는 찌라시가 루덴 시내에 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