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관능적인 꽃향기 아래
해싱턴 공작은 무자비한 확인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멋진 연인을 버리고 왜 이 늙다리 남색가의 손을 잡아야 하는지, 영애도 이제 알겠소?”
“…….”
“또한 죽어 가는 여동생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장차 우리 해싱턴 가문을 더욱 든든한 반석 위에 세우기 위해서라도, 우린 기어코 펠릭스를 마트비아의 대공으로 세우고야 말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 영애는 우리 펠릭스와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영애는 이제 잘 알겠지?”
“…….”
대답 대신 일레인은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펠릭스를 포기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외삼촌과 혼인한다고 약속해야지만 아빠의 편지를 손에 넣을 수 있다.
편지를 확보해야지만 엄마와 아빠의 혼인 무효화 판결이 취소되고, 혼인 무효화가 취소되어야만 가문을 되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너무 아파.’
살아 있는 동안 앞으로 걷는 걸음마다 이렇게 칼날 위를 걷듯 아프겠지.
펠릭스.
가문의 몰락과 조롱당하는 엄마를 외면하고 펠릭스, 당신과 함께 걸어도.
그리고 가문을 위해 당신을 떠나보내고 홀로 걸어도.
어떻게 걸어도 나는 서걱거리는 칼날 위를 걷듯 아프고 또 아플 거야.
마음이 울부짖었다.
* * *
일레인이 잔인한 삶의 굴레에 갇혀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고 있을 때, 펠릭스는 차이나의 캔톤, 현지 지명으로 광저우에서 일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리 경, 기존 거래처 상인들이 협력을 거부하는 이유가, 우리 크라몬드 상사 말고 다른 브리티나 상사와 거래하기 위해서란 말이지요?”
펠릭스는 지난 십여 년간 크라몬드 상사의 갠톤 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콴쥬완 리에게 그간 알아낸 바를 다시 확인했다.
“다른 상사와 거래하려는 이유가 ‘아편’ 때문이라고요?”
40대 후반의 둥근 얼굴에 눈이 가는 차이나 상인 콴쥬안 리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내륙에 아편을 팔면 큰 이문을 남길 수 있기 때문입죠. 그런데 크라몬드 백작 각하께선 빈 배로 오는 한이 있어도 아편 같은 독약은 취급할 수 없다고 거절하셨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알베르토 경이 휘이,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한 분이시네, 크라몬드 백작. 그러니 그 마틸다 여왕에게 온갖 미움이란 미움은 다 받지.”
쯧.
펠릭스가 지부장을 앞에 두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알베르토를 노려보았다.
“아니, 입 달고 말도 못 하나?”
알베르토가 구시렁거렸다.
펠릭스는 다시 지부장에게 물었다.
“리 지부장께서도 아편 팔아 큰 이문을 남기고 싶어서 우리 크라몬드 상사와 더 일하기 곤란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앞머리를 바싹 밀어 동그란 이마를 드러내고, 뒷머리를 길게 땋아 둥근 모자 속에 넣은 콴쥬안 리가 정색을 했다.
“저의 리 가문은 대대로 여기 항저우에서 터를 잡고 살아온 상인입니다. 최고의 물건을 선별해서 수출하고, 또 최고의 물건을 수입해 유통하는 걸 합지요. 한데…….”
가늘고 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장손인 큰아들이 어쩌다 아편에 빠져 폐인이 되더니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어머니와 아버지도 몸져누우시고, 아내 또한 시름시름하다 아편에 손을 대서 온 집안이…….”
한이 복받친 리는 눈을 꽉 감고 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아편 무역을 하겠습니까? 또한 우리 폐하께서도 날로 늘어나는 아편의 폐해에 진노하셨으니 자칫 온 가문이 풍비박산 날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콴쥬안 리는 압박에 못 이긴 크라몬드 상사가 결국 아편을 취급하고 말 터이니, 그러기 전에 자신은 해외 무역 수입업 자체에서 손을 떼고 싶단 말이었다.
인도 뭄바이의 싱은 더 많은 이문을 제시한 스페인의 상사로 넘어가서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지부를 세우느라 오래 지체했는데, 이런 종류의 문제라면, 문제랄 것도 없다.
조속히 해결하고, 드디어 일레인에게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날카롭게 각이 졌던 펠릭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러자 일순 같은 사내인데도 리 씨는 이국의 신이라도 본 듯 흠칫 몸을 물렸다.
“아편으로 돈을 버는 것은 일시적인 부의 추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리 경. 저도 또 우리 크라몬드 백작 각하께서도 신 보시기에 노여울 그런 수단으로 축재할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펠릭스는 리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을 다른 상인들과 연합하여 좋은 품질의 도자기와 비단, 차 등을 넘겨주면, 넘겨주는 물량을 크라몬드 상사에서 모두 좋은 가격에 소화해 줄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1년 내로 아편 대신 이문이 남기 좋은 다른 상품을 공급할 수 있게 노력할 것과, 단기적인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리와 다른 현지 상인과 합작으로 여기 캔톤에 은행을 세우는 안도 적극 검토하겠다고도 제안했다.
날로 커지는 아편 무역에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자, 차이나의 황제가 조만간 응징에 나서리란 소문이 돌고 있었다. 황제가 아편을 몰수해 태워 버리고, 해외 오랑캐 아편 상단과 협력한 차이나 상인들을 도륙할 것이란 우려를 하는 상인들이 차츰 생겨나고 있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리 경. 서양에서는 증기 기관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상용화되면 천지개벽할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리 씨의 셋째와 넷째 아들을 브리티나와 다른 서양의 나라들에 유학시키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봉건적인 황제와 날로 세력이 커지는 근대 과학의 서양 세력 사이에서 속을 끓이던 리 씨는 반색하여 되물었다.
“저희 가문의 자손 셋과, 새로 협력할 가문의 자손들까지 함께 보내도 되겠지요?”
이렇게 성공적으로, 오히려 이전보다 더 굳건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펠릭스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알베르토, 당장 출항에 필요한 물품들 구입해서 늦어도 모레 일찍 떠날 수 있게 해.”
펠릭스의 말에 알베르토가 와그작 얼굴을 구겼다.
“아이, 여기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음식도 후추랑 그 맵싸한 빨간 거 팍팍 넣어서 겁나게 맛나고, 여인들과 사내들도 낭창낭창 간드러지게 어여쁘고. 3일만, 딱 3일만 좀 놀고 그러고 좀. 응?”
“싫어? 그럼 나 혼자 가고. 너는 여기서 네 그 사낸지 계집인지도 모를 어여쁜 희첩들이랑 뒹굴고 오든가.”
“아니, 그렇게 정절을 지키면, 뭐, 일레인이 상이라도 준대? 얼마나 무심한지 소식 한 줄 안 보내는구먼, 뭘 그렇게.”
“내 거처가 수시로 바뀌니 못 보내는 거지. 너 그렇게 우리 부인 험담하다간 인제 크라몬드 가에도, 나중에 우리 신혼집에도 발도 못 붙인다!”
“부인은 무슨, 첫날밤도 못 치른 주제에. 그러니까 출발하기 전에 몸에 도장을 콱 찍었어야지. 그날 내가 봤거든? 벗고 달려드는 기세던데 뭘 그리 아까워서. 죽으면 썩어질 몸.”
“알베르토 경!”
“어엇!”
펠릭스가 이렇게 깍듯하게 부를 때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는 걸 잘 아는 알베르토는 후다닥 몸을 돌렸다.
“간다고, 가. 가서 쏜살같이 자네 그 그림 잘 그리는 부인에게 달려갈 수 있도록 바람 잘 타는 일등 항해사도 추가로 고용하고.”
끝까지 너스레를 떠는 알베로토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펠릭스는 통째로 빌린 별관 후원의 대나무 흔들의자에 홀로 앉았다. 머리 위로 흰색 오종종한 재스민 꽃무리가 관능적인 향기를 뿜어냈다.
멀리서 띠리리잉 악기 줄을 튕기며 새소리처럼 높게 우짖는 여인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정말, 우리 일레인이 많이 바쁜가 보다.’
출장을 떠나온 후 처음으로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펠릭스는 그리운 일레인을 떠올렸다.
백작 부인을 대신해 다이앤과 짐머 왕자의 혼인을 챙기랴, 또 임박한 백작 부인의 해산도 챙기랴, 바쁘기도 하겠지.
그래도 자신은 거의 매일처럼 쓴 편지를 모았다가 도시를 떠날 때마다 선물과 함께 보냈는데, 이리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니. 섭섭하지 않다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처음 두 번은 아기자기한 그림 세 점과 함께 절절한 연서 다섯 통을 받았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뭄바이를 떠난 후부터는 한 통도 오질 않는다.
해가 눅진하게 늘어지자 머리 위 꽃향기가 더욱 진해졌다.
‘언젠가는 일레인도 함께 와서, 저 높다랗게 쭉 뻗은 나무에 달린 뾰족한 잎과, 울긋불긋 색채 화려한 열대 꽃들을 그리게 해야지.’
은근히 욕망을 들끓게 하는 재스민의 관능적인 향기 속에서 펠릭스는 일레인이 그림을 그리는 광경을 떠올렸다.
그러자 떠나오기 전날 밤, 희미한 등불 속에서 그의 벗은 몸을 천천히 쓰다듬던 일레인의 손길도 자동으로 떠올랐다.
으흠.
그때 너의 손가락은 얼마나 떨리고 있었던지. 어깨와 가슴, 옆구리를 지나 또 배꼽 주변을 쓸고, 그 아래로 조심조심 향하던 너의 손길과, 맨살에 떨어지는 너의 더운 숨결에 나는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지.
얼마나 너를 안고 싶었는지, 얼마나 너의 속으로 나의 부푼 욕망을 넣고 싶었는지, 아아, 일레인 너는 알까.
펠릭스의 중심이 그날의 밤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돌아가면, 돌아가면 일레인.
너의 온몸에 꽃잎처럼 붉은 흔적을 남길 거야. 밤이 새도록, 날이 밝아도.
그리고 또 어느 날 늦은 밤에 나는 너의 손을 잡아 작업실로 이끌겠지.
그리고 내가 네게 해 주었듯. 나는 너의 잠옷을 벗기고. 너의 온몸을 나의 손가락으로 천천히 느끼고. 그리고 캔버스 위에 서툴게나마 너의 나신을 그릴 거야.
그러다가 흥분한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너의 부푼 가슴을 베어 물겠지. 달뜬 숨으로 욕망에 흐려진 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너의 몸 깊이 들어가 천천히 움직일 거야.
그러면 우리는 기나긴 사랑의 밤을 시작하겠지.
아아, 일레인. 너에게로 가는 길은 어찌 이렇게 먼지. 멀어서 더욱 애틋하고, 더욱 강렬하지.
펠릭스의 숨이 달큰하게 거칠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