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칼날 위를 걷는 밤
“선생님.”
엘렌의 옷자락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일레인이 다시 애원했다. 그러나 불과 몇 분 전까지 일레인과 바이올렛에 대한 연민과 비탄에 떨던 눈동자에는 이제 냉철한 계산이 대신 들어 있었다.
“일레인, 너는 선택을 해야 할 거야. 가족과 펠릭스 사이에서.”
슬픈 예감은 역시나 틀리지 않는다.
“펠릭스는 절대 너를 포기하지 않으려 할 거야. 내 아들이니까. 그럼 너는, 일레인?”
“…….”
입술에 아교가 붙은 듯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이따 함께 이야기하자.”
선생님은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천천히 방을 나갔다. 방 밖에서 아까 옷시중을 들어 주었던 하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펠릭스를 마트비아 대공의 후계자로 세우는 걸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셨구나.’
인간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집념을 가지는가.
크라몬드 백작 부인이 되고야 말겠다고 한 다이앤의 집념. 펠릭스를 대공의 후계자로 세우겠다는 선생님의 집념.
그리고 조지 그 흉악한 놈의 치욕적인 조롱에서 엄마를 구해 내고, 태어날 동생에게 백작 직위를 찾아 주고야 말겠다는 나의 집념은 그 결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펠릭스를 포기할 수 없다고 아우성치는 마음과, 가문을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이성 사이에서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기어이 주르륵, 인중을 타고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시커먼 코피가 마음의 상처처럼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대충 피를 닦아 낸 일레인은 2층 윌리엄의 방으로 내려갔다.
“펠릭스를 포기해야 편지를 내주겠다고 하든?”
창백하게 질린 일레인의 얼굴에서 윌리엄은 엘렌 해싱턴의 이기적인 조건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냈다.
“…오라버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그새 씻고 면도해서 멀끔해진 얼굴에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윌리엄이 답했다.
“그날, 백작 저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고 나니, 네가 왜 그토록 조지 그 개놈을 응징하려 드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
펠릭스를 포기하더라도 응징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다. 엄마의 아픈 비극을 쾌락거리로 삼아 조롱하는 것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펠릭스를 포기해야만 한다면, 일레인.”
윌리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나도 있단다. 내가 널 지켜 줄게.”
“…갑자기?”
갑작스러운 청혼에 일레인은 푸흣 웃고 말았다. 어쩐지 어색해졌기 때문이다.
다이앤의 일을 유일하게 함께 알고 있는 이를 잃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펠릭스 대신으로 윌리엄을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네요, 윌리엄. 그런데 그런 말, 아무리 불쌍하다고 해도 함부로 하지 마요. 듣는 사람 오해한다니까.”
“오해 아니야, 일레인.”
윌리엄은 진지하게 대답했지만, 일레인은 계속 모르는 척했다.
그거 알아, 오라버니? 진심이라서 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
오라버니 한 사람만이라도 의무감도, 야망도 아닌 오롯한 사랑만으로 혼인할 수 있길.
일레인은 부러 가볍게 대답했다.
“에이, 샬럿 고모한테 부탁받았구나. 내가 펠릭스를 포기해야 해서 상심하면 대신 위로 좀 해 주라고. 괜찮네요, 난. 적어도 선택이라도 할 수 있잖아.”
선택이 가능해서 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그래서 덜 억울하긴 할 것이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
그런데 엘렌과 해싱턴 공작의 제안은 더 기가 막혔다.
“혼인이라고요? 해싱턴 공작님과 우리 일레인이요?”
방금 들은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엘렌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일레인을 대신해 윌리엄이 되물었다.
“대체 이 무슨 개 같은 말씀이신가요?”
그러나 엘렌의 병색 짙은 얼굴은 담담했다.
“일레인은 가문을 살리기 위해 내 편지가 필요하고, 나는 내 가문을 살리기 위해 오라버니의 결혼이 필요해요. 명목상의 결혼으로 모두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요.”
“심장이 아프시다더니, 머리가 아프셨던 것이군요. 하, 유서 깊은 해싱턴 공작가에 미친 늙은이들이 둘이나 쌍으로 앉아 있었네.”
“…오라버니!”
일레인은 일단 흥분해서 막 나가고 있는 윌리엄을 말렸다. 그러나 윌리엄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일레인, 돌아가자. 이런 정신 빠진 헛소리 더 듣고 있을 필요도 없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다.
전직 크라몬드 가문의 재산관리자이자 법률가인 게인즈 씨와 며칠을 머리를 맞대고 맞대 내린 결론은 오로지 엘렌의 편지만이 교회의 혼인 무효화 평결을 번복할 수 있다는 거였다.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확고한 증거가 있어야지만 여왕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을 움직여 교회를 압박할 수 있다, 일레인.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편지를 받아 와야 해.”
아빠가 돌아가신 지금, 일레인에게 아빠 노릇을 대신해 주고 있는 게인즈 씨가 서글프게 웃으며 말했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아니 엘렌이 저리 나오는 거다. 펠릭스를 마트비아 대공의 후계로 인정받고자 별의별 것을 다 뒤져 보았을 터이니.
“펠릭스가 투자의 귀재가 된 건, 선생님께 물려받은 재주 덕분이로군요.”
일레인은 감탄하고 말았다.
너무 기가 막히자 머릿속은 오히려 차분하게 맑아졌다.
“해싱턴 공작님. 소도미 법을 피하시기 위해 저와의 결혼이 필요하신가요?”
일레인은 사십 대 후반, 아주 신사다운 모습으로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듣고만 있는 공작에게 직접 물었다.
해싱턴 공작이 처음으로 제대로 눈을 맞춰 왔다. 펠릭스와 같은 색깔의 검푸른 눈이었다.
이런 기막힌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모르고 머나먼 이국에서 펠릭스는 크라몬드 상사를 위해 일을 처리하고 있겠지.
하루라도 빨리 내게, 이렇게 못난 내게 돌아오기 위해 촌음을 아끼며 일을 하고 있겠지.
또다시 심장이 부서질 듯 울부짖었다.
“나는…….”
말을 하려던 공작이 문득 장식용 도자기처럼 존재감을 지우고 서 있는 시종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고, 공작과 시종의 눈에 모두 애틋한 애정과 고통이 넘실거렸다.
‘저자구나, 남색의 상대가.’
알아챈 사람은 일레인뿐만이 아니었다.
윌리엄이 역겨운 표정을 짓더니 일레인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가자, 일레인. 이 미친 곳에 더 있을 필요가 없어. 후작가 재산을 다 털어 넣어서라도 내가, 내가 다 해결해 줄게.”
“…방법이 있었으면 고모님이 날 여기 안 보내셨을 거야, 오라버니.”
일레인은 부드럽게 팔을 빼냈다. 그리고 해싱턴 공작을 다시 바라보았다.
“공작님, 따로 좀 걸으시겠어요?”
대체 무슨 계획인지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펠릭스의 초상화가 내려다보는 이곳에서 이런 기막힌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 않다!
“닐, 영애께 한기를 막을 수 있는 망토를 가져다드리게.”
검은 머리에 어두운 피부의 아름다운 사내가 공작에게 다시 애틋한 시선을 던지고 살롱에서 나갔다.
일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먼저 살롱을 나와 저택의 뜰로 나왔다.
어느덧 어두워진 하늘엔 별빛이 총총,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별을 펠릭스도 보고 있을까. 펠리스가 이 기막힌 상황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나는 이 기막힌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차라리 확 정신이 나가서 아무 것도 모르는 백치가 되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일레인에게는 책임이 있었기에. 지금 엄마를, 동생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펠릭스는 지금 돌아올 준비가 한창일 걸세, 영애. 그렇지만 아무리 서둘러도 육 개월은 넘게 걸리겠지.”
떨리는 어깨에서 일레인의 참담한 심정을 읽어 냈는지, 공작이 뒤에서 망토를 걸쳐 주며 말을 건넸다.
“…….”
일레인은 대꾸 없이 이슬이 흠뻑 내린 풀밭을 앞서 걸었다.
온몸이 타는 듯 고통스러웠다. 일레인은 더 참지 못하고 구두를 벗고 비단 스타킹까지 벗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그걸 따질 여유가 일레인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잘박잘박, 바늘처럼 맨발을 파고드는 밤이슬의 냉기가 냉혹한 현실을 일깨웠다.
펠릭스가 없는, 쓰라린 현실.
일레인은 휙 돌아서 후작의 눈을 직시했다.
“저와 혼인하시는 것이 소도미 법을 피하기 위해서인가요? 그럼 제게는 무슨 이득이 있나요?”
응접실의 불빛 아래 선 곱고 유약해 보이던 후작은 싸늘한 표정으로 어둠에 젖어 있었다.
“고작 소도미 법 하나 피하자고 조카의 여인에게 혼인을 제의할 리가. 그럴 리가, 영애. 우리의 혼인이 영애와 나의 필승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오.”
착각이 아니었다. ‘닐’이라 불리는 연인이 부재한 자리의 공작은 브리티나의 유서 깊은 귀족가 가주의 풍모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영애 부모님에게 내려진 혼인 무효화 판결을 철회하려면 다른 귀족들도 여왕과 교회에 함께 압력을 넣어 주어야 하오. 그런데 그대 가문이 가진 해외 무역 루트에 눈독을 들인 귀족도 너무 많아. 그들이 과연 영애 편에 서 줄 것 같소?”
“…….”
모든 것은 결국 제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이었다. 귀족들의 고급 취향 정도로 여겨지던 동성애를 이제 와 새삼스럽게 처벌하는 것도, 조지 크라몬드를 관대하게 놓아두는 것도 결국 다 각자 제 밥그릇 챙기기란 말이었다.
“그런데 여왕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된 크라몬드 백작가와, 여왕과 교회에 납작 엎드려 몸을 사리던 해싱턴 공작가가 혼인 동맹을 맺는다면, 그러면 이건 강력한 선언이 되오. 나 리처드 해싱턴 공작은 이제 더 이상 구차하게 엎드려 있지 않겠다! 가문과 목숨을 걸고 여왕과 대적하겠다!”
브리티나의 유서 깊은 귀족가인 해싱턴 가문이 여왕에 맞서 깃발을 들면, 그 깃발 아래 여왕에게 불만을 품은 다른 귀족들이 모여들 거란 이야기였다.
“왜 내가 사랑하는 조카이자 또 무자비한 동업자이기도 한 펠릭스의 여인에게 혼인을 제의할 수밖에 없는지 이제, 알겠소?”
“…….”
발가락을 타고 오른 냉기가 커다란 칼날이 되어 심장에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