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79화 (79/112)

#제79화. 그대를 잃기 위해 가는 먼 길

정말로 아빠와 엄마의 결혼 전 연서는 없었다.

결혼 이후 알콩달콩 주고받은 연서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혼인 무효를 입증해줄 편지 뭉치는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마약과 타락의 소굴에서 다이앤은 지옥을 걸으면서도 나름 백작 부인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이 모든 지옥을 불러들인 조지 놈은 여전히 백작으로 호의호식 소돔과 고모라의 환락을 즐기고 있다 한다.

일레인은 분노 속에서 차라리 사람을 사 저 둘을 죽여 버릴까 궁리하다, 올 날이 먼 펠릭스를 그리워하다, 입안이 헐어 버릴 정도로 지치고 말았다.

“엘렌이 가지고 있어, 일레인.”

일레인이 가진 절망을 모른 채 아빠의 편지 더미 속에서 행복한 웃음을 짓던 엄마가 문득 말했다.

“내가 하도 구애를 거절하자, 아빠가 엘렌에게도 편지를 여러 번 보냈었거든. 나를 좀 설득해 달라고. 그 편지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저번에 엘렌이 그러더라.”

절망에 빠져 있던 일레인은 드디어 희망을 발견했다!

“페일른 선생님이요? 그 편지를?”

“응, 사랑을 테마로 그림을 그릴 때 읽어 보면 막 영감이 떠올라 가지고 있다고 했어.”

엄마의 눈빛이 문득 슬프게 흐려졌다.

“그런 이가 갔어. 윌슨은 갔어. 그렇지만 아기가 있으니 나는, 잘 견딜 거야, 일레인.”

엄마에게 차마 다이앤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일레인은 홀로 창자가 꼬이듯 아팠다. 그런데 페일른 선생님이 가지고 계셨다니!

기쁨에 환희하기도 잠시, 일레인의 얼굴이 다시 착잡하게 흐려졌다. 편지를 달라고 했을 때 선생님은 아무 조건도 없이 흔쾌히 내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펠릭스와 헤어지라고 하시겠지.

그렇지만 일단 부딪쳐야 한다. 편지를 확보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제일 중요했다.

“쉬세요, 엄마. 저 이만 건너가 볼게요.”

일레인이 일어날 때였다.

“저기 일레인. 저택에 있는 펠릭스 초상화와 내 그림, 가져올 수 있을까?”

엘렌 페일른 선생님 이야기가 나오니 살롱 벽에 걸어 둔 그림이 생각나신 듯했다.

“샬럿 고모님이 달라고 했는데 다이앤이 거절했대요. 하지만 훼손하면 저를 대신해 손해배상 청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니 어쩌진 못 했을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 같이 타락한 곳에 덩그러니 걸려 있을 펠릭스와 엄마 그림 생각에 또 식도가 타는 듯한 느낌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못 이긴 일레인은 작업실에 그림을 그리러 가는 대신, 마구간에 가서 브라운을 꺼내왔다.

“말, 타러 가려고?”

루덴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던 윌리엄이 일레인 곁으로 다가왔다.

함께 크라몬드 백작 저를 다녀온 이후 윌리엄도 말수가 확 줄었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맞대기를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서로를 위로하기도, 함께 분노를 나누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같이 갈래?”

“아니요, 오라버니. 혼자 좀 달리고 올게요.”

“승마복 하나 맞춰라, 일레인. 편한 걸로.”

편하게 입는 드레스로도 옆으로 타는 게 불편해 보이는지 윌리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나, 인적 없는 곳에선 오라버니처럼 타요!”

그 말을 끝으로 일레인은 맹렬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일레인의 복잡하고 비참한 심정을 아는지, 브라운이 바람처럼 속도를 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귀족의 대 저택을 지난 후부터는 사내들이 말을 탈 때처럼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고 본격적으로 속도를 냈다.

등자에 건 발과 다리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안장에서 약간 떼고 상체는 말 등에 바싹 붙인 채 승마 경기에 나간 기수처럼 극도의 속력을 내자, 얼굴에 시원한 바람이 몰아쳤다.

그렇게 다리 힘으로 버티면서 미친 듯이 달리고 나자 체한 듯 꽉 막혔던 가슴이 조금 숨 쉴 만해졌다.

“가야겠지, 브라운?”

마침 나타난 작은 개울에 땀에 흠뻑 젖은 브라운을 끌어다 물을 먹이며, 일레인은 속삭였다.

“찾아가서 편지를 달라고 하면, 선생님은 ‘옛다, 내 친우 바이올렛을 위해서니 마음대로 쓰거라.’하고 내주시지 않을까?”

그런 희망은 부질없는 거라고 충고하듯 브라운이 푸르릉 코웃음을 쳤다.

선생님이 아무리 엄마의 절친이라고 해도, 펠릭스를 대공의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평생 노력해 온 꿈마저 버리진 못하실 사람이란 뜻이었다.

“펠릭스와 헤어지는 걸 조건으로 내 거시겠지.”

이번에도 브라운이 푸르릉 요란스레 동의했다.

하아.

사랑을 따르자니 가문이 울고, 가문을 따르자니 사랑이 우는.

이 무슨 개 같은 신파야!

너무 기가 막히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엄마가 알아서 ‘일레인, 이미 망해 버린 가문 따위, 무슨 상관이니. 재물이야 많으니 우리 그냥 부유하게 살자, 일레인.’ 말해 주기만 한다면.

그러면 못 이기는 척 가문 따위, 사생아 따위, 걱정하지 않았을 텐데.

“펠릭스도 사생아인데, 브라운. 저렇게 잘 컸잖아.”

그러니 유복자로 태어날 동생도 잘 클 수 있을 것이다. 사생아든 귀족이든. 그렇게 키울 자신이 있었다.

일레인은 브라운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펠릭스가 있으니까, 브라운. 펠릭스가 아빠처럼 잘 이끌어 줄 거고.”

그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치듯 브라운이 푸르릉, 코를 벌름거리면서 일레인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그러나 일레인은 브라운이 잘근잘근 씹다가, 그만 돌아가자고 머리통으로 몸을 밀어댈 때까지 오래오래 서 있었다.

다이앤의 그 기막힌 모습을 귀로 듣지 않았다면 일레인은 못 이기는 척, 그냥 사생아로 풍요롭게 살자고 엄마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를 나눈 자매가 그 지경으로 살게 둘 순 없었다. 그 지옥에서 엄마의 이름이 그 찢어 죽여야 할 놈의 입에서 매일처럼 더럽혀지는 건 더 참을 수 없었다.

천국에 계신 아빠도 그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눈을 감고 그냥 있는 건, 아빠에 대한 모독이자, 자식으로서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었다.

어둠을 몰아오는 바람이 휘잉 불고, 어디선가 까마귀가 불길하게 까악까악 울었다.

“내 인생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을 거야, 브라운.”

저 울음소리처럼, 흉하게 울 날만 펼쳐질 것이다.

펠릭스를 잃게 될 테니까.

사흘 후, 일레인은 윌리엄과 함께 브리티나의 북동쪽 해싱턴 공작가의 영지로 떠났다. 엘렌 해싱턴 부인을 만나 아빠의 편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일레인, 가지 말거라. 귀족 아니면 어떠냐? 네가 크라몬드 백작의 딸이라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일레인이 간절하게 듣고 싶었던 말은 샬럿 고모의 입에서 나왔다.

일레인이 엄마의 혼인이 국법에도, 교회법에도 어긋나지 않게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편지를 받으러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샬럿 고모의 얼굴은 슬프게 일그러졌다.

“시대가 바뀌었어. 펠릭스를 봐라. 사생아로 태어나 이리저리 떠돌며 살았어도 저리 잘 컸잖니. 나도 있고 너도 있고 펠릭스도 있을 텐데, 까짓것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어도, 뭐!”

“…….”

아무리 자신을 아껴 주는 고모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그날 다이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조지 그 개놈이 지껄이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일레인도 고모처럼 생각했을 것이라는 말을 일레인은 끝까지 할 수 없었다.

“…다녀올게요. 고모부님께 제가 돌아오면 교회와 의회에 청원할 수 있게 미리 준비해 달라고 부탁드려주세요.”

기어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샬럿 고모님은 옆에서 석상처럼 묵묵하게 서 있는 윌리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럼 윌리엄, 네가 함께 다녀오거라. 든든하게 칼이랑 총 잘 쓰는 하인도 몇 데려가고. 네가 함께 가면 그쪽에서 우리 일레인을 함부로 대하진 못 할 거다.”

일레인은 마다하려고 했다. 아무리 사촌이어도 이 꼴 저 꼴 다 보이는 것이 마뜩잖았다.

그러나 윌리엄이 일레인을 보며 안타깝게 웃었다.

“함께 가자, 일레인. 그래야 내 마음이 놓일 것 같아.”

그래서 일레인은 윌리엄과 무장한 호위 세 명과 함께, 노숙하게 될 때 쓸 침낭과 옷가지 몇 벌 챙겨 말을 타고 떠났다.

가을이 시작된 초원은 벌써 겨울의 쓸쓸함을 담고 있었다.

해싱턴 공작가의 영지가 가까워올수록 마음은 더 무겁게 칭얼거렸다.

가고 싶지 않아. 눈 꾹 감고 그냥 살아도 되지 않아. 어차피 다이앤은 벌을 받고 있고, 조지 그놈은 저렇게 놀다 여왕 눈 밖에 나면 그대로 제거될 터인데.

아니 그 전에 내가 은밀하게 저 둘을 죽일 방법을 찾아내면 될 터인데.

화재도 있고, 약물 중독사로 위장된 독살도 있고!

“해싱턴 공작이 우리 일에 신경 쓸 여력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세 시간을 연이어 말을 달리고 잠시 말과 함께 쉬는데 윌리엄이 근심스럽게 말했다.

“조지 개놈의 백작 작위 승계에 불만이 다들 많으면서도 몸을 사리는 이유가 최근 교회의 파문 움직임 때문이잖아. 여왕이 참, 교묘하게 일을 꾸미고 있어서.”

최근 브리티나의 교회는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는 성경 구절을 들어 남색가에 대한 파문과 처벌을 일삼고 있었다.

명분은 성서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는 동성애를 하는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교회와 여왕의 재산을 늘리고, 왕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지방의 힘없는 자작 하나가 일명 소도미 법으로 교회에서 파문당하고 영지를 몰수당한 일이 최근 있었다.

“해싱턴 공작도 그쪽으로 오랫동안 의심을 받아 왔잖아. 조지 크라몬드가 크라몬드 상사의 지분을 마음대로 팔아 치우는 걸, 펠릭스가 없으니 해싱턴 공작이 제재할 법도 한데 그러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펠릭스가 대주주로 있는 골든우즈 투자 회사에 해싱턴 공작도 상당히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골든우즈 사가 크라몬드 상사의 지분을 절반이나 가지고 있다는 걸 지적하는 윌리엄의 말에, 일레인은 속절없이 또 펠릭스를 떠올리고 말았다.

마음이 마구 울부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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