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너는 이미 지옥을 걷고 있구나
“손가락을 넣고, 흔들어, 봐. 다리, 크흠, 더 벌리고.”
침대가 조금씩 흔들리며,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조지와 사내들은 그대로 서 있는데, 다이앤 혼자서 움직이며 흐느끼듯 신음하고 있었다.
“네 어미도 근위병들 앞에서 그렇게 음탕하게 몸을 굴렸겠지, 바이올렛! 바이올렛! 크흐.”
왁자지껄한 짐승 같은 웃음 속에 음탕한 말들이 섞였다.
“그래 선대 백작 부인의 몸이 참으로 낭창했지. 저기 저 다이앤처럼.”
“다이앤, 아니 바이올렛, 다리를 더 벌리고!”
“아이 나도 한 번 박아 보자. 겁간이었다며. 재현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조지.”
하며 서로 밀치고 당기는 소리와 함께.
“안 돼, 너희들은 보기만 해. 바이올렛이 내 밑에서 얼마나 음탕하게 흐느끼는지, 보기만 해!”
하며 다이앤 위에서 신음하는 조지, 저 뼈를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까지.
신이 계시다면 지금 당장 저들 머리 위에 벼락이 떨어져야 마땅할 일이었다.
시간 지옥이란 것이 있다면 필시 이러할 것이다.
이번 생에서 발휘해야 할 인내심과 전생과 후생의 인내심까지 모두 다 써 버리는 듯, 치욕의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선명하게 들리는 음탕과 타락의 소리에 일레인은 나중에 얼굴을 옆으로 바닥에 붙이고, 눈을 꽉 감고 손톱을 손바닥에 박아 넣으며 견디고 또 견뎠다.
얼마나 지났을까.
천 년의 세월이 서너 번은 지속하는 듯한 후에야 일레인은 저들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
“…….”
윌리엄도, 일레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식은땀에 흠뻑 젖어 이루 말 할 수 없는 참담함과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등불의 천을 걷어 내고 침대를 옆으로 옮겼다.
먼지투성이 바닥을 더듬자 미세하게 다른 결이 나타났다. 판자 하나를 들어내자, 비밀 공간을 열 수 있는 장치 손잡이가 나타났다.
손을 넣자 딸깍하면서 비밀 공간이 열렸다.
‘있다!’
어른 서너 명이 웅크리고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넓은 공간에 자개로 아름답게 음각된 은제 금고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윌리엄이 비추는 등불 아래서 일레인은 금고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청화 차이나 도자기가 세 개 들어 있었다.
윌리엄이 등에 졌던 배낭을 벗어 건네주었다.
일레인은 배낭을 열고 분홍색 색실로 묶여 있는 편지 더미들을 넣기 시작했다.
“그 안에, 일레인, 너를 구원할 것 따윈 없어.”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윌리엄과 일레인은 펄쩍 뛰었다.
어느 새 방문 앞에 등불을 든 다이앤이 서 있었다. 흐트러진 옷차림과 달리 의외로 멀쩡한 눈빛이었다.
“네가 찾는 거, 그 안에 없어. 그건 내가 태워 버렸거든.”
“다이앤! 너!”
죽여 버릴 거야.
일레인이 마루로 뛰어올라 죽일 듯 다가가자, 다이앤이 피식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속삭였다.
“소리칠까? 여기서 내가 소리치면 네가, 그리고 또.”
다이앤의 눈길이 아까부터 얼어붙은 듯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 윌리엄을 향했다.
“윌리엄 오라버니는, 어떻게 되려나?”
“…….”
“그러니까 얌전히 입 닥쳐. 내가 나쁜 마음 먹기 전에.”
일레인은 다이앤의 가느다란 목을 죄려던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이앤의 입매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재미있네, 아까의 나처럼, 과거의 엄마처럼 네가 짓밟히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다이앤!”
윌리엄이 소리쳤다.
“그런 건 보지 못할 거야, 다이앤. 나는 너랑 다르니까.”
일레인은 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아빠를 죽음에 이르게 한 단도였다.
칼집에서 칼날을 빼어 들고 목에 대며, 일레인이 다이앤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소리쳐 봐. 그 순간 이 단도가 네 목을 찌르고 그 다음 순간 내 목을 찌를 터이니. 하긴, 아빠를 죽인 네가 나를 죽게 하는 것 따위는, 개의치 않겠지만.”
“…….”
다이앤이 피식 웃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독한 계집애. 너는 한 번도 져 주질 않지. 그렇지만 그럴 정도로 나도 똑같이 독하게 굴지 않을게. 배 속에 아이가 있는데 피를 나눈 자매의 피를 내 손에 묻힐 수야 없지.”
“새록새록 미쳤구나, 너.”
아이를 품고서도 몸을 그렇게 놀려? 아니, 어차피 죄로 맺어진 씨앗이니 걸맞는 몸짓인가.
미움과 분노와 원망이 일레인의 몸을 감쌌다.
미웠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데, 다이앤에 대한 미움만큼이나 다이앤을 이렇게 만든 조지에 대한 분노가 커지고 커져, 칼을 쥔 일레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조지 그 개만도 못한 새끼는 내 손으로 갈갈이 찢어 죽일 거야. 너도 마찬가지고, 다이앤!”
“그럴 일 없어, 일레인.”
다이앤은 아름답게 웃었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다니. 일레인은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조지는 내 손에 죽을 거야. 차기 백작이 태어나자마자, 개 같은 조지 놈은 내 손에 아주아주 고통스럽게 죽기로 되어 있거든.”
다이앤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헐벗은 옷 아래 배를 쓰다듬었다.
“이 아이는 크라몬드 백작이 되고, 나는 선대 크라몬드 백작 부인이 되는 거지.”
순수한 증오와 악의가 다이앤의 눈에서 푸른 다이아몬드처럼 환하게 불타올랐다.
“…왜, 그런 거야?”
일레인은 정말로 궁금했던 점을 묻고 말았다.
“짐머 왕자는 너를 사랑했어. 고귀한 왕자비가 될 수 있었는데, 왜 너는 피에 피를 묻혀 가면서 크라몬드 백작 부인에 집착한 거지?”
“어리석기는.”
다이앤이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태어날 때부터 너는 크라몬드 성과 크라몬드 가문의 재산과, 부모님의 사랑까지 네 것처럼 자연스럽게 누렸지. 나는 언제 잃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걸 늦게 태어난 동생은 여유롭게 누리는 걸 봐야 하는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또 저 소리.
제가 받은 것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못 받은 것만 확대하는, 저 기만적인 자기 합리화.
일레인은 팽 몸을 돌려 도자기 안의 편지들을 다시 배낭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거기에 아빠, 아니 윌슨 백작이 엄마에게 보낸 구애 편지는 없다니까. 그렇게 중요한 걸 내가 거기 그냥 놓아두었겠니? 태워 버렸지.”
분노와 절망이 온몸을 태우는 느낌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그러나 일레인은 입안을 꾹 깨물어, 통증과 피의 맛으로 버티며 편지를 다 배낭에 넣었다.
“없대도! 없는데 왜 챙기는 거야?”
다이앤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다이앤, 제발 목소리 낮춰.”
윌리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다이앤의 눈이 이번엔 윌리엄에게 향했다.
“오라버니, 늘 나를 따스하게 바라보던 오라버니!”
다이앤이 비척비척 다가오더니, 윌리엄의 얼굴 앞으로 등불을 치켜들었다.
“내가 크라몬드 백작 부인이 되었잖아. 오래지 않아 미망인이 될 터이니, 오라버니, 기다려 줘. 이 많은 크라몬드 가의 자산을 오라버니 손에 쥐여 줄 테니까.”
윌리엄은 오랫동안 홀로 마음에 품어온 여인을 바라보았다.
찟긴 옷 사이로 드러난 몸과, 유혹적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름다워서…….
…진실로 역겨웠다.
“일레인, 다 넣었으면 가자.”
일레인은 말없이 배낭을 건넸다.
배낭을 등에 진 윌리엄은 너무나도 형편없이 몸을 떨고 있는 일레인의 손을 잡아 부축했다.
두 사람이 방문으로 향하기 시작하자, 다이앤이 이죽거렸다.
“흥, 바닥에 놓여 있는 등불에 신경을 쓸 정신이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다들 아편이나 해시시에 쩔어 있으니까.”
그제야 일레인은 다이앤이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알게 되었다.
“알아챈 순간에 아는 척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내 죄를 씻고도 남았어. 안 그래, 일레인? 아빠와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한 일레인!”
일레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다이앤을 바라보았다.
성한 모습의 다이앤을 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이 꼬라지가 성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이미 지옥에 살고 있구나.”
“뭐?”
“너는 이미 지옥을 걷고 있다고, 다이앤.”
일레인은 다시 몸을 돌렸다.
다이앤이 외쳤다.
“어릴 적부터 지옥이었어, 일레인. 모두 등 뒤에 적의를 숨기고 너만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 이미 나는 지옥이었다고.”
일레인은 뒤를 보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이앤. 완전하게 흠결 없는 사랑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다들 할 수 있는 것만큼 너를 사랑하고 아꼈어. 너를 잃고 나를 찾아와 흐느낀 짐머 왕자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런 이를 마다하고 네가 쥔 현실이 이런 지옥인 거야.”
다이앤이 고개를 흔들었다. 찟긴 옷으로도 여전히 아름다운 채, 미소까지 지었다.
일레인은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에게 속삭였다.
“기다려. 죄를 물으러 올 터이니.”
“흥, 죄는 무슨.”
“일레인, 가자.”
윌리엄이 더 대답할 필요 없다는 듯, 일레인의 어깨를 감쌌다.
다이앤이 악을 썼다.
“나는 크라몬드 백작 부인이 되었고 앞으로도 쭉 백작 부인으로 살 거야.”
“개처럼 기면서 말이지.”
일레인은 더 듣지 않고 거처를 벗어났다.
북쪽 담장까지 빠르게 걸어간 일레인은 문득 허벅지를 찌르는 단도의 칼집을 느꼈다.
“먼저 넘어가서 받아 줄게.”
윌리엄은 미련 없이 휙 낮은 담장을 넘었다.
그러나 일레인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단검을 쥔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다시 가서 다이앤을, 죽일까.’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한 이곳에서 다이앤을 지금 죽여 주는 것이 그나마 피를 나눈 자매로서 베풀 수 있는 최대치의 관대함인 것만 같았다.
그러다 일레인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다이앤은 제가 만든 지옥에서 더 살아야 해.”
조지를 단죄할 때까지. 그런 후 다이앤을 단죄하게 될 때까지.
그 시간이 결코 길지 않을 것이니.
일레인은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어 분노를 누르며 담장을 휙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