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76화 (76/112)

#제76화. 차가운 빗속의 장례식

“형님이 다이앤을 좀 아끼셨나. 그래서 내가 형님의 뜻을 존중해서 다이앤은 크라몬드 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앞으로 조치를 취하려고, 일레인.”

이제 다 명확해졌다. 짐승 같은 두 것들이 감히 내 아버지를!

일레인은 조지를 노려보았다.

“나는 다이앤과 혼인할 거야. 비록 사생아지만 한때 조카였고, 또 형님이 엄청나게 아끼던 애니까, 그 뜻을 이어받아서 내가 아껴주려고. 그러나 일레인, 너같은 것에겐 그런 친절을 베풀 마음이 없으니 당장 여기 크라몬드 백작 저에서 나가거라.”

“너! 네가!”

일레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빠의 장례도 치르지 못했는데, 어째서! 왜!

절망의 탄식을 쏟아내며 일레인이 조지를 향해 반박하려 할 때였다.

“못 들었어, 일레인? 나가라잖아, 신임 크라몬드 백작께서.”

살롱 입구에서 증오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이앤이었다.

다이앤이 검은 상복을 입고 살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선대 크라몬드 백작의 장례식은 신임 크라몬드 백작과, 그 부인이 잘 알아서 성대하게 치를 터이니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생아 따위는 이만 꺼지시라고요. 이게 그렇게 어려운 말이야, 일레인?”

본색을 드러낸 다이앤은 거침이 없었다.

“너, 네가 아빠를……!”

‘어떻게 아빠를, 그렇게 할 수 있어!’ 외치려는데 다이앤이 먼저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저걸 끌어내라!”

무슨 일인가 싶어 살롱 입구에 몸을 겹쳐서 안을 엿보던 시종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이앤이 왕실의 시종장에게 말했다.

“근위병을 좀 빌려주시지요. 여기 시종들은 주인 말을 이리 업신여기니, 모두 해고하고 새로 뽑을 것입니다.”

그러자 당장 일자리를 잃으면 생계가 곤란한 하인들이 하나둘씩 주춤주춤 나오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요, 아가씨.”

그중 건장한 하인 둘이 일레인의 팔을 양쪽에서 잡았다.

더는 견디기 어려웠다. 막막한 절망과 피로와 슬픔과 배신감이 한꺼번에 몰려와 일레인의 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으흥.”

다이앤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풀어졌다.

“흥, 태어날 때부터 잘난 양 혼자 대단한 척은 다 하더니. 백작께서 돌아가시자마자 네 초라하고 무기력한 꼴을 좀 봐, 일레인.”

“…….”

아빠는 네게 사랑만 주셨는데 왜 너는 이리 깊은 증오와 조롱으로 되갚는 것이지.

“일레인,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보다 못한 윌리엄이 하인들을 물러나게 하고 일레인을 부축했다.

“그래, 일레인. 일단 가서 의논하자꾸나.”

해밀턴 후작도 일레인에게 말했다. 그리고 조지와 다이앤을 매섭게 노려보며 경고했다.

“다이앤, 조지, 짐승도 하지 않을 짓을 저질렀구나. 죗값은 꼭 치르게 하마.”

일레인은 도저히 아빠를 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다이앤이 피식 웃었다.

“그 많은 패물과 옷가지가 아까워서? 걱정하지 마. 그깟 것들. 안나에게 모두 챙겨 뒤따라가라고 할게.”

그래도 일레인이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자, 아름다운 얼굴에 독기가 서렸다.

“끌려 나갈래, 그냥 네 발로 걸어 나갈래?”

살벌하게 동생을 쫓아내는 다이앤의 가슴을 감싸 더듬으며 조지가 히죽히죽 웃었다.

“아이, 다이앤. 암암, 백작 부인이라면 이렇게 단호해야지. 맨날 질질 처 울며 다리나 벌려 대던 멍청한 것과는 달라야 하고말고.”

일레인은 통절하게 후회했다.

선량한 이들은 저런 사악한 것들이 무엇까지 저지를 수 있는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빠도, 일레인 자신도 다이앤이 짐머 왕자와 혼례를 준비하는 척하며 뒤로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일레인은 치미는 분노와 원한을 뼈가 아프게 새기며 훗날을 기약했다.

“골육과 육친을 시해한 죄의 대가를 고통스럽게 치르게 될 거야.”

일레인은 돌아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제 발로 살롱을 나왔다.

윌슨 크라몬드 백작의 장례는 신속하게 치러졌다. 신임 백작이 된 조지는 날이 더워 시신이 벌써 훼손되기 시작하였다는 이유로 장례식을 루덴의 큰 교회가 아닌 백작 저에 딸린 가족 예배당에서 대충대충 치렀다.

그러자 원래 직접 조문을 와야 하는 브리티나의 주요 귀족들은 장례식장이 비좁아 유족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구실로 집사를 파견해 조문을 대신하게 했다.

귀족들 다수는 후계 없이 죽은 윌슨 크라몬드의 백작 작위를 서자 조지가 이어받는 것엔 큰 불만이 없었다. 딸들은 작위를 이어받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귀족들이 암암리에 반발한 건 이십 년 전의 결혼을 무효화한 여왕과 교회의 횡포였다.

바이올렛이 혼전에 다른 사내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교회의 사제 앞에서 정식으로 이루어진 혼인을 이제 와서 마음대로 무효화 하다니.

“서자나 방계의 세력이 막강한 가문에선 비슷한 일이 벌어질까 긴장할 수밖에 없지. 그러니 일레인, 곧 바로잡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해밀턴 후작이 일레인을 위로하며 한 말이었다.

“일레인, 울며 슬퍼하는 건 좋아. 그래야 이 원한이 좀 풀리지. 그렇지만 제발 먹어가면서, 몸 좀 추스르면서 슬퍼하거라. 바이올렛과 동생도 생각해야지.”

샬럿 고모도 일레인을 위로했다. 해밀턴 후작가에 온 후 첫날 내내 일레인이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눈물만 흘렸기 때문이었다.

“엄마에게 혼인이 무효가 되었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엄마는 그것까진 못 견디실 거예요.”

온몸이 비틀릴 것만 같은 애통함 속에서도 일레인은 엄마를 걱정했다.

의연하게 견뎌내고 있는 것 같이 보이던 바이올렛도 실은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아 조산기를 보이고 있었다. 산파와 의사는 꼼짝도 하지 말고 누워 있어야 아이를 보존할 수 있을 거라 경고했다.

그래서 일레인도 후작 부부도 바이올렛에겐 혼인이 무효화되었다는 기막힌 소식을 함구해야 했다.

장례식 전날, 해밀턴 후작 부부와 윌리엄은 백작 곁에서 밤샘 조문을 하기 위해 후작 저를 떠났다.

조지에 의해 참석이 금지당한 일레인은 함께 갈 수 없었다.

“일레인, 우리가 네 몫까지 윌슨을 잘 배웅하고 올게. 무너지는 네 마음, 내 안다. 그렇지만 지금은 너와 바이올렛, 그리고 배 속 아가를 챙기는 것만 생각하렴. 그래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어.”

샬럿이 극진히 위로했지만 위로가 될 리 없었다.

엄마와 함께 슬픔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왜 아빠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냐 물어 오면, 엄마와 아빠의 혼인이 무효가 되었다는 사실과, 사생아라 장례식 참석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하니까.

그래서 일레인은 본채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 별채에 없는 듯 숨죽이고, 엄마가 혹시라도 볼까 불도 켜지 못한 어둠 속에서 홀로 울어야 했다.

너무 울어서 눈물도 나오지 않게 되어서야, 일레인은 웅크리고 잠깐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일레인은 아빠를 만났다. 평소의 자상한 웃음 대신 아빠는 슬픈 눈으로 하염없이 일레인의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이셨다.

‘강해지거라, 일레인. 강해져서 엄마를 보살펴 주어야 해. 가여운 바이올렛을 부탁한다. 크라몬드 가문을 이어갈 내 아들을 부탁한다, 일레인.’

아들!

너무 부어서 떠지지 않는 눈을 일레인은 번쩍 떴다.

‘엄마 배 속의 동생이 남동생이야!’

그렇다면 기회가 있다.

“아빠! 다 되찾을게요. 그리고 아빠를 해친 것들에게 반드시, 제 영혼을 팔아서라도 복수하고 말 거에요.”

일레인은 옆방에 있는 안나를 향해 소리쳤다.

“안나, 목욕물 준비해 줘.”

우당탕 소리와 함께 안나가 문을 빼꼼 열고 얼굴만 들이밀었다.

“씻으시기 전에 뭘 좀 드세요. 스프 좀 데워 올게요.”

안 먹는다는 말을 하기 전에 안나는 문을 쾅 닫고 본채로 달려갔다.

일레인은 닭고기와 감자와 후추를 넣고 고아 낸 스프를 단숨에 마시듯 비우고 몸을 씻었다.

밖은 이제 막 밝기 시작한 이른 새벽이었다.

“상복 입는 거 도와줘. 장례식에 참석할 거야.”

“참석을 금지당하셨다면서요. 가셨다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걱정이에요.”

그러면서도 손은 바지런히 보디스를 채워 주고 검은 베일 모자를 챙겼다.

“저도 같이 갈래요. 같이 가요. 백작님 가시는 길, 저도 가요, 아가씨.”

“…….”

고난이 닥쳐봐야 누가 진짜 내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안나는 좋은 때도, 그리고 지금처럼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도 한결같았다.

두 사람은 검은 상복 위에 밀납을 바른 얇은 우비 망토를 입고 말을 달렸다.

“아, 펠릭스 님이 여기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일레인의 허리를 뒤에서 꽉 안아 겨우 버티며 안나가 말했다.

“…….”

일레인은 대답 대신 말에게 더 빨리 달리기를 재촉했다.

펠릭스는 여기 없다. 그것이 현실, 그리고 그가 없어도 나는 엄마와 동생, 그리고 크라몬드 가문을 지켜야 한다.

일레인은 안나와 함께 백작 저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에 서서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조그만 예배당에서 운구된 아빠의 마호가니 관이 굵은 빗줄기 속에서 가족 묘지에 묻히고 있었다.

‘육 개월, 육 개월이에요. 아빠!’

배 속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서 백일이 되기까지 남은 기간은 육 개월, 그때까지 저는 모든 것을 되찾아 동생에게 줄 거예요.

차가운 비 속에서 일레인은 복수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 *

윌슨 크라몬드 백작의 시해를 둘러싸고 여름 내내 루덴의 정계와 사교계가 요동쳤다.

백작의 사인을 두고 여왕이 임명한 특별 치안판사와 치안관의 합동 조사 발표는 바르바리 해적 잔당의 복수극이었다.

백작이 시해되기 며칠 전부터 아랍어를 쓰는 자들이 루덴에서 백작의 저택으로 가는 길에서 목격되었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또 시해 다음날 새벽, 루덴에서 한 시간 떨어진 아이덴 항에서 지저분한 차림의 아랍인들 다섯 명을 태운 소형 범선이 출항했다는 조사 결과도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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