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74화 (74/112)

#제74화. 엄마는 강했다

‘아까 칼자국에 따라 키를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조지를, 조지를 짐작해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입으로는 다시 흐느낌 소리를 지어내며 다이앤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내, 내가 일어났을 때. 쓰러진 아빠가 걱정되어 일어났을 때 범인이 내 팔을 찌르곤, 온몸을 누르고, 으흑. 몹쓸 짓을, 흐흑.”

다이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안나와 수잔이 덩달아 눈물을 흘리며 팔을 놓고 물러섰다.

그러나 일레인은 물끄러미 다이앤의 우는 얼굴을 지켜보다 불쑥 의사에게 물었다.

“상처를 보니, 어때요? 어떤 범인이 어떻게 찔렀나요?”

살집이 투덕투덕 붙은 의사의 시선이 싸늘하고 냉철한 일레인과 금세라도 오열할 듯 입술을 떨며 흐느끼고 있는 다이앤 사이에서 흔들렸다.

챔프먼 가문은 대대로 크라몬드 가문의 주치의였다. 윌리 챔프먼의 부친 존 챔프먼도 선대 백작을 평생 진료했고, 그 위의 할아버지는 마찬가지로 선선대 백작의 주치의였다.

‘그러니 나도 부끄럽지 않은 주치의가 되어야 한다.’

챔프먼은 애원하듯 흔들리는 다이앤의 눈동자를 눈을 질끈 감아 외면하며 웅얼거렸다.

“일반적으로 해칠 목적으로 휘두르는 칼날에 찔리거나 베이게 되면 상처가 위에서 아랫방향으로 납니다. 본능적으로 칼을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안나가 펜과 책에 받친 종이를 가지고 들어왔다.

일레인은 펜을 들고 다이앤의 상처를 상세하게, 해부학 교재의 그림처럼 아주 세밀하게 그렸다.

다이앤의 오른쪽 어깨 바로 아래 난 자상은 상처의 방향이 아래에서 위로 벌어져 있었다.

다이앤은 왼손잡이였다. 왼손으로 칼을 쥐고 그었다면, 이 모양대로 상처가 나게 된다.

온몸이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났다.

‘다이앤, 다이앤, 너는!’

그러나 아직은 분노를 표할 때가 아니다.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후 한 번에 몰아쳐야 한다!

“닥터 챔프만, 아빠의…….”

목이 메어서 말을 잇기 힘들었다. 일레인은 꿀꺽 치미는 분노와 울음을 삼키고 간신히 말을 이었다.

“아빠의 상처도 보아 주세요. 교회로 가요.”

일레인은 의사와 함께 다이앤의 방을 나왔다.

“…….”

다이앤은 인사도 없이 방을 나가는 일레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입매를 비틀었다.

‘평생 귀하게 자란 것들은 제 고귀한 신분을 제가 얻어 낸 것처럼 우아하게 휘두르지. 그러나 널 봐, 일레인. 이제 너를 귀하게 만들어 주었던 백작이 죽고, 너를 고귀한 공주처럼 떠받들던 펠릭스가 없으니. 네가 어떤 꼴이 될지.

그 두 사람이 없이 결국 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하찮은 어린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야. 그 비참함을, 이제부턴 네가 느낄 차례야.’

다이앤은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부터 어렵게 걸머쥔 권력을 멋지게 휘두르려면 잠을 푹 자 둬야 했다.

장의사가 정성껏 꾸민 아빠의 얼굴은 잠이 든 것처럼 평온했다. 금세라도 눈을 뜨고 ‘우리 일레인 왔구나’ 하며 웃으실 것만 같아서 가슴은 미어졌다.

“흐흑.”

침착하게 아빠의 몸을 덮고 있는 흰색 모슬린 천을 들추던 일레인이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크라몬드 백작의 배는 엉망으로 찔려 있었다.

“어휴, 일레인 영애…….”

닥터 챔프만이 어깨를 두드렸다.

한참이 지나서 일레인은 의사에게 상처와 단검을 비교하라 일렀다.

닥터 챔프만이 돋보기를 들이대며 상처를 상세히 살피고, 일레인이 건넨 단도의 칼날과 배의 상처를 비교했다.

“옆구리의 상처는 비슷한 키의 사내가 찌른 것이 맞습니다. 정면에서 왼손으로 어깨를 잡아당기면서 오른손으로 찔렀어요. 키는, 아마도 백작님과 비슷하겠지만 힘은 그닥 세지 않고, 칼질에 서툽니다. 여길 보세요.”

상처가 깊지 않았다.

“급소도 아니고, 몸에 힘이 빠져 쓰러지는 정도의 타격을 준 자상입니다. 백작님의 목숨을 앗아간 건 복부의 자상입니다. 쓰러지신 뒤에 위에서 아래로 찌른 것 같습니다. 상처를 보면 깔끔하지 않아요. 힘이 약해서 상처가 깊지 않은데, 내장과 비장이 찔리면서 출혈이 많으셔서…….”

의사의 시선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를 앙다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일레인을 보았다.

일레인은 소리를 내지 못해서 대신 온몸으로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서 의사는 불쑥 덧붙였다

“고통은 길지 않으셨을 겁니다, 일레인 영애. 그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상처가……, 깊지 않고, 후으.”

일레인은 자꾸 흘러나오는 눈물과 오열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아빠의 차가운 몸에 엎드려 통곡하고 싶었다.

“두 상처 모두, 깊지 않다는 건, 해적이 만든 게 아닐 수, 있다는 거 아니에요?”

“……!”

일레인의 물음에 의사의 눈이 환해졌다.

“아, 예. 예. 영애. 그렇습니다. 이 상처는 정말로 칼질에 능한 자들의 솜씨라고 보기엔 너무 얕고 서툽니다.”

“…….”

일레인은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아빠의 상처 부위를 해부도에 나온 그림처럼 상세하게 그렸다.

정말로 초인적인 자제력과 판단력이라고, 의사는 새삼 일레인 크라몬드에게 감탄하고 말았다.

“경관에게 지금 이야기를 증언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영애. 최선을 다해 증언하겠습니다.”

그림으로 기록을 끝낸 일레인은 흰 모슬린 천을 들어 다시 아버지의 헐벗은 몸을 가렸다.

이제, 울어도 될 시간이었다.

“잠시 아버지와 둘이만 있고 싶어요. 모두 나가 주세요.”

의사와 뷰컴, 그리고 안나까지 모두 교회에서 나갔다.

일레인은 백작의 손을 잡아 눈물이 흥건한 뺨에 가져다 대었다.

“아빠!”

으흐흐흑. 짐승 같은 신음과 함께 눈물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일레인은 온몸으로 울었다.

고통 속에 죽어 간 아빠와, 죽어서도 차마 엄마와 아이 걱정에 편히 잠들지 못할 아빠의 영혼과. 든든한 울타리를 잃고 험한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가여운 엄마와, 아빠의 사랑 없이 클 유복자 동생과.

그 모든 걸 짊어지고 아빠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야 할 자신과. 그리고 다이앤. 수상쩍은 다이앤까지.

죽은 자와 산 자 모두를 연민하며 일레인은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몸의 수분이 모두 빠져나간 듯 눈물마저 나오지 않을 지경이 되었을 때 누군가 일레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일레인, 그만. 그만, 울어.”

엄마였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딸을 찾아, 그리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자신을 감싸 준 남편을 찾아 바이올렛이 교회로 온 거였다.

“네가 이렇게 울면, 윌슨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니.”

“엄마.”

일레인은 흐느끼며 옆으로 비켜났다.

일레인의 자리에 선 바이올렛이 퉁퉁 부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백작의 쭈글한 이마와, 더 이상 깜박이지 않는 눈썹과, 숨을 쉬지 않는 콧날과, 그리고 늘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여 주던 입술을 쓸었다.

아아, 여보. 당신 얼굴이 왜 이렇게 차가운 거예요. 늘 따스한 온기로 나의 온몸을 덥히던 당신 입술은 또 왜 이렇게 파랗게 질려 있는 거예요.

아아, 윌슨. 나도 당신 따라가고 싶어. 죽고자 하는 날 건져 내어 살려 내 이제까지 살아 있게 한 당신이 떠났으니, 나도 이 생에 더 미련은 없어요.

그렇지만 일레인이 말했어요. ‘엄마 노릇’ 제대로 하라고.

이제까지 ‘아내 노릇’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당신을 보냈어요. 딱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 봤으면 조금 덜 마음이 아플 텐데.

차라리 기절해 이 모든 걸 잊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바이올렛은 일레인의 눈물로 흠뻑 젖어 있는 백작의 손을 가져다 불룩한 배에 대었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차가운 뺨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윌슨, 윌슨. 나, 당신 덕에 철없이만 살아서. 그래서 이 아기, 당신이 내게 준 이 아기 클 때까지 엄마 노릇은 제대로 하다 갈게요. 날 지켜 줘서 고마워요, 윌슨. 이제부턴 내가 당신의 아이들을 지킬게요. 미리 강해지지 못한 거 미안해요. 그렇지만 이제부터라도 강해질게요. 그러니까 내 걱정도, 배 속 우리 아이 걱정도 말고 편히, 편히 천국으로 가요.”

엄마는 강했다.

일레인이 말한 것처럼 아기를 지키기 위해, 바이올렛은 입술을 깨물며 슬픔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일레인은 엄마를 살폈다. 워낙 뼈대가 가는 몸에 살이 거의 찌지 않아서 헐렁한 상복으로 배를 가리면 임신 사실은 당분간 숨길 수 있었다.

일레인은 아빠의 뺨에 입술을 대고 있는 엄마를 천천히 일으켰다.

“엄마, 날이 밝으면 조지가 와서 백작 작위를 요구할 거예요. 엄마는 이 아기가 무사히 태어날 때까지 임신 사실을 숨겨야 해요.”

바이올렛의 새파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나 전처럼 울먹거리는 대신 바이올렛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걱정하지 마.”

지킬 거니까. 목숨 걸고 이 아기를 지켜낼 거니까.

도와줘요, 여보.

* * *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충격과 슬픔의 밤에도 새벽은 찾아왔다.

아빠의 죽음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믿음을 참담하게 배신하는 소식이 일레인을 깨웠다.

“아가씨, 아가씨.”

늦게까지 아빠의 곁을 지키다 침대에 쓰러져 눈을 붙인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은 새벽 네 시. 다크서클이 짙어진 얼굴로 안나가 일레인을 흔들어 깨웠다.

“조지 크라몬드 씨가 왔어요. 그런데…….”

옷을 입은 채로 잠들었던 일레인은 바로 일어나 검은 숄이 달린 모자부터 찾아 썼다.

상주 역할도 해야 하지만 표정을 숨겨야 했다. 다이앤이 아빠의 죽음과 연관된 것을 거의 확신하는 일레인은 필경 조지도 그 사악한 음모의 한 자락을 담당했으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이어진 안나의 말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왕실의 시종장도 함께 왔습니다.”

“무어?”

조지야 반쪽짜리 동생이어서 왔다지만 왕의 시종장이 왜.

심장이 쿵쾅쿵광 사납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