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아빠가 안 계시는 세상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호위단장에게 일레인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왜 아버지께서 이 시간에 숲 속에 가셨던 것인가요? 호위도 없이?”
“다이앤 아가씨와 잠시 거니시겠다고 호위를 모두 물리셨습니다. 저쪽 엘라드 숲으로 가시기에, 평소 그곳엔 아무것도 없는지라…….”
“다이앤과, 둘이서요?”
“예, 다이앤 아가씨도 단검에 찔리셔서. 으흐흑. 죽여 주십시오.”
일레인은 고위 왕족이 사용했을 법한 단도와 자책과 공포로 커다란 어깨를 떨고 있는 호위대장을 번갈아 보았다.
‘이 자는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느끼고도 은폐하는 것인가.’
하필 이 깊은 밤중에 다이앤과 아빠가 좀처럼 발걸음을 하지 않는 숲에 간 것도, 다이앤이 아라비아 칼을 보고 콕 집어서 ‘바르바리’라고 말한 것도.
모두 미심쩍은 점 투성이인데, 왜!
‘저 자를 믿을 수 있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아빠의 죽음 뒤에 있는 배후를 밝히고, 그리고 엄마와 배 속의 동생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다이앤도……?’
아니!
일레인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다이앤은 아빠의 죽음에 제대로, 해명해야 할 거야!’
치솟는 의심을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일레인은 평생 아빠와 함께 육지든 배든 동행해 왔던 호위대장에게 말했다.
“호위를 못한 죄는 배후를 밝히는 것으로 속죄하세요, 카니에 경. 사람을 풀어 주변 마을에서 여기로 오는 길목에서 수상한 자나 평소 마을 사람이 아닌 자를 보았는지 샅샅이 찾아내고, 이 단검이 어디에서 왔는지 찾아내야 합니다!”
“예, 아가씨. 예. 그런데…….”
눈을 찡그리고 뭔가 망설이던 호위대장이 결심한 듯 말했다.
“그 단검은 지난번 바르바리 소탕 때 해적의 근거지에서 압수한 물품 중 하나와 아주 유사합니다. 해적 우두머리 놈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 오스만의 장수가 술탄에게서 하사받은 거라며 바쳤던 것과 아주 유사합니다.”
모로코 바르바리 해적 잔당의 습격을 뒷받침하는 증거물이란 소리였다.
“…….”
분노가 슬픔을 차갑게 식혔다.
이 단검을 실마리로 아빠를 죽인 자를 찾아낼 것이고, 찾아낸 놈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갈가리 찢어 죽이고 말 것이다.
일레인은 단검의 손잡이를 꽉 틀어쥐었다.
“그런데, 아가씨.”
뷰컴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조지 크라몬드에게도 연락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먼저 연락하지 않아도 곧 들이닥칠 것이니, 먼저 연통하는 편이 모양새가 낫습니다.”
“…….”
일레인은 눈을 꾹 감았다. 머리가 윙윙 울렸다.
‘벌써 백작 작위를 둘러싼 논의가 시작되었구나.’
작위를 이어받을 조지가 엄마의 배 속 아기 존재를 몰라야 한다!
새삼 이제 정말 아빠가 세상에 안 계시다는 사실이 비통하게 실감이 났다.
일레인은 눈을 떴다.
“발 빠른 말로 조지에게 연통하고, 게인즈 씨께 상속 전문 변호사와 함께 빨리 오시라고 전하세요.”
“예, 아가씨.”
이제 다이앤을 보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일레인은 안나를 앞세워 다이앤의 처소로 향했다. 피가 엉겨 붙어 있는 단검을 여전히 손에 꽉 움켜쥔 채였다.
다이앤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우아하게 잠들어 있었다.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피가 배어난 붕대가 둘려져 있지만 않다면 평화롭게만 보일 정도였다.
일레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다이앤의 온몸을 샅샅이 살폈다.
“충격이 워낙 커서 의식을 잃으셨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십니다, 아가씨.”
다이앤을 진찰한 의사가 말했다.
“상처는 어떤가요?”
일레인이 침착하게 물었다.
“다행히 칼날이 깊게 파고들진 않았습니다. 흉터는 가늘게 남겠지만 잘 아물 것이에요, 일레인 영애.”
“네…….”
일레인은 사람 좋아 보이는 평온한 의사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자상에 대해서 좀 아시나요, 닥터 챔프먼?”
“자상이라면, 예. 예.”
가끔 사건을 수사하는 경관에게서 피해자의 상처를 살펴 줄 것을 의뢰받았다.
“그럼 다이앤의 상처도 면밀하게 살피셨나요?”
입으로는 의사를 추궁하면서 일레인의 시선은 다이앤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미동도 없던 다이앤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진동했다.
“상처가 깊지 않아도 그냥 놓아두면 탈이 날 수 있지요. 꿰매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꿰매기까진…….”
우물거리던 의사는 일레인의 날카로운 압박 앞에서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예, 아가씨. 아까 꿰맬까 고민하다가 봉합 자국이 흉터로 남을까 걱정되어서 그냥 지혈제를 붙이고 붕대로 덮었습니다만, 아무래도 날도 더워지니 꿰매는 것이 안전하지요.”
“그럼, 풀어서 꿰매세요.”
일레인의 말에 다이앤이 눈을 떴다. 짙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일레인을 바라보았다.
“일레인, 드레스 입어야 하는데, 지네 발처럼 흉터가 지면…….”
입술을 파르르 떨며 애원하는 다이앤의 모습에 의사는 붕대를 풀려던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그러나 일레인은 가차 없었다.
“안나, 붕대 풀어.”
안나가 지체 없이 달려들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나, 머리가 너무 아파. 그 흉악한 놈이 달려들어서, 아아아, 아빠!”
가녀린 몸을 부들부들 떠는 다이앤의 모습은 정말로 가여워 보였다. 그러나 일레인의 시녀 안나는 일레인처럼 단호했다.
붕대가 벗겨져 나가자 부러질 듯 가는 팔 상단에 찔린 상처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닥터 챔프먼, 이 상처가 이 단도로 찔린 상처가 맞습니까?”
일레인이 백작의 피가 엉겨 붙은 아라비아 단도를 내밀었다.
백작을 해한 흉기가 나오자 갑자기 진지해진 의사가 일레인의 손에서 단도를 받아들고 다이앤에게 다가섰다.
“아악, 저리 치워요. 무서워. 아아.”
다이앤이 발작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름다운 금색의 머리칼이 나풀거리며 하얀 종잇장처럼 질린 얼굴을 가렸다.
“수잔, 안나!”
백작가의 어린 아가씨가 낮은 목소리로 단호히 부를 땐 조금의 자비도 없다! 백작가를 지배하는 불문율이었다.
수잔과 안나가 단호하게 다이앤의 다리와 팔을 잡아 버둥거리지 못하게 했다.
“상처를 보면 어느 정도의 키의 사람이 어느 정도의 힘으로 찔렀는지 구별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닥터 챔프먼. 구별하실 수 있으신가요?”
“그, 그건.”
순식간에 살벌한 기운을 내뿜는 백작가 영애의 태도에 의사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뭔가, 신중하게 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이 둥근 이마를 짓눌렀다.
“그런 걸 어떻게 아시나요?”
귀한 백작가 영애께서 어찌 이런 것까지 아시는가. 의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인물화를 잘 그리기 위해서 해부학을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해부학 해설서에 의사들께서 때로 범인을 찾는데 협조하기 위해 상처의 종류를 공부한다고 쓰여 있었어요.”
사실은 펠릭스 덕분이었다. 떠나기 전날 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직접 사형수의 시체를 해부해서 인체를 파악했다면서, 그의 벗은 몸을 손끝으로 만져 보라고 했었다.
펠릭스의 말에 자극을 받은 일레인은 그 이후 인체 해부도와, 해부학의 실제 쓰임에 대해 공부를 해 오고 있었다.
의사가 감탄의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저도 가끔 경관에게 협조를 하지요.”
“!”
의사의 말에 다이앤의 눈빛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너, 너! 날 의심하는 거니? 감히, 어찌! 나한테.”
“아니야, 다이앤. 네 상처로 아빠를 찌른 자의 체격과 특징을 알아내려는 거야.”
다이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나칠 정도로 총명한 일레인은 언제나 부담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징그러울 정도였다.
일레인은 안나에게 명했다.
“안나,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 다이앤의 상처를 그려 기록해 놓아야겠어. 그래야 범인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테니.”
“예, 아가씨.”
안나가 다이앤의 팔을 놓고 달려 나갔다.
다이앤은 이제 움직이지 않고 얌전하게 누운 채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흥, 상처로 뭘 알아낸다고. 그런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어.’
조지는 이곳에 올 때 아랍인 복장을 하고 왔다. 바르바리 해적 잔당이 백작을 죽였다는 걸 부러 보이기 위해서였다. 조지의 행적이 의심받을 경우에는 조지의 어머니랑 친했던 여배우가 오늘 밤 함께 있었다고 증언하기로 되어 있다.
다이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날이 밝으면 여왕의 사자와 함께 조지가 올 것이고. 그러면 일레인, 너도 끝이야. 허세로 사람 기를 죽이려 들기나 하는 너도 내일은 끝장이라고.
닥터 챔프만이 칼날을 상처 가까이 대어 보고, 손에 쥐고 허공에 휙휙 칼질 흉내도 내보며 다이앤의 상처에 대해 조사를 했다.
그 틈을 타 일레인은 다이앤에게 물었다.
“습격한 자가 하나야, 무리야?”
“하나, 하나였어. 아빠랑 숲에 갔는데, 흐으흐흑.”
일레인이 자꾸 파고들자 다이앤은 몸을 떨며 처연하게 울었다.
“울지 말고, 다이앤. 아빠를 해친 자를 찾아내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것이 자식의 도리니, 기억을 더듬어 내.”
찢어 죽이겠다니. 뭐든 한다면 해내고 마는 일레인이 찢어 죽이겠다니.
이전이라면 등줄기가 서늘하게 두려웠겠지만, 다이앤은 이제 일레인이 두렵지 않았다.
너는 입으로만 찢어 죽이겠다고 떠들어대지만, 내 손엔 이미 죽은 자의 피가 묻어 있지.
너 따위, 운 좋아 백작의 친딸로 태어나 온갖 위세는 다 떨어온.
너 따위!
다이앤은 우는 척하길 멈췄다. 그리고 담담하게 일레인의 눈을 보며 진술했다.
“아빠랑 숲속에 들어갔을 때, 갑자기 커다란 나무 둥치 뒤에서 사람이 튀어나왔어.”
‘나무 둥치 뒤’란 말을 일레인은 잘 새겨두었다. 안개가 짙었으니 땅이 젖었겠고, 그러면 범인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 거였다.
“얼굴이나 키는? 옷자락은? 본 걸 상세히 말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어. 범인이 칼을 휘두를 때 아빠는 날 밀쳐 보호하셨고, 그 바람에 내가 넘어진 새 아빠가, 흐흑, 아빠가.”
“그럼 팔은 언제 다친 거지?”
본능적으로 다이앤은 이 질문이 아주 중요하다는 걸 간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