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제대로 엄마 노릇을 좀 해 봐
긴 횃불이 꼬리를 물고 백작저로 몰려오고 있었다.
일레인은 눈을 감고, 다시 가슴을 들이쉬며 숨을 쉬기 위해 애를 썼다.
아까 뷰컴이 소리칠 때처럼 무어라고 사방에서 웅웅 웅얼대는 소리만 가득한 가운데, 일레인 앞으로 다가온 이들이 들것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들것 위에 천에 덥힌 사람의 형체가 미동도 없이 누워만 있다.
일레인은 굽혀지지 않는 무릎을 억지로 꺾어 들것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뻗어지지 않는 팔을 억지로 내밀어 천천히 천을 들췄다.
아빠가, 내 아빠가 비틀린 표정으로 누워 계신다. 늘 눈을 접어 웃던 크라몬드 백작이 고통에 찌든 표정으로. 무엇인가 몹시 놀란 표정으로.
일레인은 천천히 백작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빠, 일어나요. 이게 뭐야.”
아무리 쓰다듬어도 손바닥 밑의 아빠 얼굴은 차갑기만 하다.
“일어나요. 아직 여름이 온 것도 아닌데 밖에 누워 계시니 이렇게 차갑잖아요.”
아아, 아빠. 이만 일어나 엄마한테 가요. 이제 곧 동생이 태어날텐데, 아빠가 곁에 있어 주셔야죠.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아빠는 눈을 뜨시지 않는다.
“이만 일어나시라니까요! 이제 그만 들어가요, 아빠!”
보다 못한 안나가 일레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가씨, 그만 하세요. 네? 아가씨이!”
안나가 울며 애원하고 나서야 일레인은 아빠의 목에 손가락을 올려 확인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맥박이 뛰지 않는다. 펄떡펄떡 뛰어야 할 목의 맥박이 이미 움직임을 멈췄다.
아아. 아빠! 내 아빠!
그제야 메마른 눈에 비로소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빠! 나를 두고. 펠릭스도 없는데, 나를 두고. 엄마를 두고. 배 속의 동생은 어떻게 하라고, 아빠.
울음이, 원망이 입 밖으로 자꾸 비집고 터져 나오려 한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습관은 집요하고 강력했다.
마음은 슬픔과 절망으로 울부짖는데 일레인 겉껍질은 해야 할 일을 이미 차질 없이 시작했다.
집사장 뷰컴에게 먼저 관내 경찰서와 교구 목사에게 사람을 보내라고 명한다. 또 장의사를 불러 아빠의 유해를, 아아, 생명이 빠져나간 나의 아빠를 가족 예배실로 모시고 입관을 준비하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안나를 따라 다이앤을 보러 가려고 몸을 일으킬 때였다.
“아가씨, 백작 부인께서…….”
보리스 부인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주무시고 계시지 않나요?”
“깨어나셔서 백작님만 찾고 계세요. 밖이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계속 주무시는 것이 더 이상하지요.”
“…네.”
밤낮으로 아빠의 품에 안겨 있었던 엄마였으니, 진정 향을 피웠어도 허전해서라도 당연히 깨어날 것이다.
“다이앤은, 깨어났나요?”
보리스 부인과 함께 엄마의 거처로 향하며, 일레인은 다이앤의 안부를 물었다.
“닥터 챔프만께서 아침까지 깨지 않는 약물을 먹이셨어요. 상처가 깊지 않아 출현은 많이 없었지만…….”
보리스 부인은 좌우를 살피고 일레인에게만 들리도록, 빠르게 속삭였다.
“좋지 않은 일을 당하신 것 같다고…….”
“!”
충격을 받은 일레인은 발을 헛딛으며 휘청, 쓰러지려는 몸을 벽을 잡아 지탱했다.
정말로 찌른 자가 따로 있어 겁탈까지 당한 것인가, 아니면 둘이서 공조 후에 그 끔찍한 짓을…….
무엇이 되었든 가슴이 찔린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아 일레인은 다시 가슴을 텅텅 치며 숨을 들이마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가씨!”
보리스 부인이 다가와 부축하려 했다.
“아니, 아니. 난 괜찮아요. 닥터 챔프만에게 다이앤의 일은 절대 밖으로 새서는 안 된다고 말하시고요. 좀 있다가 나 좀 보자고.”
하나마나 한 말이지만 일레인은 당부했다.
비밀은 종이에 엎질러진 물 같아서 결국 새어 나가고 마는 것을.
일레인은 엄마의 침실 문 앞에서 쉽게 문을 열지 못했다. 엄마에게 아빠의 죽음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할 일이 태산이었다. 일레인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일레인! 윌슨이, 윌슨이 왜 돌아오질 않는 거니? 다이앤이랑 산책 나간 지가 언제인데!”
일레인을 보자 바이올렛은 이미 울어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에 다시 눈물을 매달았다.
늘 눈물부터 떨구는, 어린아이같이 연약한, 가여운 내 엄마.
“엄마!”
그러나 엄마, 이제 엄마는 강해지셔야 해요. 강해져야 배 속 아기를 지킬 수 있어요.
일레인은 쿠션을 등에 댄 채 침대 머리에 기대 눈물을 펑펑 쏟고 있는 엄마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임신 때문에 부어오른 엄마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엄마. 바이올렛 크라몬드 백작 부인. 울지 말고 내 말 잘 들어요. 무슨 이야기를 듣든 엄마는 배 속의 아가만 생각해요. 엄마는 아기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그거만 생각해요.”
“…일레인?”
불안한 예감에 불현듯 사로잡힌 엄마가 손을 빼려했다.
그러나 일레인은 더욱 꽉, 아프도록, 너무 아파서 엄마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세게 엄마의 손을 걸머쥐었다. 그리고 빠르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빠는, 크라몬드 백작께선 돌아가셨어요.”
“……?”
바이올렛은 뒤로 몸을 뺏다. 일레인에게서, 이렇게 무서운 이야기를 전하는 일레인에게서 도망치려는 듯 몸을 뒤로 빼며 가냘프게 웃었다.
“일, 일레인. 무슨 그런 흉악한 농담을…….”
엄마의 일그러진 눈주름을 따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엄마……!”
“…일레인, 아니라고 말해야지.”
엄마가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만 엄마 놀리고 어서 아빠 불러 와. 아빠가 자장가를 불러 주어야 잘 수 있단…….”
일레인은 더 참지 못하고 엄마의 가느다란 어깨를 세게 쥐었다.
“엄마, 제발, 정신을 차리시라고! 조지가 백작위를 계승하면, 배 속 아기를 그냥 둘 거 같아?”
“거, 거짓말! 그럴 리가. 다이앤이랑 산, 산책을…….”
무서운 힘으로 일레인의 손을 떼어 낸 엄마가 머리를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윌슨! 아아, 윌슨! 거짓말이야, 윌슨! 나의 윌슨! 돌아와! 돌아와요!”
우울증 발작이었다. 곧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찧어댈 자해를 동반하는 발작.
일레인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아빠께서 얼마나 지극하게 엄마를 사랑했는지, 그 사랑 안에서 엄마가 얼마나 지극히 평화로웠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아빠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은 나머지 정신을 놓아 버리는 발작으로 치닫는 엄마의 절망을 그 어느 때보다 절절하게 이해했다.
그러나.
“엄마!”
일레인은 다시 엄마의 가녀린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엄마, 정신 차세요. 그렇게 울기만 하다간, 아빠가 남긴 아기를 잃는다고! 제발 정신을 차리고, 평생 한 번이라도 제대로 엄마 노릇을 좀 해 봐! 엄마 노릇을!”
‘엄마 노릇’이라는 말에 바이올렛이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일레인은 엄마의 손을 부푼 배 위에 올려놓았다.
“엄마, 이 아기는 지켜야죠. 아기 지키려면 지금부터 정말 정신 단단히 차려야 해요. 아빠를 위해서, 평생 우리를 지극히 사랑한 아빠를 위해서, 제발, 엄마.”
일레인의 호소에 응답이라도 하듯 일레인과 겹쳐진 바이올렛의 손 밑에서 툭툭 발을 치는 아이의 태동이 느껴졌다.
“아아. 아가. 흐윽, 윌슨. 아아, 윌슨. 이 아기, 우리 아기.”
바이올렛은 잠옷 위로 배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나 아까처럼 발작적인 울음은 아니었다.
“엄마. 내가 엄마를 지켜 줄게요. 그러니까 엄마는 이 아이를 지켜요. 아빠가 세상에 남긴 이 아기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엄마.”
바이올렛이 온통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일레인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래, 그래. 그래. 지켜야지. 윌슨의 아이. 아아, 윌슨의 아이니까. 흐흐흑.”
모정은 강했다.
아이가 없었더라면 정신을 놓아 버렸을 엄마는 가냘픈 몸에 남은 모든 힘을 모아 정신을 여미고 아이를 지킬 용기를 냈다.
두 사람은 꽉 껴안아 온기와 슬픔과 절망을 함께 나눴다. 슬픔에 떠는 어깨를 서로 보듬으며, 서로를 지키고 아기를 지킬 힘을 서로에게 주었다.
한참의 울음 뒤에, 일레인은 몸을 떼어 냈다.
“엄마, 나는 다이앤 좀 보러 갈게요.”
“다이앤은? 다이앤은 괜찮니? 아빠가 저리 되셨으면…….”
윌슨 크라몬드의 유리 온실 속에 평화롭게 살아온 백작 부인은, 다이앤이 어떤 절망과 어떤 야망으로 나날이 사악해져갔는지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조금 다쳤지만 괜찮대요. 다이앤 보고 돌아올 테니까 그때 같이 아빠 보러 가요. 혼자 가지 말고, 응?”
“그래. 어서, 다이앤한테 어서 가 봐.”
일레인은 보리스 부인을 불러놓고 엄마의 침소에서 나왔다. 밖에서는 뷰컴과 함께 평소 아빠를 근거리에서 호위하던 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다이앤 아가씨가 이걸 쥐고 있었습니다. 바르바리 해적 놈의 짓이라 소리치고 정신을 잃으셨는데, 이 단도가 백작님과 다이앤 아가씨를 찌른 흉기 같습니다.”
호위대장이 피가 엉겨 붙은 단검과 칼집을 내밀었다.
대낮처럼 저택을 환히 밝힌 불빛 아래 생선 가시 모양으로 무늬를 넣은 휘어진 단검이 흉흉하게 빛을 냈다.
일레인은 아빠를 찌른 자가 쥐었을 손잡이를 쓸었다.
장미목에 덩굴무늬가 정교하게 장식된 손잡이를 가진 단검. 그리고 피가 묻어 있지 않은 칼집도 장미목에 은으로 손잡이와 같은 덩굴나무 무늬를 입사한 최고급품이었다.
“아랍 쪽에서 사용하는 단검입니다, 아가씨. 거기 손잡이 아래쪽에 아라비아 어로 무어라 적혀 있습니다.”
아라비아면 아라비아지, 다이앤은 왜 이걸 바르바리 해적의 짓이라 소리친 걸까.
일레인의 의구심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평소 백작을 최근접에서 호위하던 대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했다.
“저번에 소탕한 모로코 바르바리 잔당이 앙심을 품고 습격한 것 같습니다. 흐윽, 백작님을 지키지 못한 죄, 죽어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