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너의 전부, 전부를, 다
매사 엄격하게 자신을 절제하는 일레인이 이리 막무가일 정도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진실로 기뻤고.
그런 일레인을 당장 안을 수 없는 현실이 또한 고통이었다.
“일레인, 너는 내 인생의 등대야. 어둡고 불안정하고 초라해서 어떻게든 벗어나려 안간힘만 쓰던 내 인생에 빛을 비추는 등대.”
펠릭스의 손이 천천히 일레인의 망토를 벗겼다. 망토는 스륵 어깨에서 미끌어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일레인은 펠릭스이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스스로 벙벙한 울 드레스를 어깨 아래로 끌어 내렸다. 잠옷으로 입는 톡톡한 코튼 슈미즈 위로 불룩 솟은 가슴의 정점이 벌써 도드라졌다.
일레인은 이어서 천천히 슈미즈를 지탱하고 있는 목 아래 여밈 끈으로 손을 올렸다.
“펠릭스, 당신을 가지고 싶어.”
나를 가지고 싶다고, 일레인이 나의 눈을 오롯하게 들여다보며 말한다. 일레인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욕망과 슬픔에 젖어 잘게 진동한다.
나는 손을 뻗는다.
욕망으로 들썩이고 있는 목 아래 저 끈을 풀면 이미 수십 번 눈에 담았던 새하얀 어깨가 드러나리라. 그리고 그 아래, 그토록 베어물고 싶었던, 손끝으로만 느껴 봤던 가슴이 보이리라.
나의 손가락이 스르륵 일레인의 슈미즈를 끌어 내리면, 창백한 불빛 아래 알몸으로 선 일레인의 흰 살결엔 추위 때문에 오소소 소름이 돋겠지.
나의 손은 아직 사내의 입술이 닿지 않았던 가슴을 거쳐, 그리고 납작하고 보드라운 배꼽을 지나, 수풀 속에 숨겨진 그녀의 비너스를 찾아들 것이다.
아아아. 일레인.
펠릭스는 손을 내밀어, 막 끈을 풀려 하는 일레인의 손을 잡아 꽉 쥐었다.
“펠릭스, 나는.”
일레인이 떨리는 입술로 고개를 잘게 흔든다.
“나는 너를 가지고 싶어. 네가 내 곁에 없는 동안 내 몸에 새겨진 너의 체온을 되새기며.”
“일레인, 나도 널 가지고 싶어.”
펠릭스는 천천히 일레인의 손을 끌어 이미 고통스럽게 부풀어 오른 자신의 중심에 대어, 자신의 욕망도 일레인의 욕망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해 주었다.
“나도 널 열망해, 일레인. 몹시, 몹시.”
“그런데, 왜?”
왜, 날 밀어내는 거야.
슬픔과 실망과 의심이 깃든 일레인의 갈색 눈동자에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펠릭스는 일레인을 당겨 안았다. 어린 아이를 안 듯 조심스러운 포옹이었다.
하아, 가빠진 숨을 뿌리며 어깨에 기대 오는 둥근 정수리에 펠릭스는 잘게잘게 키스를 뿌리며 속삭였다.
“일레인, 우린 아직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오늘 내가 너를 가지면, 그러면 아이가 생길지도 몰라.”
아아, 펠릭스.
일레인은 이제야 왜 펠릭스가 자신을 밀어내려 하는지 알게 되었다.
“상관없어, 펠릭스. 난 오히려 기쁠 거야. 네가 없는 동안 너의 분신을 키워 내는 건 오히려 더 큰 기쁨이 될 거야.”
“아니, 아니야, 일레인.”
펠릭스가 조심스럽게 일레인을 밀어내고 눈을 맞췄다.
“나는 사생아의 고단한 삶을 우리 아이에게 주고 싶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세간의 따가운 눈초리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아.”
너와 우리 아이를 어머니와 나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일레인.”
펠릭스가 이미 눈물에 젖기 시작한 일레인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돌아오자마자 일레인, 우리 교회에 가자. 그날로 당장 혼인을 하고, 그리고 영원히 함께하는 거야.”
“…….”
“그리고 그날부터 우리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아니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더라도 영원히 함께일 거야.”
“…….”
“대답해 줘, 일레인.”
펠릭스가 애원했다.
이미 젖어든 눈동자에 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일레인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펠릭스.”
펠릭스의 입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둥근 이마에, 울어 빨개진 콧등에, 부푼 입술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내처 격한 감정과 흥분에 부풀었다 사그라드는 목과 쇄골 곳곳에 자잘한 키스를 뿌렸다.
“그런데, 펠릭스.”
온몸을 무방비하게 펠릭스의 입술에 내어 준 채 일레인이 속삭였다.
“나는 여전히 널 눈에 담고, 손끝으로 느끼고 싶어. 네가 없는 동안, 네가 저 바다 저 대륙 어디쯤 가 있을까 셈하며, 너를, 그리고, 싶어.”
펠릭스를 몹시 사랑하는 일레인은 결국 화가였다. 몸에 새겨 넣지 못한다면 화폭에라도 새겨 넣어야 그의 부재를 견딜 수 있는 화가.
“일레인, 일레인.”
탄식하듯 일레인의 이름을 거듭 부른 펠릭스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욕심쟁이 일레인 크라몬드. 너는 정말 위대한 화가가 될 거야.”
일레인의 코를 퉁, 튕기며 한참을 웃은 펠릭스가 일레인의 머리 위로 한참 늘어난 울 드레스를 씌웠다. 그리고 망토까지 입혀 단단히 여미고는 자신도 두꺼운 망토를 집어 들었다.
“난로에 불을 붙여도 되겠지? 불빛이 새어 나가면…….”
“괜찮아, 커튼을 치면 돼.”
작업실에서 빛의 세기에 따라 다양한 색채를 구현해 보기 위해 일레인은 여러 종류의 커튼을 커다란 유리창에 달아 두었다. 모두 다 한꺼번에 내리면 불빛 하나도 새어 나가지 않으리라.
“문은?”
“응, 문 옆 세 번째 화분 밑에, 열쇠를 놓아둬.”
일레인이 왕궁으로 그림을 그리러 간 사이 엄마가 물감이나 종이, 붓 등을 찾을까 봐 여벌로 마련해 둔 열쇠였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어둠 속을 헤쳐 저택 뒤쪽, 숲과 가까운 외딴 작업실에 새어들었다.
펠릭스는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일레인은 화로에 불을 붙여 찻물을 데웠다. 타닥타닥, 잘 말린 장작이 따스한 열기를 내뿜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펠릭스가 일레인을 당겨 뒤에서부터 폭 안고, 어깨에 턱을 올리고 물었다.
“어떤 모습을, 그리고 싶어?”
일레인은 고개를 한껏 제껴 그의 뺨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펠릭스, 너의 전부, 전부를, 다.”
나의 전부를 다.
욕심 많은 일레인의 대답에 펠릭스가 낮게 웃으며 일레인에게서 몸을 떼었다.
일레인의 시선을 오롯하게 받으며 펠릭스는 천천히, 그날 우물가에서처럼 망토를 벗고 또 셔츠를 벗었다. 신이 빚어낸 궁극의 인체인 듯싶은, 덜어낼 것도 더할 것도 없이 자잘한 근육으로 탄탄한 상반신이 일레인 앞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어쩌면 거절해 주어서 다행인지도 몰라.’
저렇게 아름다운 몸이 내 몸에 단 한 번이라도 각인되면 그 이후 영영 그의 부재를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영영 잊지 못해 괴롭다 해도 역시 나는, 펠릭스를 가지고 싶어.
체념 되지 않는 갈망과 욕망을 억지로 삼키며 일레인은 가질 수 없는 이의 몸을 집요하게 눈에 담았다.
“포즈는?”
“그냥, 서 있어.”
꿀꺽, 긴장과 흥분과 욕망으로 스며나는 침을 삼키고 일레인은 얇게 깎아둔 목탄을 들었다.
슥슥, 흰 종이 위에 바지를 허리께 느슨하게 내려 입은 펠릭스의 상반신이 영원히 박제되었다.
“이리 와 봐, 일레인.”
일레인이 스케치를 마치자 펠릭스가 일레인을 불렀다.
일레인이 목탄을 놓고 펠릭스에게 다가섰다.
펠릭스가 일레인의 손을 잡아 불툭 튀어나온 가슴에 얹었다.
“아!”
일레인의 입에선 작은 신음이 새어났다. 늘 만지던 가슴인데도, 직접 보면서 손가락을 대는 건 옷 밑으로 더듬는 것과 확연하게 달랐다.
조금씩 흥분하는 자신과 달리 펠릭스가 너무 담담해서 일레인은 속이 상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펠릭스의 온몸은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어머니는 늘, 화가는 해부학에도 정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그린 해부도를 구해 보시기까지 하셨지. 그러니, 내 몸을 만져 봐, 일레인. 이 살결 아래 속근육은 어떠한지, 네 손으로 직접 느껴 봐.”
그러면 나를 더 선명하게 너의 캔버스에 가둘 수 있을 거야.
펠릭스가 일레인의 손가락을 펴 자신의 가슴, 옆구리, 그리고 그 밑의 갈비뼈를 만지게 했다.
스무 개의 손가락이 펠릭스의 몸을 느끼기 시작했다. 군살 없이 탄탄한 살결 아래 갈라지고 새로이 이어지는 근육의 결이 선명하게 손끝에 잡혔다.
펠릭스는 양손을 편히 내린 채 눈을 감았다.
일레인의 두 손이 양 옆구리를 스쳐 허리로 향한다. 망설이듯 이따금 멈췄던 손가락은 이내 잘록한 허리의 패임을 지나, 더 아래로, 그리고 더 앞으로 와 배꼽 아래로 모였다.
눈을 감고 있으니 감각은 오히려 선명해진다.
벽난로를 피웠어도 높은 층고의 돌벽에선 싸늘한 냉기가 스며 나온다.
춥다. 추운데 덥다. 일레인의 섬세한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꼬물꼬물 피어오르는 열기가 시시각각 뜨거워진다.
펠릭스의 숨결을 어쩔 수 없이 가빠지고, 잘 빚은 조각처럼 아름답게 자리한 가슴의 근육은 흉흉하게 부풀었다가 꺼지길 반복한다.
그만 만지라고 하고 싶기도 하고, 더욱 세게, 더욱 은밀하게 더더, 그곳까지 만져 달라고 하고 싶은 모순의 욕망이 몸을 휩쓴다.
이제까지, 이런 흥분을, 열망을 느껴 본 적이 없어 펠릭스는 이를 꽉 깨물어 흥분을 숨겼다.
일레인의 시간이기에.
일레인이 자신을 그림에 새겨 넣고 싶어하기에.
욕망을 숨기기 위해 이를 악물자 턱이 뻐근해 오고, 몸에는 자잘하게 땀이 솟는다.
일레인의 긴 손가락은 이제 등으로 향한다. 가지런히 튀어나온 목뼈를 훑은 손가락이 어깨를 만지고, 그리고 내려와 양쪽의 견갑골을 훑고 척추를 따라 주욱 내려온다.
일레인의 손가락이 척추를 따라 내려와 허리로 향할 때 저릿, 강렬한 흥분이 척추를 따라 머리를 어찔하게 만들었다.
“흐읏.”
참을 수 없는 흥분의 숨소리가 펠릭스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하아.”
덩달아 호흡이 가빠지는 일레인의 더운 숨결이 펠릭스의 등에 떨어진다.
온 신경을 간지럽히는 숨결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감질나게 온몸을 간지럽히는 숨결이 멀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가슴과 배꼽,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