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곁에 있어도 절절이 그리운데
“제가 크라몬드 상사의 지분을 삼십 퍼센트 획득하는 대가로 기존에 발행한 회사채는 다 부담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러니 백작께서는…….”
“윌슨, 윌슨이라고 부르게, 펠릭스.”
펠릭스가 난처한 얼굴로 상사 지분을 더 늘려 가지고 싶지 않다고 사양하려 할 때였다.
크라몬드 백작이 서운한 얼굴로 너무 격식 차리지 말고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르라고 타박했다.
“그래, 펠릭스 자네가 기존의 삼십 퍼센트에서 지분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아 하는 배려는 알겠네. 그렇지만 되찾은 상선과 물품을 모두 여왕께 바치는 바람에 또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겠지?”
비싼 이자를 지불하면서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펠릭스한테 지분을 넘기고 그 대가로 자금을 확보하겠다는 말이었다.
지체되고 있는 상선이 서너 척만 무사히 들어와도 풀릴 문제인데. 일시적인 자금 경색인데. 왜 굳이 지분까지 영구히 넘기면서!
펠릭스는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삼십 퍼센트도 사실 일레인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일레인을 주지 않겠다고 하면 자금을 압박해서 강제로 취하려고 했던 것인데.
‘일레인은 나를 상인의 사생아로 알고 있으면서도 제 사내로 선택해 주었지.’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게 행복한데 백작은 이제 정말로 아들을 대하듯 평생에 걸쳐 일군 상사의 절반을 넘기려고 하고 있다.
‘백작 부인의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일 수도 있다. 그 아이 몫을 줄여서 내게 주고자 한다.’
굳이 지분을 추가로 주지 않아도 펠릭스는 기꺼이 백작을 도울 작정이었다. 일레인의 아버지니까. 일레인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백작이 자신을 한집안 사람으로 신뢰하고 인정해 주는 것은, 일레인이 기꺼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 준 것만큼이나 감동이었다.
펠릭스는 푸흐, 깊은 심호흡으로 뭉클뭉클 솟아나는 눈물을 삼켰다.
“대신 그럼 이번 일은 제가 직접 가서 해결하겠습니다. 차이나와 인디아의 지사에 제가 가겠습니다.”
“…자네가?”
윌슨 백작은 존 게인즈를 보내려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노산이 될 바이올렛 곁을 꼭 지키고 싶었고, 또 펠릭스는 석 달 후에는 일레인과 혼인해야 하니 존 게인즈가 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내고 싶지 않아 하는 윌슨과 달리 존 게인즈는 반색했다.
“그게 좋겠네. 윌슨이 나더러 가라는데, 나야 뭐 이제까지 서류나 보고 재산이나 관리해서 사람도 잘 못 다뤄 큰 걱정이었는데. 지분 늘리면 공동 소유주가 되는 것이니 직접 돌아보는 것이 맞지. 오너가 가야 과감한 결정도 내릴 수 있고. 안 그런가, 윌슨?”
게인즈의 말에도 윌슨은 주저했다.
“인디아와 차이나에 들러 지사를 살피고 필요한 인재를 고용하고 하려면 족히 일 년은 걸릴 거야. 아무리 서둘러도 여덟 달 이상 걸릴 터인데…….”
범선의 크기가 대형화되면서 이전처럼 뱃길이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인도와 차이나에 가는 길엔 여러 위험이 도사렸다. 드넓은 바다 어디선가 대포를 쏴대는 해적 무리를 만날 수도 있고, 낯선 곳에서 풍토병에 걸릴 수도 있다.
자신도 이십 년 넘게 바다 위에서 살다시피 했으면서도 백작은 일레인의 남편이 될 펠릭스의 안위가 몹시 걱정스러웠다.
그게 또 펠릭스를 감동하게 했다.
“윌슨, 저 젊고 건강합니다. 장차 태어날 소백작이 소유할 상사가 아닙니까? 매부가 될 제가 잘 살피고 키워야지요.”
물론 그 상사의 절반은 나와 일레인의 아이도 절반을 소유할 것이다.
펠릭스는 그래서 더욱 직접 가야 했다.
“…그래. 그렇게 하세. 돌아오는 대로 일레인과 혼인하기로 하고. 당장이라도 결혼식을 올리게 하고 싶지만, 다이앤이 아직이라서.”
하루라도 빨리 짐머 왕자와 결혼식을 올리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다이앤은 어쩐 일인지 여름 지나서 그리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래도 짐머 왕자와 다정하게 지내고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저는 당장도 좋습니다, 윌슨. 정말로요.”
일레인을 안고 싶은 욕망에 밤이 두려운 펠릭스가 간절한 눈빛으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으핫핫, 펠릭스, 펠릭스!”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 백작이 호쾌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리하게 해 주고 싶지만, 알지 않나? 다이앤의 처지를. 그러니 자네가 너그럽게 이해해 주게.”
늘 일레인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불만인데 결혼식까지 일레인이 먼저 올리면 정말로 많이 서운해할 것을 염려 하는 백작의 정이었다.
펠릭스가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럼 저는 내일 어머님께 다녀오겠습니다. 열흘가량 걸릴 것입니다.”
일레인과 혼인하겠다고 통보한 이후, 서로 감정이 상한 채 이별한 것이 벌써 넉 달 전이었다. 먼 길 다녀오게 되었으니 가서 어머니를 뵙고 인사를 올려야 마땅하다.
“그럼 내가 필요한 걸 챙겨 배에 실어 놓겠네. 최고의 선장과 선원, 범선도 준비하고. 자넨 루덴을 거쳐 홀린 항으로 오면 될 걸세.”
게인즈 씨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펠릭스가 서재를 나갔다.
“참 좋은 청년이야, 펠릭스는.”
백작이 흐뭇한 눈으로 펠릭스의 뒷모습을 쫓으며 게인즈에게 말했다.
“냉정해야 할 땐 겨울바람처럼 차갑고 따스해야 할 땐 또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훈훈하지 않나.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펠릭스라면 안심하고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네.”
“어헛, 참, 윌슨!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데 그런 재수 없는 말을 왜 하고 그러나.”
게인즈가 막 화를 냈다.
그날 저녁 크라몬드 백작가의 만찬은 다른 그 어느 때보다 가슴 저릿한 애틋함으로 가득했다.
나란히 앉은 일레인과 펠릭스는 오로지 서로만 눈에 담으며 이별의 아픔을 새기고 있었다.
백작 부부는 일레인과 펠릭스, 두 어린 연인을 보니 몹시 안타까웠다.
“에휴, 우리 젊을 때 같아요, 윌슨. 저리 좋은데 그렇게 오랫동안 헤어져 있어야 한다니.”
일레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바이올렛은 눈물까지 흘렸다.
요새 거의 크라몬드 백작 저의 손님용 별채에 머물고 있는 짐머 왕자도 후유 한숨을 쉬며 다이앤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진작 결혼했으면 저렇게 안타깝게 이별하진 않을 텐데요, 다이앤.”
다이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냅킨을 비틀어 쥐었다.
‘흥, 거지 주제에 결혼은, 무슨.’
윌슨 백작이 떠나면 모든 일이 간단해지는데 왜 펠릭스가 떠난단 말인가.
인디아와 차이나에 백작 대신 펠릭스가 가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이앤은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 큰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펠릭스가 크라몬드 상사의 지분을 절반이나 사들이게 되었다니!
내 지분이 줄어들잖아. 펠릭스가 절반이나 가져가면, 내 지분이! 조지를 통해 마땅히 가져야 할 내 지분이!
게다가 백작은 어떻게 제거한단 말인가. 아프리카 연안을 지나게 될 때 자연스럽게 바르바리 해적의 일부가 대포를 쏘면서 납치해 죽이기로 되어 있었는데!
조지를 만나서 말해 주어야 해. 가는 사람이 백작이 아니고 펠릭스란 걸 알려 주어야 해.
핏기가 죄다 빠져나간 얼굴로 손을 이리저리 비트는 다이앤을 지켜보던 알베르토 경이 갑자기 백작을 향해 말했다.
“크라몬드 백작님. 저도 우리 애들 한 오십여 놈을 이끌고 펠릭스와 함께 갈까 합니다. 이번 해적 소탕으로 벌어들인 자금이 아주 빵빵해서 포상 휴가 겸 말이지요.”
다이앤이 고개를 확 들어 알베르토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알베르토는 다이앤의 시선을 못 느끼는 척 태연하게 계속 백작에게 말했다.
“펠릭스를 오랫동안 보아 오셨으니 아실 겁니다. 이번에 가면 아마도 새로운 거래 상품도 굉장히 많이 개발해 오겠지요. 무역 규모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커질 터인데, 제대로 된 호위 선단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알베르토 용병단도 이제 배때지가 불러져서 이제 예전처럼 남의 싸움에 모가지 걸지 않아도 되는 참인데, 어떻습니까?”
크라몬드 백작의 얼굴이 만월의 달빛처럼 환하게 피어올랐다.
“그래 주겠나? 내 그럼, 우리 상선 하나 내어 주고 자네도 무역에 참여할 수 있게 하겠네. 부탁하네, 우리 사위. 잘 부탁하네. 내 정말로 각별하게 보상하겠네.”
일레인도 몹시 기뻤다.
“알베르토 경, 저도 잘 부탁해요.”
일레인이 말하자, 알베르토가 으흥, 콧소리를 내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일레인과 펠릭스를 훑고는 백작에게 와인 잔을 들어 보였다.
“그럼, 계약서는 내일 쓰시기로 하지요.”
백작도 술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단숨에 잔을 비운 알베르토는 문득 펠릭스를 보더니 눈을 찡긋했다.
“아까 내가 말한 거 잘 생각해 봐, 펠릭스. 아까운 시간 그냥 흘려보내지 말라고, 친구.”
펠릭스는 무서운 눈으로 알베르토를 노려보고 옆에 앉은 일레인의 손을 식탁 밑으로 꽉 잡았다. 힘주어 마주 잡아 오는 일레인의 손길이 무척 사랑스럽고 애틋했다.
영원히 놓고 싶지 않을 만큼.
그날 밤.
일레인은 당연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날이 밝자마자 펠릭스는 해싱턴 공작의 영지가 있는 북동부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루덴 외곽의 항구로 직행한다.
사 개월 만에 겨우 재회한 지 이제 막 스무 날인데.
서로 알게 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함께한 날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다.
곁에 있어도 절절이 그리운데 이제 그렇게 멀리 떨어진 날들을 어찌 또 견뎌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숨도 쉬어지지 않을 만큼 심장을 옥죄어오는 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라.’
위험한 바닷길이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가야 하는 긴긴 여행에 무슨 일이 어떻게 생길지는 하나님만이 아시리라.
펠릭스가, 나의 펠릭스가 저 사람 같지 않게 아름다운 초상화 속 에로스 신의 모습만으로 내게 남을지 몰라.
우흐흡.
일레인의 입에서 뭉그러진 오열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