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뒤통수 쳤다간 좆되는 거야
“저, 백작님! 잠시 좀…….”
밖에서 뷰컴이 조심스럽게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급한가? 급한 거 아니면.”
바이올렛의 품을 파고들기 시작한 윌슨이 되물었다.
“…….”
뷰컴은 잠시 망설였다.
늘 신혼같이 뜨거운 백작 부부신데, 결혼 후 처음으로 오래 같이 지내는 시간을 애틋할 정도로 아껴가며 서로를 위하는 부부신데. 백작 부인께서 겨우 사람답게 행복해지셨는데.
울컥 터지는 설움을 밀어 넣으며 뷰컴은 다시 아뢰었다.
“게인즈 씨가 뵙고자 합니다, 백작님. 잠시만 시간을 내주서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하면 백작 부인의 정신이 다시 흐트러질까 봐 두려운 뷰컴은 그렇게만 아뢰었다.
윌슨은 침착하게 바이올렛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서두르면 안 된다. 서두르면 바이올렛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채게 된다.
“바이올렛, 결제할 서류가 쌓인 모양이야. 아가랑 낮잠 좀 즐기고 있어.”
애처로울 정도로 다정한 키스를 남긴 채 백작은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침실을 나섰다.
“뭔가, 뷰컴?”
서재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백작이 물었다.
“인디아와 차이나 쪽의 지사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
“자세한 건 말씀하지 않아 잘 모르지만, 현지 직원들이 배신한 것 같다고…….”
“!”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되찾은 상선과 물품을 모두 여왕에게 진상하는 바람에 회사채 이자를 제때 지불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다음 달에 차이나에서 출발한 상선 다섯 척이 들어오면 갚기로 하고 펠릭스의 골든우즈 사에서 급하게 자금을 빌려 막고 있는 실정인데, 왜 하필 지금!
급한 마음에 뛰듯 서재로 올라간 백작이 문을 쾅 열었다.
“배신이라니? 그럼 다른 쪽에 붙었다는 겐가?”
“누군가 더 큰 이문을 약속하면서 회유한 모양이야. 차이나의 칸토에서 콴쥬완 리가 서신을 보내왔어. 인디아 쪽은 싱에게서 서신이 왔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오늘 오전 도착했네.”
급한 마음에 비를 맞으면서 말을 타고 달려온 존 게인즈가 품에 품고 온 서신 뭉치를 꺼냈다.
편지를 펴는 백작에게 존 게인즈가 초조하게 말했다.
“배편으로 오늘 도착했다면 문제는 벌써 두 달도 전에 터졌다는 말이지. 그럼 다음 달까지 오기로 한 다섯 척은? 그게 들어와야 펠릭스의 돈을 갚을 수 있단 말일세.”
“그래서 말인데, 윌슨.”
존 게인즈가 목소리를 낮췄다.
“펠릭스에게 지분을 더 넘기세나.”
“…….”
회계사이자 법률가로 크라몬드 상사의 자산을 관리해 온 게인즈가 하는 말이었다.
백작은 잠시 바이올렛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했다. 그 아이가 딸이라면 지분을 더 넘겨도 상관없다. 그러나 그 아이가 아들이라면, 자칫 빈껍데기 상사를 물려받을 수도 있는 노릇인데 게인즈가 어찌 이런 조언을 하는가.
크라몬드 백작의 의문을 읽어낸 듯 게인즈가 한숨을 푹 쉬었다.
“자넨 여기 저택에 머물러 있어서 못 느꼈겠지만, 루덴에 있는 나는 좀 불안하네. 뭔가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게 확실한데 실체가 파악이 안 돼.”
사실은 윌슨도 내심 불안에 쫓기고 있었다. 알현할 때 보여 준 여왕의 친절 때문이었다.
어마어마한 진상품을 올렸다고 해서 군주의 해묵은 원한이 그리 쉽게 사라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저리 친절한 건 달리 꿍꿍이속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 게다가 크라몬드 상사가 가지고 있는 해외 지사를 일개 가문이 독점하는 건 국가의 경쟁력 낭비라고 웨즐렌 백작이 넌지시 비꼬기도 했지!
흘려들었던 말을 통해서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크라몬드 상사를 해체하여 저희가 나눠 먹으려 하는군. 저들은 우리 해외 지사를 흔들어서 현지 직원과 우리 선원과 선장들에게 더 큰 이문을 약속했을 게야. 그리 되면 다음 달에 오기로 한 상선도 무슨 구실을 핑계로 늦게 올 걸세. 파산하게 만들려는 거지.”
여왕 측 인사들 손에 찢기는 것보다 펠릭스에게 넘기는 것이 훨씬 나았다.
“펠릭스에게 지분을 넘길 방법이 있다고?”
“응, 명분도 있고 방법도 찾아놓았네.”
백작은 결단을 내렸다.
“뷰컴, 펠릭스는 어디 있지?”
백작이 없는 듯 한쪽에 서 있던 집사에게 물었다.
“그야, 뭐 언제나 그렇듯 일레인 아가씨 작업실에 있겠지요.”
밤낮으로 붙어 있는 두 사람이 아닙니까.
“모셔 오겠습니다.”
뷰컴이 이제 펠릭스를 부르러 갔다.
그때 펠릭스는 일레인이 알베르토 공의 초상화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알베르토 용병단 단장 알베르토는 여인이면서도 백칠십 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훤칠한 키에 팔다리가 길어서 중성적 매력이 굉장했다.
그런 알베르토가 해군 제독이나 입을 법한 코트와 베스트, 허벅지를 탄탄하게 조인 브리치즈와 흰 스타킹을 멋지게 차려입고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있었다.
가슴에는 이번 바르바리 해적을 격퇴한 공로로 여왕에게서 받은 금빛 훈장이 멋들어지게 달려 있었다.
“일종의 영업용인 거지. 우리 용병단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해군 제독처럼 보이는 내 초상화가 위압적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그러면 알아서 의뢰금에 공 하나를 더 붙일 거야.”
한시도 입을 다물지 않고 떠벌이는데도 일레인은 묵묵히 그림 그리기만 열중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리면 자신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펠릭스가 눈을 접어 웃었다.
‘빨리 끝내고 말 타러 가자.’ 입 모양으로 재촉하면서.
‘어제는 정말 위험할 뻔 했는데.’
일레인은 확 얼굴을 붉혔다. 어제 말 등에서 펠릭스는 정념을 주체하지 못해 일레인을 밀쳐내고 사자처럼 씩씩대면서 허벅지를 쾅쾅 주먹으로 내리쳤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같이 말을 타지 않기로 해놓고, 하루도 가기 전에 또!
그러나 사실 일레인도 참기 힘들었다. 펠릭스의 손길만으로, 입술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힘에 겨워, 자칫하다간 자신이 먼저 펠릭스를 덮치려 들지 몰랐다.
‘아, 그림 그릴 때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일레인은 부러 펠릭스에게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다시 그림에 집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야릇한 눈빛을 놓치지 않은 알베르토가 또 이죽거렸다.
“그만 좀 그 느끼한 눈으로 핥아대라, 펠릭스. 아주 그냥 만지고 싶고 빨고 싶어서 저 손 움찔대는 것 좀 봐!”
모델을 서려고 작업실에 들어오다가 열렬하게 키스하는 두 사람을 본 이후부터 계속 놀림이었다.
어딜 가나 엉겨 붙는 여자들을 귀찮은 얼굴로 쳐내기만 하던 펠릭스가 일레인에게선 한 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 신기해서 더 짓궂게 놀리는 중이었다.
일레인은 일단 그림에 깊게 집중하면 무아지경으로 붓만 휘두르는지라 무슨 말을 해도 듣지 못했다.
알베르토의 음담패설에 워낙 익숙한 펠릭스는 너는 짖어라 나는 내 일을 한다 모드로 일레인의 곧은 등 위로 우아하게 뻗은 목선을 음미하고 있었다.
“어차피 곧 혼인할 건데 피 끓는 청춘남녀가 뭐 하는 짓거리야? 그냥 끝까지 해치워, 응? 감질나게 백날 그 애먼 손만 고생시키지 말고, 그냥, 응? 그 대단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그 튼실한 걸로, 응?”
“아이, 좀!”
펠릭스가 적당히 하고 입 닥치라고 노려볼 때 뷰컴 씨가 작업실 문을 열었다.
“펠릭스 님, 백작님께서 부르십니다.”
마침 고개를 든 일레인은 뷰컴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가 봐, 펠릭스.”
“응, 잠깐 다녀올게.”
문 쪽으로 향하던 펠릭스가 몸을 돌리고 일레인에게 당부했다.
“저기 저 알베르토가 무슨 헛소리를 해도 진지하게 듣지 마. 해적 출신이라 거칠고 험하고 비속하거든.”
“흥, 그러는 저는 사생아 주제에.”
알베르토의 빈정거림을 뒤로 하고 펠릭스가 작업실을 나갔다.
일레인은 물감 냄새와 사람의 숨결로 텁텁해진 공기를 환기하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환장하게 잘생겼죠? 잘생긴 거 말고 또 뭐가 매력 있어요?”
갑자기 알베르토가 물었다.
“아, 돈 많은 거도 있네. 근데 백작가 정도면 뭐 재물이 아쉽지는 않을 거고.”
일레인은 다시 캔버스 뒤에 놓인 작업용 의자에 다가오다가 방금 전까지 펠릭스가 앉아 있던 의자를 보았다. 바로 곁에 있다가 없으니 그 짧은 새에도 또 몹시 그리워졌다.
“펠릭스 정도면 잘생긴 매력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다른 게 필요할까요?”
일레인이 배시시 웃으며 농담했다.
그러자 ‘그렇지, 그렇지, 펠릭스가 환장하게 잘생기긴 했지.’ 맞장구치며 알베르토도 우하하핫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알베르토가 갑자기 일레인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손 좀, 줘 봐요.”
대답도 듣지 않고 물감투성이 손을 덥석 쥔 알베르토가 일레인의 손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우리 용병들은 늘 죽음을 끼고 살아서, 이런 미신적인 거 잘 본다우. 어디 보자, 우리 귀하디 귀하신 일레인 영애는, 보자 보자.”
말을 하던 알베르토가 입을 꾹 다물더니,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런 모양은 처음 보는데?”
고개를 갸웃갸웃하던 알베르토가 일레인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일레인, 어쩌면 결혼을 두 번 할 수도 있겠네? 이야 이거 운이 억세게 좋잖아!”
“알베르토 경!”
아니 달콤한 사랑에 빠진 나한테 이 무슨 악담이에요.
일레인이 정색하고 화를 내자, 알베르토가 ‘아니 뭐 결혼 두 번이 뭐가 어때서. 잘난 것들을 둘이나 거느리는 건데.’ 중얼중얼 얼굴을 물렸다.
그러더니 이제까지와 싹 달라진, 사람 꽤나 썰어 본 용병대장의 눈초리로 살벌하게 말했다.
“근데 이거 하나는 정말 정말 명심하슈, 영애. 펠릭스가 한번 팍 돌면 성질 아주 더럽고 아주 잔인하고, 또 아주아주 집요하다는 거. 두 번의 결혼이 어떻게 되는지 될지 말지 모르지만 펠릭스 통수 쳤다간 인생 좆되는 거야, 영애.”
해적 출신이라더니. 참 황당한 말이나 늘어놓는 용병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