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내가 너의 남자라는 걸
안나는 초커 진주 목걸이에 맞춰 진주 귀걸이까지 아름답게 귀에 늘였다. 그리고 맵시 있게 땋아 올린 머리에 작은 진주로 된 머리띠까지 두르자 안나가 오호호, 제 솜씨를 감탄했다.
“보세요, 아가씨. 이렇게 청초하고 우아한 새 신부처럼 꾸밀 수 있는 금손 시녀를 두고, 대체 지금까지 뭐 하신 거예요? 제발 실력 좀 발휘하게 해 주시라고요!”
“아이, 안나. 제발 그만 좀 놀려.”
말을 하긴 했지만 거울 속 일레인은 자신의 눈에도 빼어나게 아름다워 보였다.
총명한 깊이를 담고 빛나는 커다란 갈색 눈동자. 얼굴에 배어 있는 도도한 기품.
‘나도, 아름답구나.’
다이앤처럼 금세 깨질 것처럼 연약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레인은 강인하고 우아하고 차가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펠릭스처럼, 곧 꺼질 것처럼 발밑이 불안했던 이들이라면 간절히 바랄, 강인하고 차분하고 든든한 아름다움.
이것이 펠릭스를 만난 후, 일레인이 거울 속에서 확인한 아름다움의 종류였다.
펠릭스를 다시 볼 생각에 자꾸 뛰는 가슴을 부여 쥐고 일레인은 연회장으로 향했다.
“옷이… 바뀌었구나, 일레인.”
샬럿이 일레인의 목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입꼬리가 자꾸 떨리는 것이, 책망과 놀림이 절반씩 들어 있는 목소리였다.
“물을 엎질러서…….”
믿지 않을 걸 알면서도 대충 변명을 하는데 우르르 귀족 영애들이 몰려와 일레인을 에워쌌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데 쉽게 입들을 열지 못하고 서로 쿡쿡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봤다.
“무엇이지요, 콜린 영애?”
“저, 일레인 영애. 아까 잠깐 오셨던 분이요. 저 그림 속 에로스 신이신 펠릭스 님. 또 안 오시나요?”
남작가 콜린 영애가 쭈뼛거리며 말끝을 흐리자, 답답하다는 듯 다른 영애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 저희는 저 초상화를 보면서 일레인 영애께서 상상으로 에로스 신을 그리신 줄 알았어요. 세상에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진짜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진짜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좀 소개를 받고 싶어서요.”
“아직 약혼도 안 하신 분이라고 들었어요. 귀족은 아니시고, 투자가라고 하시는 것 같던데.”
아직 십대 후반으로 철없는 생기가 가득한 영애들이 펠릭스를 소개받고 싶다고 아우성이었다.
샬럿 후작 부인이 부채를 촤락 펼쳐 얼굴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자식처럼 아끼는 조카 일레인이 저리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내를 꿰어 찬 것에 대한 기쁨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때였다.
“펠릭스 님은 정식으로 약혼은 공표하지 않았지만 이미 정혼자가 있답니다. 그렇죠, 일레인 영애?”
참새떼처럼 종알거리는 어린 영애들 뒤로 원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몬토바의 산샤 공녀였다.
“그리고 신분도 영애들이 그렇게 함부로 떠들 만한 분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은가요, 일레인 영애?”
연회장에서 엘리자베스 공주 다음으로 지체가 높은 공녀가 나타나자, 귀족 영애들은 홍해가 갈라지듯 양옆으로 주욱 길을 냈다.
그 덕에 일레인은 깊게 가슴을 판 하늘색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산샤 공녀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산샤 공녀, 와인은 마음에 드십니까? 공녀께서 좋아하신다고 하여 특별히 헝가리의 토카이 와인을 준비했습니다.”
일레인은 차분하게 화제를 돌렸다. 펠릭스를 두고 다른 이와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말로 싸워봐야 남들 눈에는 똑같이 우스워지기만 할 뿐이라는 걸, 필요할 땐 행동으로 응징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이 백작가 안살림을 책임지며 몸에 익힌 교훈이었다.
산샤 공녀가 손에 들고 있던 우아한 와인 잔에 담긴 붉은 포도주를 입에 살짝 머금고는,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웃었다.
“요새 유럽 대륙에 전운이 짙어 수입이 어려운데 용케도 구했네요, 일레인 영애. 제 영지 탕구르 항을 통해 실어온 것인가요? 그 영지가 제 지참금으로 펠릭스 님께…….”
말도 안 되는 말을 우아하게도 늘어놓던 산샤 공녀의 시선이 일레인의 뒤로 향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대체 무얼 보았길래.
일레인이 뒤로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일레인? 내가 너의 남자라는 걸 왜 말하지 않는 거야?”
책망하듯 크고 두꺼운 손이 일레인의 양 어깨에 무겁게 내렸다. 펠릭스가 면도 후에 바르는 프랑킨센스 로션의 차분한 침향이 일레인의 코를 자극했다.
일레인을 바싹 당겨 제 가슴에 붙이며 펠릭스가 말했다.
“토카이 와인은 제가 일레인에게 보내 준 것이랍니다. 일전에 마트비아에 가는 길에 헝가리와 프랑스에 들러 모엣 샹동 샴페인과 함께 이백 병을 구해 보냈지요. 늦봄에 있을 우리 약혼식 피로연에 내놓을 술이 필요했거든요. 유럽에 항구가 탕구르 항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산샤 공녀.”
“꺄아, 약혼식 피로연이래!”
콜린 영애가 뺨을 감싸며 소리쳤다.
“아, 낭만적이에요, 펠릭스 님. 모엣 샹동 한 병에 일백 파운드가 넘는다고 하지 않아요? 꺄아. 그렇게 비싼 와인을 백 병이라니!”
“백 병이 아니고 이백 병, 영애. 귀가 삐셨습니까?”
브리티나 중상류층의 연수입이 고작 일천 파운드에 불과한데, 주류에만 이만 파운드를 썼다는 소식에 어린 영애들이 열광했다.
그러나 산샤 공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하게 질렸다.
“약혼이라니요, 펠릭스 님? 일레인 영애와 약혼을 하신다는 말씀인가요?”
그러자 연회장의 모든 시선이 산샤 공녀와 펠릭스, 일레인에게로 향했다.
산샤 공녀가 탕구르 항 일대를 지참금으로 가지고 마트비아에 새롭게 등장한 대공의 사생아와 혼인할 것이라는 소문은 이미 여러 나라 왕실과 고위 귀족가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생아가 펠릭스 페일른이란 자산 투자가로, 재산이 어지간한 왕실의 전체 영지와 수입을 합친 것보다도 많은 대단한 부호라는 것도 막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 미혼이거나 다시 재혼할 수 있는 공주나 공녀를 가진 소국의 왕실에서 갑자기 마트비아로 사신을 줄줄이 보내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파리의 가십지에서는 일레인이 그린 펠릭스의 에로스 신 초상화를 어설프게 흉내 낸 그림이 켕캉푸아 거리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고 있다고 떠들어 댔다.
그러니까 일레인도, 그리고 당사자 펠릭스도 모르는 사이 펠릭스 페일른은 갑자기 유럽 최고의 신랑감으로 부상 중이었다.
“펠릭스 씨가 일레인 영애와 약혼한다고?”
갑자기 엘리자베스에게 팔을 내준 빌헬름 대공자까지 다가와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브라바트 공국에서도 대공의 막내딸을 펠릭스 페일른이란 사생아에게 안기면 어떨까 논의 중이었기 때문이다. 신분이 취약하니 부려먹기에도 좋고, 인물이 좋으니 후손 보기에도 어여쁠 거란 이유였다.
그러자 펠릭스는 큰 키 때문에 구부정한 자세로 등을 굽혀 일레인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그 친밀하고도 과감한 행동에 여기저기서 헉,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펠릭스는 아예 얼굴을 일레인의 얼굴에 바싹 붙인 채, 여유 있게 웃으며 브라바트의 대공자를 바라보았다.
“저는 일레인 크라몬드의 약혼자입니다. 아직 정식으로 약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공식 발표할 것이거든요.”
“하아. 펠릭스 씨!”
샬럿 고모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펠릭스더러 그 낯 뜨거운 자세를 그만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아름답게 주름진 눈 속에서 유쾌하게 반짝이는 회갈색 눈동자는 샬럿 고모가 펠릭스의 당당한 고백을 상당히 기뻐하고 있다는 걸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이제까지 이렇게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일레인은 상당히 난처해졌다.
“펠릭스, 턱을 떼고 바로 서요.”
손을 뒤로 해 펠릭스의 코트 깃을 잡아당기며 일레인이 속삭였다.
펠릭스는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새빨갛게 달아오른 일레인의 뺨에 재빨리 키스를 하고서야 몸을 바로 세웠다.
“참 보기 좋은 연인이네요, 다이앤.”
펠릭스와 일레인 곁으로 모여든 이들과 달리 연회장 구석에서 둘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던 짐머 왕자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저 박력 있는 펠릭스와 내가 좋은 동서가 될 것 같지 않아요?”
남의 속도 모르고.
다이앤은 눈치도 없이 자꾸 귓불에 더운 숨을 뿌리며 속삭여대는 짐머 왕자의 손을 뿌리쳤다.
참을 수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레인과 펠릭스에게 쏠리는 것도. 일레인이 입고 걸친 저 화려한 것들이 모두 펠릭스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란 것도. 펠릭스가 모두가 탐내는 신랑감이라는 것도.
모두 참을 수 없는 모욕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 거지 같은 것과 들러붙어서 있는데. 일레인은 왜 펠릭스와! 대체 뭐가 잘났다고!
“다이앤?”
주먹을 앙다문 채 부들부들 떠는 다이앤을 짐머 왕자가 걱정스럽게 불렀다.
“어디 안 좋은가요? 어째서 이렇게 몸을 떠는지.”
“아니, 아니에요, 짐머. 샴페인을 많이 마셨더니 머리가 좀 아파서. 그래서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어야겠어요.”
다이앤이 희고 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미간을 찌푸리자, 짐머 왕자는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잡았다.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다이앤은 가만히 짐머 왕자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약지에 끼워져 있는 10캐럿 사파이어 반지는 아름다웠다. 세공은 정교하고, 사파이어 알을 둘러싼 자잘한 다이아몬드도 품질이 좋았다. 짐머 왕자가 아라구완 왕비에게서 받아 온 청혼 반지였다.
‘그런데 이 반지 하나였어.’
마차 한 가득도 아니고, 상자 한 가득도 아니고 고작 반지 하나.
‘다 뺏을 거야.’
다이앤이 차갑게 가라앉은 푸른 눈으로 일레인을 바라보았다.
늘 칙칙하게 차분하던 일레인이 오늘은 온통 화사한 빛으로 피어나 있었다.
부숴 버릴 거야.
다이앤은 자꾸 엉겨 붙으려 하는 짐머 왕자의 손을 뿌리치고 거처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