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62화 (62/112)

#제62화. 뜨거운 재회

짐머 왕자의 시종이 은사로 화려하게 장식한 장미목 함을 열었다.

목제함에 담긴 건 다이앤의 푸른색 눈동자에 잘 어울리게 세공된 블루 사파이어 백금 목걸이였다.

“세상에! 드디어 청혼하려나 봐요.”

다이앤이 청혼을 이미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영애들이 뭉게구름처럼 소란을 일으켰다.

일레인은 슬쩍 엘리자베스 공주를 보았다.

짐머 왕자가 다이앤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그 구애를 수줍은 듯 받아들이는 다이앤의 모습을 본 엘리자베스 공주의 입매가 한결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이걸로 빌헬름 개놈과 다이앤이 엮어 벌어졌던 일도 마무리 되는 것인가.’

일레인은 샬럿과 안도의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 전하, 안으로 드시지요. 차와 음악과 다과가 공주 전하와 영애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일레인이 나서 공주를 연회장 안으로 안내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일레인이 차분한 회백색 드레스를 입고 있어 더욱 마음에 들었다. 화려한 성장을 한 손님들을 돋보이게 하려는 일레인의 세심한 배려가 마침내 공주의 마음까지 풀어 준 거였다.

그러나 색상만 회색일 뿐, 펠릭스가 선물한 애쉬 브라운 로브 드레스는 소매 끝단과 치마 하단에 은사로 아라베스크 풍 자수가 정교하게 놓여, 일레인이 걸을 때마다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다이앤만 어여쁜 줄 알았더니, 일레인 영애는 참 침착하게 아름답네요.”

공주 뒤를 따르는 영애들의 총평이었다.

공주 일행이 먼저 연회장으로 향한 후. 애써 기쁨을 가장하던 다이앤의 표정이 와라락 무너졌다.

‘이깟 목걸이 하나.’

거지새끼 같으니라고.

일레인이 펠릭스에게 마차 한가득 선물 받은 보석과 원석들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해서 내장이 다 비틀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이앤은 마침 다가온 빌헬름을 시선 가장자리에 담으며 눈을 내리깔고 떨리는 표정을 능숙하게 지어냈다.

“고마워요, 짐머 왕자님. 정말 아름다워요.”

다이앤의 떨리는 목소리에 짐머 왕자는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목걸이를 양손으로 집었다.

다이앤은 아름다운 목이 한층 더 유려하고 매혹적인 곡선을 드러낼 수 있게 몸을 감싼 망토를 내렸다.

가녀린 목에 목걸이를 채우는 짐머 왕자의 손가락이 와들와들 떨며 서툴게 목걸이의 잠금쇠를 채웠다.

그러는 틈을 이용해 다이앤의 푸른 눈동자가 유혹적으로 빌헬름을 훑었다.

그러자 대공자 뒤에 서 있던 브라바트 대사가 험악한 눈으로 다이앤을 노려보더니, 나지막하게 빌헬름에게 경고했다.

“여자에게 홀려 나라를 망칠 셈이냐? 후계 자리에서 밀려나야 정신을 차릴 작정이야?”

일전에 벌어진 한밤중의 총격으로 빌헬름은 브라바트 대사에게 쉴 새 없이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대사는 사적으로는 브라바트 대공의 동생이기도 했으니, 빌헬름에겐 삼촌이었다.

아무리 혼이 나도 그날 밤, 혀로 맛보았던 다이앤의 달콤한 살내음이 잊히질 않아 빌헬름은 고민이었다. 다른 여자들로 욕정을 풀어봐도 갈증만 더 커졌다.

‘저리 아름다운 것이 고작 저 거지 새끼 밑에 깔려 앵앵대야 하다니.’

생각할수록 속이 쓰리고 울화통이 터졌다. 빌헬름은 쓰라린 욕망을 안고 대사와 다른 귀공자들과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우리도 들어갈까요, 다이앤?”

짐머 왕자가 다정하게 팔을 내밀었다.

빌헬름의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위안을 얻은 다이앤이 우아하게 팔장을 끼고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일레인의 에스코트에 따라 연회장으로 들어서던 엘리자베스 공주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와, 이, 이게……!”

잔잔한 첼로 선율이 울려 퍼지고 있는 연회장은 온통 꽃밭이었다.

이즈음처럼 추운 겨울에는 왕실에서마저 꽃병에 꽂을 생화 몇 송이 겨우 구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크라몬드 백작가의 드넓은 연회장은 붉은 장미와 작약, 희귀한 페일 오렌지 빛 튤립, 리시안셔스 등이 흰 안개꽃에 쌓여 꿈결처럼 아름답게 꽃 내음을 풍겼다.

그 많은 꽃의 화룡점정은 연회장 중앙 벽을 차지하고 있는 그림들이었다.

연회장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 걸린 에로스 신이 매혹적인 눈빛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와, 바니쉬를 칠하니 훨씬 더 아름다움이 부각되는군요, 일레인 영애.”

산샤 공녀가 연적을 향한 시기와 질투를 잊고 일레인에게 찬탄을 보냈다.

뒤따라 들어온 영애들도 두 손을 모아 쥐고 펠릭스의 신적인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재연해 낸 일레인의 솜씨에 넋을 잃었다.

이미 펠릭스 그림에 익숙한 엘리자베스 공주는 일레인이 엄마 바이올렛을 그린 그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슬픔의 원형>이란 제목이 붙어서 그런가, 정말로 마음이 뭉클해지는데. 물끄러미 이쪽을 응시하는 젖은 눈동자와 겹겹이 칠해진 치맛자락의 주름마저도 어쩐지 가슴에 콱 박히는 것 같아.”

공주는 정말로 드레스 위로 왼쪽 가슴을 문질렀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훌륭한 그림은 영혼 깊숙한 곳을 건드려 우리의 근원적인 정서와 공명한다는 비평가들이 평을 읽을 때, 참 말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는구나 싶었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오늘에야 알았네, 영애.”

더할 나위 없는 극찬이었다.

“공주 전하의 초상화에도 많은 것들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특히 눈동자에 담긴 영민함과 절제가 돋보이는데요.”

일레인도 마음을 담아 응대했다.

때마침 경쾌한 춤곡이 연주되었다.

추위를 막기 위한 망토를 일찌감치 하인들에게 맡긴 청춘의 선남선녀가 마음에 드는 짝을 찾아 일렬로 마주 섰다.

바흐의 미뉴에트 춤곡이 시작되자 각자 옆에 있는 자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가며 빙빙 돌고, 인사하고 퐁퐁 뛰는 춤이 시작되었다.

나풀거리는 꽃분홍 새틴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 공주가 빌헬름 대공자와 다정하게 손을 잡았다 떼고 우아하게 돌면서 발을 종종거렸다.

그러나 빌헬름 대공자의 시선은 엘리자베스 공주가 우아하게 턴을 할 때마다 저 맨 끝의 다이앤을 향했다.

두 남녀의 시선이 은밀하게 얽혔다 떨어지고, 다시 또 은밀하고 음탕하게 얽혔다.

“…….”

펠릭스가 없어 춤 무리에 끼지 않은 일레인은 불안한 마음으로 다이앤과 빌헬름을 지켜보았다.

“그럭저럭 잘 수습한 것 같구나, 일레인. 잘했다. 이거 마시면서 목이라도 축이렴. 프랑스 왕의 여인이 좋아했다더니 맛이 참 좋구나.”

구석에 서서 꼼꼼한 시선으로 연회장을 지켜보고 있는 일레인에게 샬럿 고모님이 다가와 샴페인 잔을 건넸다.

일레인이 달달한 모엣 샹동 한 모금을 목에 넘길 때였다.

“아니, 바이올렛이 어째서 여길…….”

연회장 입구를 바라보며 샬럿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몸이 불편하단 구실로 연회장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한 엄마가 왜!

일레인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갈색 드레스를 아름답게 차려입은 엄마가 젊은 사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펠릭스!”

일레인의 입에서 마침내 그리운 이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눈동자 색과 같은 검푸른 벨벳 코트로 딱 떨어지게 몸을 감싼 펠릭스가 일레인을 향해 활짝 웃었다.

온 세계가 그의 웃음으로 찬란하게 빛을 내는 순간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에요? 열흘 후에나…….”

“보고 싶어서 도저히 더 지체하지 못하고 먼저 왔어, 일레인. 말을 타고 오느라 온통 땀투성이인데, 씻어야 하는데, 얼굴만 보고 씻으려고.”

그러고 보니 워낙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에 가려져 그렇지, 펠릭스의 코트는 먼지와 땀으로 뒤엉킨 채 서걱거리며 얼어 있었다.

“그냥, 다이앤과 네가 어쩌고 있는가 살짝 엿보고 가려는데 펠릭스가 왔잖니. 그래서 함께 들어온 거야.”

엄마가 여전히 펠릭스의 팔을 구명줄이나 되는 것처럼 꽉 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오랜만에 사교계의 연회에 참석한지라 긴장을 떨칠 수 없는 거였다.

‘어린 영애와 영식들의 연회인데도. 엄마를 물어뜯는 여왕의 개들은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일레인은 불현듯 엄마가 몹시 가여워졌다.

“샬럿 고모님, 연회장을 부탁해요. 전 엄마 모셔다 드리고 펠릭스가 씻을 수 있도록 뷰컴 씨한테 부탁할게요.”

“그래, 일레인. 여긴 걱정하지 말고.”

일레인의 손에서 샴페인 잔을 받아들며 샬럿이 말했다. 그리고 펠릭스에게 다정하게 미소를 보냈다.

“펠릭스 씨, 잘 왔어요. 활약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진심으로 고마워요.”

백작과 함께 해적을 물리쳐 준 것에 대한 진심 어린 치하였다.

일레인은 엄마와 펠릭스와 함께 연회장으로 개방한 살롱의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다이앤도 짐머 왕자랑 잘 어울리네. 다행이다.”

눈물을 그렁거리며 기뻐하는 엄마에게 보리스 부인이 따스한 양털 망토를 들고 다가왔다. 엄마의 어깨에 망토를 씌우며 보리스 부인이 말했다.

“바람이 찹니다, 부인. 안으로 드실까요?”

커다란 털 망토 속 엄마는 금세라도 부서질 듯 연약한 유리처럼 위태로와보였다. 벌써 임신 사 개월째 접어드는데도 주름 많이 잡힌 드레스 아래 감춰진 봉긋 솟기 시작한 배를 제외하곤 지나치게 날씬했다.

“펠릭스가 왔으니 곧 윌슨도 올 거야. 그래서 더욱 반가워요, 펠릭스.”

아빠가 오셔야지만 엄마는 비로소 난로가의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며 안식을 찾으시겠지.

아아. 일레인은 엄마의 저 지독한 사랑과 집착이 가여우면서도 버거웠다.

엄마는 보리스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저택 안쪽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제야 일레인은 펠릭스의 팔을 잡고 안채로 이끌었다.

어둠이 두 사람을 충분히 감춰줄 수 있는 곳에 이르러서야, 일레인은 와락 펠릭스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아아, 펠릭스. 그리운 나의 펠릭스. 펠릭스.”

펠릭스도 품에 파고든 곱슬한 머리칼과, 유혹적으로 희게 드러난 뒤 목에 정신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보고 싶었어, 일레인.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뻔했어.”

뜨겁게 속삭이며 펠릭스가 일레인의 목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늘 은은하게 풍기던 물감 냄새 대신 오늘 일레인에게선 온통 꽃향기가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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