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61화 (61/112)

#제61화. 물량 공세 사랑 고백

아셔 씨가 일레인을 끌고 가며 속삭였다.

“하아, 정말 돈지랄이 뭔지 나도 이번에 알았다오. 펠릭스 님의 스케일은 정말. 자자, 뒤도 봐요, 일레인. 펠릭스 님이 얼마나 그대를 아끼는지 눈 크게 뜨고 봐요.”

꿈을 꾸듯 몽롱한 걸음으로 일레인은 아셔 씨의 손에 이끌려 세 번째 마차 안을 보았다.

이번엔 온통 새하얀 안개꽃의 바다였다. 함께하겠다는 약속의 꽃말을 가진, 안개꽃이 마차 한가득 특유의 쌉쌀한 풀 내음을 풍기며 가득 피어 있었다.

“아이, 아직 울지 마시고. 얼굴 얼면 어쩌려고. 자자.”

아셔 씨가 장갑 낀 손으로 일레인의 뺨을 훔쳐 주더니 또 손을 잡아끌었다.

“아니, 대체 이 많은 꽃들을 다……. 이렇게 되면 다른 가문에서 연회에 쓸 꽃들이 없지 않겠어요?”

감동으로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아픈 와중에도 일레인은 펠릭스의 행위가 가져올 파장을 걱정했다.

“거 참. 백작가를 책임졌다더니, 어린 아가씨가 너무 낭만이 없네. 때론 그냥 즐기세요, 일레인! 사랑에 빠진 열렬한 고백을 또 언제 받아 본다고.”

아셔 씨가 ‘이렇게 큰 사랑 앞에서도 권력 관계를 따지다니, 참.’ 하고 혀를 차는데 저택에서 우르르 여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머, 어머! 어머나!”

두꺼운 망토로 빈틈없이 온몸을 가린 바이올렛은 임신한 사실도 잊고 황홀한 표정으로 폴짝거렸다.

“윌슨이 보낸 거구나, 윌슨이!”

엄마는 이렇게 낭만적인 돈지랄을 거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빠뿐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펠릭스 페일른이네요, 바이올렛. 윌슨은 요새 채권 이자 지급하기도 허덕거리는데, 무얼.”

냉정한 해밀턴 고모님은 단번에 엄마의 환상을 깨부수고, 하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꽃이 얼 염려가 있으니 다들 고운 모슬린 천을 들고 나오게. 조심스럽게 감싸 운반해야 할 것이야. 연회장에 벽난로 활활 태우고, 화로도 있는 대로 가져다 피우고!”

원래 크라몬드 가문에서 고용된 하인과 하녀가 삼십여 명, 그리고 연회를 돕기 위해 해밀턴 후작가에서 데려온 시종이 이십여 명이었다. 모두 우르르 몰려나와 꽃을 훔쳐보며 부러워하던 이들이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번째 마차 가득 실려 있는 건 코랄 레드라 불리는 옅은 주황색의 튤립이었다! 튤립 버블 폭락 후 다들 튤립이라면 치를 떨어서 좀처럼 보기 힘든 희귀한 종이었다.

“사랑의 고백.”

일레인은 문득 초상화를 그리던 날의 펠릭스를 생각했다. 깊어진 눈으로 너를 가질 거야 고백하던, 그날의 펠릭스가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숨이 막히도록 밀려오는 그리움에 눈앞이 흐려졌다.

뿌연 시야 속에 손수건이 쑥 내밀어졌다.

“마저 보십시다, 일레인. 펠릭스 님이 또 어떤 꽃으로 사랑을 고백하는지 당사자가 맨 처음 봐야지 않겠소?”

일레인은 아셔 씨가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다섯 번째 마차로 향했다.

아아아아아!

마차의 내용물을 본 순간, 일레인은 터져 나오려는 탄성을 입술을 깨물어 삼켰다.

분홍색 여린 꽃잎이 겹겹이 수줍게 봉오리 진 꽃은 바로 ‘수줍은 사랑’이란 꽃말을 가진 피어니, 작약꽃이었다.

그리고 꽃들 가운데 펠릭스가 보낸 메시지가 크게 쓰여 있었다.

[그대 앞에선 여전히 수줍기만 한 내 사랑을 아시나요, 일레인]

“루덴 귀족가의 영애들이 부러워 배를 잡고 쓰러지겠구나.”

어느 새 다가온 해밀턴 후작 부인이 유쾌하게 웃었다.

“아아, 펠릭스는 너무나 낭만적이구나. 내 평생 이렇게 멋진 고백은 처음이야.”

후작 부인의 팔을 잡고 조심스럽게 온 엄마도 감탄했다.

“!?”

일레인은 갑자기 뒤통수가 따가워 뒤를 돌아보았다.

다이앤이었다.

하얀 망토로 온몸을 휘감은 다이앤이 창백한 얼굴로 꽃을 가득 실은 마차의 행렬을 하나씩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는 분노인지 질투인지에 한 겨울 고드름처럼 빛을 내었다.

다이앤은 정말로 발끝에서부터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짐머 왕자가 들고 왔던 꽃다발은 아라구완 왕가의 상징인 주목 나무 한 다발에 도자기로 구워 낸 장미 스무 송이가 다였다.

‘그 초라한 꽃다발을 들고 감히 사랑을 고백하다니. 거지 발싸개 같은 놈!’

머리통이 폭발할 것 같이 화가 치밀었다.

다이앤이 성큼성큼 일레인을 지나쳐 여섯 번째 마차로 갔다. 여기서부터 마차는 모피가 아닌 보통의 캔버스 천으로 덮여져 있었다.

여섯 번째 마차를 가득 채운 건 온통 화려한 드레스였다. 일레인의 치수에 맞춰 만들어 입을 때 실핀으로 약간의 수선만 하면 입을 수 있는 색색의 드레스가 대충 눈대중으로 보기에도 오십 벌이 넘어 보였다.

하나 같이 대륙 최고의 왕가에서나 입을 법한 고급 옷감과 디자인으로, 패션의 본고장 파리의 의상실에서 공수해 온 것들이었다.

다이앤은 짐머 왕자의 초라한 옷차림을 떠올렸다. 고급 비단이 부담스러워 늘 수수한 옥양면이나 울로 지은 코트를 입는, 이름만 허울 좋은 왕자인 가난뱅이를.

일곱 번째 마차에는 가봉 전의 옷감이 한가득이었다. 인도와 중국, 아라비아에서 수입해 온 이국적인 옷감에 나폴리와 니스 등지에서 사 보낸 고급 비단 천이었다.

여덟 번째에는 장신구가 한 가득이었다. 투명한 다이아몬드, 노란색과 핑크색의 다이아몬드로 세공된 반지와 머리 장식, 목걸이 등이 장미목과 상아로 만든 장신구 함에 들어 있었다.

사파이어와 가넷, 시트린, 아쿠아마린, 크기가 다양한 진주도 나석으로 가득했다. 무엇으로든 세공해 착용하란 배려였다.

“다이앤. 마음에 드는 거 같이 세공하자.”

일레인이 다이앤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일레인이 보기에도 펠릭스가 보내온 선물 규모가 짐머 왕자의 선물과 너무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드레스도 조금 더 손을 보면 언니의 날씬한 허리에도 아름답게 들어맞을 거야.”

다이앤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래. 일단 난 이 다이아몬드 티아라 목걸이 반지 세트랑 저 앞 마차에 있는 연분홍 로브 비단 드레스를 가질게. 여기 바로크 진주로 여러 겹의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는 것도 좋겠다.”

가장 좋은 걸 서슴없이 다이앤이 고르자 샬럿 고모가 엄한 눈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펠릭스가 마음을 담아 일레인에게 선물한 것이다, 다이앤. 이미 만들어진 건 안 된다! 너는 나석으로 된 보석과 아직 가봉 전의 천을 골라서 따로 재단하렴.”

다이앤의 눈에 금세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요, 고모. 가난한 왕자 따위와 약혼해야 하는 제게 그것도 과분하지요.”

다이앤이 처연하게 말했다.

그러자 헨리 씨가 이 좋은 날 당사자도 아니면서 눈물 바람이 웬 말이냐는 듯 지팡이로 얼어붙은 땅을 땅땅 두드렸다.

“일레인, 받은 선물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나중에 결정하고. 뒤의 마차 좀 보구려. 유럽 최고급 안료와 붓, 캔버스 천이 하나 가득이오.”

아아 정말로, 펠릭스는 엄청난 물량 공세로 일레인에게 열렬하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 * *

오후 세 시가 가까워오자 크라몬드 백작 저로 마차의 행렬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백작 저택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꼬물꼬물 색색의 등이 내걸렸다. 초록의 생기를 잃은 정원의 초목엔 푸른 천으로 만든 잎새와 붉은색 분홍색 천으로 만든 꽃이 달려 여름 못지않은 화려함을 뽐냈다.

“돈 하나는 끝내주게 쓰는군요.”

“가진 것이 돈밖에 없지 않습니까?”

“돈밖에 없는 것은 아니에요. 다이앤 영애의 미모와 일레인 영애의 그림도 있지요.”

“쉿, 여기서 다이앤 영애 미모가 왜 거론되나요?”

엘리자베스 공주와 함께 장대하게 화려한 왕실 마차를 타고 오던 산샤 공녀가 눈치 없게 다이앤 이야기를 꺼낸 영애의 발을 꾹 밟았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못 들은 척 비단부채를 팔락거리며 마차 밖 화려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건 궁에서나 할 법한 꾸밈새인데,’

감히.

감히 내 남자를 넘보고 꼬리친 다이앤 그 천것처럼, 백작 저의 꾸밈도 왕실을 넘볼 만큼 이리 화려해서야.

다른 가문에서 이리 정성스럽게 초입부터 장식했다면 귀한 공주를 맞이하는 자세가 남다르다고 기꺼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엘리자베스는 출발할 때부터 빈정이 단단히 상해 있었다. 뒤따라오고 있는 마차 안의 빌헬름이 평소 입는 화려한 보라색 벨벳 코트 대신 대공국 후계자의 공식 예복인 금장 술이 달린 정복을 입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체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정복을! 고작 백작가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하는 것인데.’

모른 척해 주었더니 정말로 모르는 줄 아나.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평소처럼 함께 온 공자들과 웃고 떠드는 빌헬름 대공자에게 단단히 화가 났다.

여러모로 기분이 상한 채로 마차에 내린 공주에게 일레인이 다가왔다.

“엘리자베스 전하, 전하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정원과 연회장을 꾸몄습니다. 부디 기쁘게 누려 주시길 바랍니다.”

마중을 나온 일레인이 깊게 무릎을 굽히며 환대의 인사를 올렸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일레인 뒤에서 함께 무릎을 굽혀 예를 표하는 다이앤과 샬럿 해밀턴 후작 부인을 보았다.

반짝거리는 작은 보석들이 별빛처럼 빛을 내는 흰색 드레스 속 다이앤은 막 결혼식을 올리려는 새 신부처럼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감히!’

엘리자베스 공주의 입이 노여움으로 비틀렸다.

그때 일레인이 미리 부탁한 대로 짐머 왕자가 빌헬름 대공자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짙푸른 모직 코트와 은사로 짠 화려한 베스트를 입은 짐머 왕자는 엘리자베스 공주에겐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곧바로 다이앤에게 향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다이앤. 디아나 여신이 현현한 것만 같은 내 사랑, 그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왕자는 다이앤의 미모를 극찬하며 시종으로 하여금 준비해 온 선물을 보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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