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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에로스-59화 (59/112)

#제59화. 해싱턴 공작

며칠 뒤면 마흔아홉이 되는 중년의 리처드 해싱턴 공작은 미남자였다. 젊을 때처럼 여전히 날렵한 몸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귀족적인 우아함이 촘촘하게 배어 있었다.

다만 치아가 약해 오른쪽 어금니가 세 개 빠져 볼이 홀쭉 들어간 게 유일한 흠이었다.

공작은 지난달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수도 루덴에서 마차로 사흘 꼬박 걸리는 거리에 있는 해싱턴 가문의 영지로 낙향했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날로 건강이 나빠지고 있는 여동생 엘렌 해싱턴의 요양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실은 동성애, 특히 남성 간의 동성애를 처벌하는 소도미 법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부터 마틸다 여왕은 왕권을 제한하려는 귀족 의회에 맞서 교회와 손잡고 소도미 법을 적극 시행하기 시작했다. 여왕을 견제하는 전통 귀족 중에 유독 동성애 성향을 가진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해싱턴 공작은 스무 살에 잠깐 결혼했던 부인과 사별 후 쭉 독신으로 지내왔다. 겉으로는 부인을 잃은 슬픔이 커서라고 했지만 실은 인도 출신 집사 닐 카오르와 오랜 연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브리티나 전통의 명문 귀족 가문으로 중앙 정계에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던 해싱턴 공작은 연인 닐을 버리기보단 공직을 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런 공작에게 예고도 없이 여왕의 사자가 찾아왔다. 긴장된 기색이 역력한 집사 닐 카오르가 새파랗게 얼굴이 언 사자를 공작에게 안내했다.

여왕의 사자가 잘 놀려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벌려 고했다.

“바로 케싱 궁으로 입궁하란 명이십니다.”

“무슨 일로 이미 은퇴한 이 늙은이를 찾으시는 겐가? 나는 앞으로 여기 궁벽한 영지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 계획이라고 이미 말씀드렸는데.”

“저는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급히 입궁하시어 알현하시란 어명만 하달할 뿐입니다.”

“으흠.”

심장이 쿵쿵, 불길하게 울리는 걸 능숙하게 감추며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을 내보낸 해싱턴 공작은 바로 엘렌 해싱턴을 찾았다.

한동안 오피윰 팅처를 복용해 아주 컨디션이 좋아졌던 엘렌은 백래시를 맞아 전보다 훨씬 더 못한 안색으로 통증에 떨고 있었다.

“펠릭스가 크라몬드 백작과 함께 대승을 거둬서 그럴까요? 여왕은 늘 윌슨 크라몬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잖아요.”

엘렌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해싱턴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펠릭스가 일레인 크라몬드를 사랑한다고 해서 잠시 서먹해졌다만, 우리는 그럴 사이가 아니야. 그보다는 아마 내 사생활을 들어 뭔가를 공작하도록 회유하겠지.

해싱턴 공작은 머리를 스쳐 가는 여러 가지 상념을 지우며 해쓱한 엘렌의 뺨을 톡톡 어루만졌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림 그린다고 무리하지도 말고. 펠릭스 일로 너무 속 끓이지도 말고. 저리 어엿하게 큰 것만도 감사한 일 아니냐?”

“오라버니는 또 그 말씀! 오토가 또 사람을 보냈잖아요. 산샤 공녀랑 혼인만 하면 후계자로 세우는 것도 적극적으로 고려하겠다고요.”

해싱턴 공작은 쯧쯧 혀를 찼다.

“그렇게 당하고도, 쯧. 펠릭스가 알베르토 용병대장과 친분이 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소유주가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고 있지 않니? 제대로 된 군대도 없으니 덕 좀 보겠다고 저리 몸이 달아서는. 쯧.”

마트비아의 대공 오토 폰 바덴니히 대공을 비난하는 소리에 엘렌은 이마를 찌푸렸다. 오랫동안 미워하면서 오히려 정이 더 커진 탓이었다.

펠릭스가 마트비아에 다녀간 후, 바덴니히 대공은 엘렌에게 금궤와 고급 안료를 잔뜩 보내왔다. 혼자 몸으로 펠릭스를 훌륭하게 키워 낸 것에 대한 감사와 치하였다.

그리고 또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엔 엘렌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여전하다는 달콤한 편지도 보내왔다.

그 몇 줄의 편지에 오랫동안 품어 왔던 미움과 원망이 사르르 풀리더니, 요새 엘렌의 소망은 펠릭스가 대공의 후계자로 우뚝 서서, 자신도 마트비아에 가서 함께 궁에 사는 것이 되었다.

‘한 번 사랑한 대상을 놓지 못하는 지독한 집착이 우리 해싱턴 가문의 핏줄에 흐르는가.’

엘렌도 그렇고, 자신도 그러하고, 이제는 펠릭스까지 일레인 크라몬드를 포기할 수 없다고 저러고 있으니.

한숨을 쉬며 해싱턴 공작은 수도에 갈 준비를 했다.

“저도 같이 가요, 리처드.”

반평생을 함께 늙어온 동반자 닐 카오르가 옷시중을 들며 애원했다.

“소도미 법 때문이라면 저도 같이 있어야 해요, 리처드. 결국 나 때문에 생긴 사단이니. 내가 진작 당신을 떠났더라면.”

닐 카오르는 커다란 눈에 눈물과 회한을 담고 속삭였다.

해싱턴 공작은 아직 서른 중반인 젊은 닐의 뺨을 스륵 쓰다듬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닐, 너는 내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야. 그러니 여기서 안전하게 머물며 엘렌을 돌봐 주렴. 별 일 없이 돌아올 게다. 해싱턴 가문은 그 뿌리가 깊어 여왕이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으니.”

그렇게 연인을 안심시키고, 해싱턴 공작은 단단하게 난방을 준비한 사륜마차를 타고 수도를 향해 달렸다.

그 즈음 여왕은 매일처럼 웨즐렌 백작을 독대하며 여러 가지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재무대신을 맡고 있는 웨즐렌 백작은 여왕이 선대왕 제임스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할 때부터 함께 한 충신이자 친우였다.

“그러니까 귀족들의 불만을 무마하는 방편으로 크라몬드 가문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해외 무역권을 빼앗아 나눠 주자는 거지?”

“예, 전하. 그러면 윌슨 크라몬드를 제거한 것에 불만을 가졌던 자들도 전하의 편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으흠.”

“그리고 이점은 또 있습니다, 전하. 크라몬드 가문이 몰락하면 펠릭스 페일른이 산샤 공녀와 혼인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럼 장차 마트비아와 돈독한 동맹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트비아는 그 자체로는 보잘 것 없는 소국이지만 바로 옆에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중학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마트비아와 협력하게 되면, 유사시 육로로 프랑스와 스페인을 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으흠.”

여왕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윌슨 크라몬드를 제거하는 일은 차도살인, 조지 크라몬드와 해싱턴 공작에게 맡기세나. 우리가 나서 손을 더럽힐 이유가 없어.”

여왕의 말에 웨즐렌 백작이 음흉하게 웃었다.

“탁월한 안이십니다, 전하. 조지 크라몬드는 조금만 등을 떠밀면 제 탐욕에 들떠 제 형을 죽이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고, 해싱턴 공작은 또, 기이한 순정파가 아닙니까? 제 검은 짐승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희한한 위인이니까요.”

두 사람은 함께 짜낸 모략에 감탄하며 함께 샴페인을 들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웨즐렌 백작이 물었다.

“그런데 전하, 마치 후작을 다시 불러올릴까요? 펠릭스 페일른이 크라몬드 백작과 나가 있는 틈을 타 간신히 청어 좀 팔아서 수도 체류 비용을 마련했다는 서신이 왔습니다.”

여왕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털 빠진 수탉 같이 꽥꽥거리는 후작이 딱히 아쉬운 건 아니었다. 단지 한 가지, 요새 새로운 유흥거리가 좀 없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아니, 좀 나중에. 더러운 남색가를 잡아 족치는 중이 아닌가. 수도 상황이 좀 정리되면 부르지.”

권력의 명운을 건 정치 싸움을 할 땐 잠시 춘흥은 잊어야 한다는 것이 여왕이 엄격하게 지키는 룰이었다.

* * *

해싱턴 공작이 여왕의 개인 알현실에 드니, 웨즐렌 백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께선 몸이 편치 않으십니다, 공작 각하.”

여왕이 나올 수 없다는 말에 해싱턴 공작은 흥, 코웃음을 쳤다.

“랜돌프 웨즐렌 백작, 차마 여왕께서 입에 담지도 못할 일을 내게 시키려는 모양이신가 보구려. 들어나 봅시다, 어디.”

“에이, 설마요. 해싱턴 가문이야 말로 오랫동안 우리 브리티나의 버팀목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번 대에 와서 안타깝게도 서로 반복하는 과거가 있었지요. 우리 전하께서는 어릴 적 친우였던 엘렌을 내내 해외에서 떠돌게 하신 것에 큰 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

의중을 짐작할 수 없게 장황하게 길어지는 의뭉스러운 말속에서 여동생 엘렌이 언급되자 해싱턴 공작은 말없이 정신을 가다듬었다.

닐을 사랑하면서 얻은 상처 때문에 세상에 염세적인 해싱턴 공작이 강력하게 집착하는 것이 동생 엘렌과 조카 펠릭스였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우리 전하와 엘렌이 좀 친했습니까? 템슨 가문의 일만 아니었다면 내내…….”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백작.”

낯짝도 두껍지. 끝까지 용서하지 않아 결국 병든 몸이 되어서야 그것도 이름을 숨기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엘렌을 두고.

공작이 무뚝뚝하게 재촉하자 웨즐렌 백작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 전하께선 엘렌 해싱턴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싶어 하십니다. 엘렌의 소중한 아들 펠릭스가 마트비아의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전하께서 직접 나서시겠다는 것이지요.”

흥. 해싱턴 공작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여왕의 구린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다.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충동적으로 한 것은.

“우리 펠릭스에겐 그 나름의 계획이 있고 또 이미 정혼한 여인도 있소, 백작. 나는 내 조카의 꿈과 사랑을 깰 생각이 없습니다.”

“깨셔야 합니다! 해싱턴 공작 각하!”

빙글빙글 사람 좋게 웃던 웨즐렌 백작의 얼굴에서 단번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여왕의 심복으로 필요하다면 그 누구라도 잡아다가 탑에 가두고 영혼까지 파괴할 고문을 서슴지 않는 살인 개의 살기가 대번에 뻗어 나왔다.

웨즐렌 백작이 손가락 마디를 뚜두둑 꺾으며 경고했다.

“그 꿈과 사랑이 깨지지 않으면 공작 각하의 검은 애완 동물이 산산히, 아주 고통스럽게, 서서히, 오랜 기간에 걸쳐 부서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네!”

“당장 행동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각하. 그러나 곧 결단의 때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때 스러져 가는 여동생과 여전히 아름다운 검은 사랑을 위해 최선의 결단을 내리실 거라 믿습니다, 각하. 모두를 살리는 현명한 결단 말이지요.”

웨즐렌 백작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이만 나가 보란 퇴궐 명령이었다.

해싱턴 공작은 휘청거리며 궐을 나왔다. 등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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