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58화 (58/112)

#제58화. 음탕한 방탕의 흥분

[그리운 나의 다이앤.

나의 손길에 헐떡거리던 네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난 개처럼 발정이 나.]

이 미친 변태 새끼가.

첫 줄을 읽자마자 다이앤은 편지를 와락 구기고 말았다.

그간은 제법 예의를 갖춰 편지를 보냈었다.

샬럿과 수잔이 빈틈없이 감시를 해 조지의 서간은 짐머 왕자와 자주 가는 케이크 제과점의 점원을 통해야 받아야 했다.

혹시라도 중간에 남의 손에 들어갈 가능성을 염려해서인지 그저 삼촌이 조카한테 안부를 묻는 내용이 거의 다였다.

물론 중간에 암호처럼 몹쓸 내용을 끼워 넣긴 했었다.

[네가 고귀한 신분이 되어 모든 걸 누리는 걸 상상해 봐, 다이앤. 네가 겪었던 일들, 설움들 모두 타인의 것이 된다는 걸 떠올려 봐, 다이앤.]

이런 문구로 그들의 미래를 함께 꾸며 보자는 제안을 했지만, 다이앤은 답장하지 않았다.

다이앤은 정말로 짐머 왕자와의 혼인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짐머 왕자는 이제껏 겪어온 사내들과 결이 아주 달랐다.

“나는요, 다이앤. 그대를 보면 여기가, 여기가 뻐근하게 아파요. 아 태어나길 잘했다 가슴이 마구 쿵쾅거려요.”

제 가슴에 손을 대면서 정말로 행복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맑은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래. 이런 눈동자가 주는 따스한 애정 안에서 오롯하게 평온한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재물로 부려보는 사치라면 부릴 만큼 부려 보았고, 냉정하지만 올곧은 일레인과 대책 없이 따스하기만 한 윌슨 백작이라면 지참금도 아주 넉넉하게 챙겨 줄 거였다.

‘그런데 가슴이 뛰지 않아.’

그게 문제였다.

짐머 왕자에겐 가슴이 뛰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신사 같기만 해서 그런가 싶어 커피 하우스의 밀실에서 잠시 수잔과 시녀들에게 호두 파이와 블루베리 파이를 사 오라고 내보내 놓고 다짜고짜 키스를 퍼부어도 봤다.

그런데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니, 점심 만찬으로 함께 들었던 도미 버터 구이에 뿌렸던 후추 냄새가 역겹기까지 했다.

하다못해 조지 그 개놈의 손길에도 대책 없이 끓어오르던 육체가 선량하고 따스한 짐머에겐 왜 이렇게 냉랭하기만 한가.

다이앤은 진실로 괴로웠다.

이 남자라면 평생 여왕처럼 군림하면서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좋아지지 않는가. 왜 육체적인 끌림이 하나도 안 생기는가.

‘빌헬름에게선 시선만 받아도 짜릿짜릿 열이 올랐는데.’

브라바트의 빌헬름 대공자를 생각하자 가슴이 체한 것처럼 답답해졌다.

그날 밤 이후 빌헬름에게선 딱 한 번 서신이 왔었다.

[후회할 거야, 다이앤. 나의 로열 미스트리스가 되지 않은 걸 후회할 거야. 난 알 수 있어, 다이앤. 네 몸과 내 몸은 돌쩌귀처럼, 볼트와 너트처럼 아주 환상적으로 맞으리라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바라는 것이 몸임을 확실하게 밝히는 서신이었다.

커피숍의 직원에게서 밀납으로 봉인된 그 편지를 받았을 때, 다이앤의 심장은 쿵쾅쿵쾅 터질 듯 뛰었었다.

“다이앤, 내 사랑. 왜 이렇게 열이 오르는 거지요?”

짐머가 어디 불편한지 걱정할 정도로 숨을 헐떡거렸다.

고작 편지 하나에도 욕망에 미쳐 헐떡거리게 만드는 사내는 오로지 자신의 몸만을 바라고.

아무런 느낌도 일으키지 못하는 사내는 영혼까지 다 바칠 정도로 자상하게 헌신적이다.

이 무슨 개 같은 모순인가.

다이앤은 절망하고, 또 절망한 만큼 화가 났다.

왜 나는 이렇게 아름답게 태어났는데도 고작 손에 쥘 수 있는 게 몸만 바라는 탐욕스러운 첩 자리나, 아니면 거렁뱅이 왕자 따위인 것인가.

정말로 내가 윌슨 크라몬드 백작의 핏줄이었다면 빌헬름이 나를 대공비로 삼아줄 터인데.

짐머와의 약혼이 기정사실이 되어 가면 갈수록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커졌다.

간신히 윌슨 백작의 해적 소탕이 성공한 후로 약혼을 미루긴 했는데, 그 이후에는 정말 어찌 해야 하는가.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부러 더 짐머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그러면 또 짐머는 어쩔 줄 몰라 얼굴을 붉히면서 간신히 손을 잡아왔다.

손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 숙맥이라니.

그런 와중에 도착한 조지의 서신이 이렇게 역겨운 말로 시작하다니.

분노하는 순간, 그러나 다이앤의 저 깊은 곳은 벌써 짜릿짜릿 흥분하여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날 밤. 조지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파고들며 자극하던 느낌이 순식간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나중에는 혀로 나의 그 은밀한 곳을 자극할 때 펑펑 머릿속엔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아찔한 흥분이 타올랐다.

하으읏 등이 절로 들썩거릴 만큼 흥분하여, 나는.

하아.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숨이 가빠진다.

다이앤은 흥분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구잡이로 구겼던 조지의 서신을 다시 펼쳤다.

[넣어 봐, 다이앤. 너의 그 하얗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내 손길이 닿았던 그 어여쁜 곳에 넣어 봐.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는 거야. 그날 밤. 내가 너의 귓불에 더운 숨을 뿜으며 그리했던 것처럼. 나의 혀가 뜨겁게 파고들어 빨아대었던 것처럼.]

이, 이, 변태 새끼가.

그러나 마음과 달리 편지를 쥐지 않은 왼손은 슬금슬금 드레스 안을 파고들었다.

[다이앤, 그리고 짜릿한 흥분 속에서 헐떡이며 그려 봐. 네가 크라몬드 백작 부인이 되고, 나는 크라몬드 백작이 되어 뜨겁게 즐길 그 밤들을.

그 허여멀건한 맥아리 없는 숙맥인 짐머인지 검머인지 하는 것과는 절대 누릴 수 없는 사치와 향락과 음탕한 방탕의 나날을!

복수의 나날을!]

하아.

복수의 나날.

그 달콤한 복수의 나날.

나를 멸시했던 모든 것들에게 퍼붓는 복수의 쾌락!

하읏, 손가락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하으읏, 다이앤이 조지의 편지를 꽉 움켜쥐고 스스로 주는 쾌락에 몸을 떨 때였다.

“아가씨! 일레인 아가씨가 뵙자셔요.”

밖에서 수잔이 외치는 말에 다이앤의 흥분은 급격하게 식고 말았다.

“지금은, 으흥, 안 돼.”

일단 거절하며 다이앤은 편지를 침대 매트리스 밑으로 구겨 넣었다. 그리고 서둘러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다이앤, 의논할 것이 있는데. 그럼 언제가 좋아? 나 이따가 릴리 궁에 가서 그림 손봐야 해서 시간이 많지 않아.”

차분한 일레인의 목소리가 다시 문밖에서 들려왔다.

“잠깐, 기다려!”

급하게 창문을 열어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불온한 냄새를 지우고, 다이앤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수잔, 차를 좀 내오렴.”

제 시녀 부리듯 아무렇지도 않게 수잔에게 차를 부탁하고 일레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찬찬히 다이앤의 방을 훑었다.

마호가니로 튼튼하게 짠 가구 몇 개와 야생 데이지 정물화, 그리고 펠릭스가 턱을 괴고 정면을 응시하는 작은 초상화만이 걸린 소박한 일레인의 침실과 달리, 다이앤의 침실은 온통 화려한 레이스 캐노피에 프랑스에서 수입해 온 티 테이블 등으로 꽉 차 있었다.

괜시리 찔린 다이앤이 벌컥, 왜 그렇게 한심하단 눈으로 내 침실을 훑어보냐고 화를 내려 할 때였다.

“저번에 엘리자베스 궁에 초대받아서 갔었는데 파리에서 들여왔다는 서랍장이 아주 멋있더라. 검은 옻칠을 한 서랍장인데 가장자리와 다리에 차이나에서 수입한 자개를 붙여서 굉장히 이국적으로 아름다웠어.

언니 혼인할 때 가지고 가서 꾸미면 좋겠다. 가구는 제작에 시간이 걸리니까, 내가 오늘 가서 엘리자베스한테 팸플릿을 얻어올게. 리센 부르흐 가문의 장인들 작품이 좋다나 봐.”

트집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다이앤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다이앤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일레인이 말을 이었다.

“리센 부르흐 작품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누구라더라? 외벤인가 하는 장인들의 가구도 훌륭하더라. 특이하게도 큐브를 수천 개 조각해 짜 넣은 듯 무늬를 넣고 기계 장치도 있어서 버튼을 누르면 저절로 서랍이 열리기 해. 모두 아름답고 세련되어서 언니의 아름다움과도 잘 어울릴…….”

“너, 너! 나한테 왜 이래?”

비명처럼 다이앤이 절규했다.

“왜 이렇게 너만 착한 척을 하냐구? 왜 나만 나쁜 년을 만들어!”

다이앤이 와락 일레인의 드레스 깃을 움켜쥐었다.

“너 정말 재수 없다! 아주 치가 떨려. 뭘 그렇게 잘나서, 너는, 뭘 그렇게 잘나서!”

나를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 거야.

대체 왜! 왜!

일레인의 어깨를 마구 흔드는 다이앤의 푸른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쏟아지는 듯했다.

분노와 서글픔이 함께 뒤섞인 강렬한 몸짓에 일레인은 순간 말을 잃었다.

“다이앤! 왜 이래? 정신 차려!”

일레인은 다이앤을 힘주어 껴안았다. 가녀린 다이앤의 온몸이 부들부들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금세라도 허물어질 듯 부들부들 떠는 자매의 몸에, 일레인은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먹먹한 연민을 느끼고 말았다.

“정신 차려, 다이앤. 괜찮아. 괜찮아. 쉬이. 쉬이.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뭐가 다 괜찮아진다는 거야. 네가 말한 그 어여쁘고 눈 튀어나올 만큼 필시 비싼 가구들을 바리바리 싣고 바다 건너 그 외딴 시골, 짐머 왕자의 영지에 가면.

없던 사랑이, 느끼지 못하는 흥분이 생기기라도 한다는 거야.

“으흐흐흑.”

다이앤은 서럽게 울고 말았다.

자기도 일레인처럼 선량하고 싶었다.

자신도 일레인처럼 꿀 떨어지는 애정을 담고 모든 걸 내던져 줄 듯 뜨겁게 사랑을 주는 연인이 가지고 싶었다.

자신도 일레인처럼, 처음부터 백작의 핏줄로 태어나 모두의 환대를 받고 싶었다!

“너는 몰라. 너는 몰라, 일레인! 너는 죽어다 깨나도 모른다고, 내 이 기막힌 심정을! 으어어엉.”

다이앤이 손으로 눈을 가리며 울었다.

손끝에는 시큼한 음부의 냄새가 타락하고 더러운 제 마음처럼 풍기고 있었다.

너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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