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나보다 더 나를 잘 알아봐 주어
그 어린 일레인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그 구절을 읽는 순간 홀로 어려움을 견디던 어린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여덟 살의 어린 주인을 깔보는 늙은 하녀의 차가운 눈빛. 샬럿 고모님의 매서운 질책. 툭하면 무너져 울부짖는 엄마의 무기력감. 좋은 건 혼자만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려대던 다이앤.
그리고 다정하지만 언제나 멀리 있던 아빠.
그 속에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고 버티던 그 어린아이의 막막함이 너무도 생생하게 되살아나, 일레인은 순간 가슴을 탁탁 치고 말았다.
일레인도 존재하고 있는지 모르던 그 어린아이를, 마음 저편 구석에서 숨죽이며 매 순간 상처를 곱씹던 아이를.
펠릭스는 어찌 찾아내 이렇게 따스하게 위로해 주는가.
마음 한구석에 옹이진 채 딱딱하게 굳어졌던 설움의 덩어리가 말랑거리며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간신히 눈물을 그치고 일레인도 펠릭스에게 답장을 썼다.
[펠릭스.
나보다 더 나를 잘 알아봐 주어 고마워요. 그리고 당신 안에도 홀로 웅크리고 울고 있을 그 어린 펠릭스를, 이제는 내가 따스하게 안아 줄게요.
사랑해요, 펠릭스. 보고 싶어요.
무사히, 이기고 돌아와요!
당신의 여인, 일레인.]
편지를 봉인한 다음, 일레인은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가져갈 펠릭스의 초상화에 보존제 처리를 하기 위해 작업실에 갔다.
정원을 할퀴고 가는 겨울 바람이 더는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작업실에 들어와 일레인은 우선 두꺼운 모슬린 천으로 입부터 가렸다. 보존제는 유독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꼼꼼하게 코와 입을 가린 후, 일레인은 유광 보존제와 무광 보존제를 각각 오목한 접시 위에 충분히 따르고, 넓적한 붓을 들고 초상화 앞에 섰다.
‘나는 너를 가질 거야, 일레인. 널, 내 품에서 웃게 할 거야.’
그림 속의 펠릭스가 검푸른 눈을 빛내며 일레인에게 고백하고 있다.
일레인은 그리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으로 아스라이 펠릭스의 얼굴이 만져지는 듯했다.
일레인은 눈을 감고 펠릭스를 떠올렸다.
내 몸을 다정히 훑던 검푸른 눈동자와, 뜨겁게 부딪쳐오던 아름다운 입술과, 목을 핥아 내리던 혀와, 망설이다 우연인 듯 슬쩍 가슴을 스치던 그의 손길까지.
모든 것이 펠릭스의 에로스 그림 속에서 마법처럼 새어나 일레인의 몸과 마음을 뜨겁게 달궜다.
* * *
“저기 작은 섬이 모로코에 기반을 둔 바르바리 해적놈들의 근거지입니다, 백작 각하.”
유럽 최고의 용병대장 알베르토 경이 크라몬드 백작에게 기다란 만원경을 건넸다.
윌슨 크라몬드 백작은 건네받은 망원경으로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항구 연안을 살폈다.
“민가가 제법 있는데. 대포를 퍼부으면 무고한 자들이 상할까 걱정이네만.”
“하아, 백작 각하. 해적 근거지에 사는 놈들 중에 무고한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해적이거나, 자라서 해적이 될 새끼를 키우고 있는 해적 마누라거나, 해적질을 돕는 걸로 생계를 꾸리는 예비 해적이거나겠지요.”
“…….”
맞는 말이지만 선량한 백작은 섬 전체를 초토화시킬 만큼 대포를 퍼붓는 건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알베르토, 백작 말씀이 옳아. 여긴 브리티나가 아니니 너무 심한 포격은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상황을 지켜보던 펠릭스가 개입했다.
그러자 알베르토가 상스런 욕을 내뱉었다.
“아나, 이래서 귀족들은 안된다니까? 그래서 신사 짓꺼리 하다가 빼앗겼던 선박들 회수도 못하면 전리품 받을 꿈 거하게 꾸던 마틸다 여왕이 퍽이나 좋아하겠수다. 해적들은요? 왠 상등신 백작이 저리 물러터지니 이제 크라몬드 상사의 상선이 지날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어이, 알베르토. 신소리 그만하고. 민가가 제법 되어서 포격이 불가능 하니 대포알 빼돌릴 수 있겠다고 어제 술 먹으면서 낄낄대는 거 내 다 들었네.”
펠릭스가 핀잔을 주자, 알베르토가 침을 탁 뱉으면서 중얼거렸다.
“술이 웬수야, 웬수! 이 주둥아리!”
“알베르토 경. 머스킷 총과 총알 상륙선에 실어두었잖아. 사격 솜씨 좋은 자들과 근접전에 능한 자들로만 추려서 데려온 것도 내 알아.”
펠릭스가 알베르토에게 눈을 찡끗해 보였다.
“아이, 참 그 눈구녕 아무데서나 찡긋하지 말라고 내가 했지? 확 덥쳐 버릴까부다!”
“안 되네. 펠릭스는 내 딸아이의 사내야. 자네가 넘보고 그럴 사람이 아닐세. 자, 그럼 상륙해 볼까?”
이제까지 알베르토가 한 말이 모두 펠릭스에게서 돈을 더 받아내기 위해 늘어놓은 사설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윌슨 크라몬드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명을 내렸다.
그러자 이제까지 유들유들, 여인이면서도 딱 붙는 가죽 의상에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던 알베르토가 싹 달라진 얼굴로 허리춤에 찬 뿔나팔을 입에 물었다.
뿌우뿌우.
뿔나팔이 울리자 거대한 상선에서 척척, 상륙에 쓰이는 작은 보트들이 내려졌다.
곧 작은 해적섬 연안이 작은 보트들로 까맣게 뒤덮였다.
백작은 언제 흰소리를 했냐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해적 섬을 응시하고 있는 알베르토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백작의 시선을 느낀 알베르토가 고개를 돌리고 희죽 웃었다.
“뒤쪽의 해군 전열함은 신경 쓸 필요 없수다, 백작 각하. 함부로 개입하려 들었다간 귀국하는 길에 반드시 암초를 만나 뒈지게 될 거라고 말해 두었습죠. 조지인지 좆인지 하는 놈은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는, 아 그런 놈을 보내구 그랴, 이 위대하신 알베르토 님이 해전을 지휘하는 걸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그런 너절한 놈에게 주다니! 뭐여, 마틸다 여왕이 음탕해 빠져서는 이놈 저놈 실한 놈이라면 마구 취한다더니 매독에 걸려머리통이 녹아 버린 건가?”
어이구, 저 주둥아리.
펠릭스는 용병대장의 거친 입 때문에 혹여 백작이 자신을 사위로 탐탁지 않아 할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
“거 입 좀 닥치고 전투에나 집중하라고, 알레트로! 전투 시간이 늘어지는 것도 다 돈이야, 돈!”
“네가 들인 돈 백 배는 벌어줄 수 있거든? 손 대는 것마다 수십 배씩 불리면서 맨날 돈돈 거리기는.”
투덜대면서도 다시 섬 쪽으로 시선을 향하는 알베르토 얼굴이 다시 진한 살기를 띠며 날카로워졌다.
펠릭스는 주섬주섬, 장차의 장인께서 알베르토를 보고 자신마저도 꺼릴까 변명을 해 주었다.
“백작님, 입은 부실해도 전투 솜씨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용병대장입니다. 덕분에 신속하게 전투 끝내버리고 잃어버렸던 물품과 선박, 그리고 해적들이 그간 쌓아 놓은 전리품까지 모두 가져갈 수 있을 것입니다.”
펠릭스는 정말로 어서 전투를 끝내고 백작과 함께 루덴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가서 품 한가득 일레인을 안고, 일레인 특유의 물감 냄새 섞인 체향을 폐부 깊숙하게 들이마시고 싶었다.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어떻게 많은 재물을 쌓든,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연인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기쁜 일이 있을까.
“네가 그립다, 일레인.”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일레인을 부르고 말았다.
“…….”
크라몬드 백작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백작의 입가는 어느새 흐뭇한 웃음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바이올렛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던 젊은날의 자신처럼, 우리 둘째 일레인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잘난 청년을 보는 마음이 흐뭇했다.
게다가 저리 실력 있는 용병단까지 거느린, 인물에서 성품, 재물과 권력에 이르기까지 이제 죽어도 안심하고 식솔을 맡길만한…….
어허!
바다 한가운데에서 죽음을 떠올리다니.
바이올렛이 아주 기쁜 소식이 있다고, 돌아오면 말해 주겠다고 다정한 편지도 보내왔는데.
크라몬드 백작은 고개를 저어 불길한 생각을 털어 버리고, 마침 섬에 상륙하기 시작한 용병들을 응시했다.
작은 보트에서 내린 용병들은 차가운 겨울 바닷물에도 아랑곳없이 첨벙거리며 해안 항구로 몰려가며 타당탕탕 요란하게 총을 쏘아 대었다. 총병 뒤로 긴 칼을 든 도병들이 뒤이어 상륙해 혼돈에 빠진 해적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간밤, 먼저 섬에 침투한 잠입 용병들이 화약 보관소에 바닷물을 뿌려놓았던 탓에 해적들은 제대로 총 한 번 쏘아보지 못했다.
한 시간이 되지 않아 해적의 우두머리까지 모조리 포박당해 백작 앞으로 끌려왔다.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서 망원경으로 전투를 지켜보던 조지 크라몬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조지가 지휘하는 브리티나 해군의 전열함은 전투 현장에 얼씬도 하지 말고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경고를 알베르토 용병대장한테서 받았다.
“용병단의 전투 전술은 일급비밀이여, 일급비밀! 어디서 남의 영업 기밀을 훔쳐볼라고! 확! 마!”
살벌하게 손을 치켜드는 유럽 최고의 용병대장이 무서워서, 조지 크라몬드는 실수인 척 백작이 탄 배에 대포알을 날려 버리란 여왕의 지시를 이행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 사는 게 우선이지. 살아 있어야 백작도 되고, 우리 어여쁜 다이앤의 몸도 맛볼 수 있는 거 아닌가.”
다이앤을 떠올리자 조지의 아랫도리가 묵직하게 부풀었다.
천사 같은 얼굴로 자극하는 대로 흐트러져서 앙앙 흥분한 교성을 내지르던 게 얼마나 매혹적이던지.
제 어미를 닮아 음탕하기는.
사실 조지 크라몬드는 오랫동안 백작 부인 바이올렛을 탐내왔다. 몇 번 수작을 부려 보았지만, 우울증에 미친 것처럼 발작하면서도 바이올렛은 그런 면에서는 또 철저하게 방비를 했다.
그러나 늙은 어미보다 더 야들야들한 어린 것을 손에 넣었으니.
다행히 바이올렛은 아들을 가지지 못하는 석녀이니, 윌슨의 공이 커 저 해적들의 전리품을 거둬들이면 들일수록 다 내 것이 될 것이다.
조지는 느긋해져서 마틸다 여왕을 알현하던 밤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