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발정 난 개처럼 몸만
“여기서 기다려. 부를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마.”
일레인은 명을 내리고 들고 온 상아 칼집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귀한 금속으로, 천 년이 지나도 녹이 슬지 않는 운철로 만들어진 단도로, 펠릭스가 이집트 파라오가 쓰던 거라며 선물해 준 거였다.
‘그 고귀한 파라오의 칼을 이런 데다 쓰게 되다니. 우주를 가로질러 온 보람도 없지.’
헛웃음을 흘리며 일레인은 단도 손잡이를 단단히 잡고 쾅, 다이앤의 침실 문으로 발을 날렸다.
“꺄아, 뭐, 뭐야, 수잔!”
다이앤의 비명이 들렸다.
방 안에도 용연향과 쟈스민 향이 뒤섞여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침침한 불빛 아래, 딱 붙어 앉아 있는 남녀가 보였다.
다행이 다이앤은 아직 드레스를 다 입고 있었다.
가슴은 훤히 풀어 헤쳐져 있었지만, 가슴 따위!
일레인은 성큼성큼 들어가 다이앤 옆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려는 사내의 목에 칼날을 들이댔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빌헬름 전하가 아니십니까?”
“어, 어엇. 일, 일레인 영애.”
“전 또 어떤 무뢰배가 감히 크라몬드 가문의 장녀 거처에 숨어 들었나 걱정되어 달려왔어요.”
말은 자못 공손했지만, 목에 들이댄 단도는 더욱 깊게 살을 파고들었다.
“무, 무엄하오, 일레인 영애. 이거 치우시오!”
“정신 나갔어, 일레인? 어떻게 대공자 전하께 이런 무례한 짓을 할 수가 있어?”
“다이앤, 전하께서 방문하셨는데 케이크과 차도 대접하지 않다니, 그게 훨씬 더 무례한 일인 거 같은데.”
여전히 칼날을 들이댄 채 여유 있게 대꾸하는 일레인을 보며, 빌헬름 대공자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절감했다.
한밤중에 초대도 받지 않고 귀족 영애의 침실에 들다니. 잘못하면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큰 문제였다.
“일레인 영애. 아직 국혼이 확정되지 않았소. 그래서 나는 다이앤을 보러…….”
“그래요? 그것 참 반가운 말씀이시네요, 전하. 그렇게 좋은 소식을 알려 주고자 한밤중에 서둘러 달려오신 거로군요. 그럼 제가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뷰컴!”
“예, 아가씨!”
밖에서 우르르 뷰컴과 건장한 사내 셋이 들어왔다.
“대공자 전하께서 다이앤에게 청혼서를 쓰시겠다고 합니다. 종이와 펜, 크라몬드 가문의 인장도 준비해 주세요.”
대충 변명해서 이 위기를 벗어나려던 브라바트 후계자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무, 무슨 약조를 한다고. 칼날 내려, 일레인 영애. 나는 브라바트 공국의 후계자야!”
“대공국의 후계시니 말씀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에도 공국을 대표하는 권위가 있으시단 말씀이지요? 청혼을 위해 이리 어둠을 헤치고 오셨으니, 예의를 다해 도와드리려는 것입니다, 전하.”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일레인은 칼날을 더욱 바싹 빌헬름의 목에 들이댔다.
정말로 신이 내려 준 선물이라더니, 운철로 만든 칼날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살짝 대기만 했는데도 벌써 대공자의 목에 실금이 갔다.
잘 손질된 은빛 칼날을 타고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자, 잘못했소, 영애. 그, 그러니까 이 칼은 치우고. 제발!”
빌헬름 대공자가 가여운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러나 표정과 달리 손가락은 허리춤에 달린 호출용 풀피리를 향해 슬금슬금 기어갔다.
일레인은 발을 들어올려 빌헬름 공자의 손가락을 꾹 짓누르며 이죽거렸다.
“전하, 추운 밤 밖에서 고생하는 전하의 호위병을 어찌 그냥 보기만 하겠습니까? 저희 크라몬드 가의 시종들이 지금 따끈한 꿀차와 몸을 덥힐 수 있는 호박 수프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실은 이미 결박하여 정원 창고에 가둬 두었지만.
마침 돌아온 뷰컴이 종이와 잉크, 펜 등을 올린 작은 이동용 책상을 빌헬름 앞에 놓았다.
부러트리기라도 할 듯 손가락을 발로 누르며, 일레인이 명령했다.
“전하, 쓰시지요. 나 빌헬름 폰 비렐리는 다이앤 크라몬드를 아내로 맞이할 것을…….”
“장난은 이쯤 하지, 일레인 영애.
브라바트의 빌헬름 대공자는 이제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내가 어찌 다이앤과 정식으로 혼인을 한단 말인가. 귀천상혼인데.”
“빌헬름!”
비명을 지르며 다이앤이 빌헬음의 무릎을 껴안았다. 덕분에 칼날이 조금 더 깊게 빌헬름의 목을 파고들었다.
또 뭉텅, 이번엔 제법 많은 양의 피가 칼날을 타고 흘렀다.
“사랑한다고, 나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좀 전에 맹세하셨잖아요.”
“다이앤, 내 사랑! 그 어여쁜 머리통으로 잘 생각해 보시오. 그대가 원하는 건 브라바트 공국의 후계자인 대공자이지, 남작 나부랭이로 강등될 내가 아니잖소.”
“이, 거짓말장이!”
다이앤이 화를 내며 빌헬름의 목을 조르려 했다.
일레인은 칼을 치우고, 한숨을 쉬며 발을 옮겨 다이앤을 저지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청혼하길 바랐건만.’
낯선 하녀로 분장한 빌헬름의 심부름꾼이 ‘오늘 밤 찾아올 것이니 기다리라’는 말을 전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미친 짓거리가 일어나게 놓아둔 건 다이앤을 위해서였다.
정말로 빌헬름이 다이앤을 사랑한다면.
아빠 윌슨 백작이 만신창이가 된 엄마 바이올렛을 꿋꿋하게 지켜낸 것처럼, 빌헬름이 대공의 후계자 직위를 포기하면서까지 진실로 다이앤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만에 하나 정말로 그러하다면.
일레인은 가문의 위험을 감수하게 되더라도 온 힘을 다해 두 사람을 도울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런 달콤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빌헬름 이 개자식은 그저 발정난 개처럼 다이앤의 몸을 노리고 달려든 거였다.
분노한 일레인의 칼이 금세라도 찌를 듯 빌헬름의 목에 다가왔다.
“일레인 영애, 오늘 일에 대해선 크게 배상하겠소. 이만 칼날 치우고 날 보내 주시오.”
“보상이라니요? 우리 크라몬드 백작 가에 어떻게 보상하신다는 거지요? 항구 하나라도 내놓으실 작정이십니까?”
‘말로는 안 되는군.’ 이렇게 결론을 내린 브라바트 대공자는 손으로 칼을 밀어내며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페닝엄!”
그러자 응답처럼 지붕 위에서 탕탕, 총소리가 들렸다.
이에 응전하는 머스킷 총 소리가 크라몬드 백작 저택 옆 숲속에서도 탕탕탕 들렸다.
멀리멀리 퍼져 3~4km 밖 다른 귀족 저택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일레인이 미리 안배해 놓은 총성이었다.
일레인은 뷰켬과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이걸로 오늘 일은 빌헬름 대공자의 일방적인 침입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되었군요.’
이제 슬슬 이 씁쓸한 연극도 막을 내려야 할 때였는데 때마침 저 개자식이 제 역할에 맞게 호응해 주었다.
“대공국의 후계가 아무렴 제대로 된 호위군도 없이 움직일까? 일레인 크라몬드, 감히 대공자의 목에 칼날을 들이대다니! 크라몬드 백작가는 영애 때문에 망하게 될 거야!”
“누구 마음대로!”
입구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들렸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해밀턴 후작이었다.
그 뒤엔 수면 가운을 단단히 여민 샬럿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다이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공국의 후계자라 해도 한밤중 귀족가 여식의 침실에 숨어든 죄를 벗어날 순 없습니다, 전하. 크라몬드 백작 가문과 해밀턴 후작 가문 차원에서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해밀턴 후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거친 발소리와 함께 청록색 근위대장 복장을 한 중년의 사내가 뛰어 들어왔다.
“빌헬름 전하! 여봐라!”
그러자 머스킷 총을 장전한 마트비아 근위병 스무 명가량이 우르르, 진흙을 잔뜩 묻힌 장홧발로 쳐들어왔다.
찰칵, 소리와 함께 스무 정의 총신이 일레인과 해밀턴 후작을 향해 겨눠졌다.
“저는 브라바트 대공자 전하의 호위대장 칼루니 막스입니다. 일단 일이 이렇게 되어 진심으로 송구합니다만,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갈 경우 서로에게 큰 해만 된다는 걸 인지하시고 움직여 주십시오!”
사태를 수습하고자 이마에 식은땀을 매단 채 설득하는 중년 사내의 군복에서 금빛 견장이 번쩍거렸다.
“대공국 국본의 호위대장이란 자가 여인을 겁탈하러 오는 행위 따위에 총 들고 호위를 서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일레인이 이죽거리자, 찔끔한 중년의 사내는 무서운 눈으로 일레인을 쏘아보았다.
“칼부터 치우셔야 합니다, 영애.”
해밀턴 후작이 일레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노련한 후작은 눈치가 빨랐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일레인이 미리 총기를 든 하인들 몇을 숲에 보내, 갈등이 심각했음을 입증할 수 있도록 총성을 울리도록 미리 안배해 둔 걸 단박에 알아챘다.
일레인이 천천히 단도를 내렸다.
그런데, 빌헬름 개놈은 끝까지 개새끼였다.
“내가 온 것도 잘한 것은 아니지만, 나를 들인 건 다이앤이요. 귀족이라면 마땅히 대륙 왕실의 귀천상혼 금지법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면서!”
대공자는 치사하게도 잘못을 다이앤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왕권이 늦게 확립된 브리티나는 비교적 왕족과 귀족 간의 결혼이 자유로왔지만, 브라바트 공국이 속한 대륙에선 여전히 엄격하게 귀천상혼 금지법을 준수한다.
왕위나 대공 직위 계승권자가 같은 지위의 왕족이 아닌 귀족이나 평민과 결혼하면 계승권을 박탈하는 법이었다.
일레인은 빌헬름이 계승권을 포기할 정도로 다이앤을 사랑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렇지만 어떤 사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오는데 저렇게 근위병까지 대규모로 끌고 오나. 한밤의 밀회가 탄로가 신변이 위험해지면 총을 쏴서라도 벗어날 작정이었던 거다.
일레인은 새삼 분노가 치밀어 단도의 상아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런데 빌헬름 대공자는 일레인의 예상보다 더 뻔뻔했다.
“그러나 내가 널 사랑하는 건 사실이야, 다이앤. 그러니까 나의 로얄 미스트리스가 되어줘, 응?”
“하!”
빌헬름 대공자는 일이 이렇게 되자 아예 다이앤에게 첩이 되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크라몬드 가문을 뭘로 보고!
화를 참지 못한 일레인이 운철 단검을 높이 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