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49화 (49/112)

#제49화. 가질 수 없으면 망가뜨린다!

“왕자 전하께서 와 계시단 소식을 듣고 기쁘게 입고 왔습니다.”

다이앤이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 살짝 고개만 들어 짐머 왕자를 향해 수줍게 웃었다.

“잘, 잘 어울려서 다, 다행이오, 영애.”

짐머 왕자는 발그레 얼굴을 붉혔다. 다이앤을 보는 왕자의 눈에는 벌써 열렬한 사랑이 가득했다.

‘짐머 왕자는 좋은 사람이구나.’

일레인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이앤은 기분의 변화가 극심하고 때로 지나치게 예민했다. 그런 다이앤을 저 여유 있게 너그러운 왕자는 잘 감싸 주리라.

안도한 일레인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누가 봐도 짐머 왕자가 다이앤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뻔했다. 그렇지만 타국 왕자의 말을 무턱대고 거짓으로 모는 건 외교적 결례이니, 엘리자베스 공주도 일단 넘어가 주리라.

‘그렇지만 더욱 큰 적의를 불태우겠지. 마틸다 여왕이 엄마라면 치를 떨듯, 이제 엘리자베스 공주도 다이앤이라면 이를 갈 거야.’

일레인의 예상대로 엘리자베스 공주의 얼굴은 차갑게 일그러져 있었다.

“왕자의 일 년 영지 수입보다 더 비싼 드레스일 터인데, 참으로 큰 무리를 하셨군요. 하긴 아라이곤 왕국의 십 년치 내탕금보다 더 큰 지참금을 가지고 갈 신부니, 이 정도 투자는 무리를 해서라도 할 만한 것이던가요?”

예의를 지켜 돌려 말하는 예법이 습관으로 배어 있을 공주가 이례적으로 신랄하게 비꼬았다.

여기저기서 피식피식 비웃음이 일었다.

그러나 짐머 왕자는 여전히 다이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서글서글하게 말했다.

“일생의 인연을 위해서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전하. 저의 기쁨이고 영광이지요.”

“…….”

“…….”

도무지 더 타박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열렬한 고백이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더 말해 봤자 외교적인 문제나 될 뿐 실익이 없다고 냉정하게 결정을 내렸다.

“크라몬드 가문의 영애들은 이제 그만 일어나도 좋아.”

다이앤은 우아하게 몸을 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었던 일레인도 천천히 일어났다.

이 정도로 넘어가다니, 정말로 짐머 왕자에게 절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레인은 여전히 다이앤에게 눈을 못 떼고 있는 짐머 왕자를 향해 감사 인사를 보냈다.

“일레인 영애.”

엘리자베스 공주가 또 일레인을 불렀다.

“예, 전하.”

이 정도로 모르는 척 넘어가 준 공주에게 일레인은 공손히 대답했다.

“나의 피앙세 빌헬름 대공자와 그 일행들께서 그대가 그린 에로스 신 그림을 보고 싶어 하시는데.”

이제부터가 공주의 응징이다. 그리고 지금 일레인은 어떤 무리한 요구도 거절할 처지가 아니다.

일레인은 입 안의 살을 씹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예, 전하. 에로스 그림은 보존제 처리를 위해 지금 한창 건조 중입니다만, 보시고 싶으시다면 다시 왕궁에 가져오겠습니다.”

“뭘 그렇게 번거롭게. 어차피 짐머 왕자를 초대하기로 한 거 아닌가? 그 김에 우리도 같이 초대해 줘.”

“…….”

일레인은 같이 초대하란 말에서 공주의 의도를 읽어냈다.

공주가 행차하면 눈도장을 찍고 친분을 다지려는 귀족가 영식과 영애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 것이다. 그렇게 어지간한 가문의 자제들이 몽땅 몰려든 연회에서 단연코 최고의 가십은 다이앤의 뻔히 속 보이는 여우짓이 될 것이다.

연회에 온 귀족 가문 영식과 영애들이 다이앤을 힐긋거리며 수군대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일레인은 일단 무릎을 굽혀 예를 표하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공주 전하와 대공자 전하를 함께 모시는 일은 저희 크라몬드 가문에 큰 영광입니다. 하여 한 치의 소홀함이 없게 준비하고 싶습니다, 전하.”

“아니, 뭘 그렇게까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일레인의 정중함에 공주는 딱히 뭐라 지적할 거리가 없었다.

“지금 저의 부친께서 해적 소탕을 위해 모로코에 가신 터라 저의 크라몬드 가문의 모든 식솔이 매일 아침 함께 기도 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또 날이 점점 추워져 정원이 지나치게 휑하고 볼품없어 공주 전하께 부끄럽기도 합니다. 하여, 공주 전하를 모시는 영광스러운 연회는 꽃 피는 봄에 해도 되겠습니까?”

“…….”

쉬운 전투라고 해도 전투는 전투. 백작이 생사를 오가는 전투에 나가 있는데 식솔들이 하하호호 웃고 즐기는 연회를 개최하는 건 보편 정서에 어긋난다.

입맛이 쓰지만 공주는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때까지 내 초상화를 완성하는 걸로 할까?”

“예, 전하. 3월이면 거의 건조까지 마무리될 것입니다.”

“그래, 그럼 모레부터 그리기로 하지. 오늘부터 시작하려고 했는데, 드레스가 영 문제가 되네.”

일정을 미루면서 공주는 은근슬쩍 다이앤의 무례를 다시 한번 지적했다.

따가운 시선이 다시 다이앤을 향했다.

그러나 진실로, 이만큼으로 마무리된 건 신의 보살핌 덕분이다.

“예, 전하. 모레 일찍 입궁하여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일레인이 고분고분 대답하자 엘리자베스 공주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일레인은 다이앤을 끌고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빌어먹을 빌헬름 자식이 다이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공주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이 꼴을 본다면!

일레인은 서둘러 청을 올렸다.

“전하,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 될는지요?”

공주는 일레인 옆에서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채 그림처럼 서 있는 다이앤을 힐끗 보았다.

갈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공주는 브리티나에서 제법 미인에 꼽히는 얼굴과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전역을 통틀어 손에 꼽히는 미모를 가진 다이앤에겐 비교가 되지 않았다.

황금빛 머리칼에 푸른색 눈동자, 허리는 한 줌이면서도 드레스 위로 드러나는 탐스러운 가슴.

저것의 어미가 저와 똑같은 미모로 아빠를 홀려 여왕인 어머니를 모욕하더니, 저것도 또한!

고개를 돌려 보니 빌헬름은 물론 작업실 안에 있는 사내들 모두 다이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공주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나 공주는 공주.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능숙하게 지어내며 명령을 내렸다.

“그래! 물러가. 초상화 그릴 준비 잘하고!”

“예, 전하. 그리고, 짐머 왕자님!”

일레인은 부러 큰 소리로 짐머 왕자를 호출했다.

“내일 점심 만찬을 함께 하고 싶은데, 혹시 시간 되시면 들러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초대였다.

공주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누그러트리기 위한 초대.

기대한 대로 짐머 왕자는 입이 귀에 걸칠 듯 환하게 웃으며 열정적으로 호응해 줬다.

“아!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일레인 영애. 그리고.”

짐머 왕자는 부러 다이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내일 봐요, 다이앤 영애.”

다이앤은 그저 가장 아름답게 웃으면서 무릎만 살짝 굽혀 인사할 뿐이었다.

빌헬름 대공자에게 가장 아름답게 보일 각도였다.

돌아오는 마차 안은 질식할 듯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입을 열었다간 쌍욕과 거친 행동이 터질까 봐 일레인은 눈을 꾹 감고 화를 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이앤이 침묵하는 이유는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장 크게 갈망하는 존재.’

나올 때 힐끗 확인한 빌헬름의 눈빛은 초조한 열망을 뜨겁게 담고 있었다.

안달이 나기도 하겠지. 자기만 바라보는 줄 알았던 여인이 다른 왕자와 혼인을 할지 모르는데 안달이 안 나고 배기겠어.

이 년 전 열렬하게 연정을 고백하며 혼인 허락을 받아 오겠다고 돌아간 후 한동안 연락이 끊겼었다.

나중에 내 눈동자와 같은 짙푸른 아쿠아마린 목걸이와 함께 공국 내 사정이 복잡해 당분간 혼인을 하긴 어렵다는 서신을 보내왔다.

그리고 지난 해 이맘 때 루덴의 커피하우스 별실에서 은밀하게 만나자고 연락이 왔었지.

달콤한 키스와 함께 내 가슴을 그렇게나 더듬어 놓고서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대공 부부의 압박이 심하여 당장은 혼인이 어려울 것 같으나 일 년, 일 년이면 될 것이라고 속삭여셔, 괜찮다고 열렬한 키스로 위로했는데.

다이앤은 자신의 연심을 가지고 논 빌헬름에게 앙심을 품었다.

‘가질 수 없으면 망가뜨린다!’

다이앤이 이제껏 가져온 삶의 자세였다.

정말로 자신을 외면하고 공주를 택한다면, 빌헬름도 마땅히 망가져야 했다!

“다이앤, 정말로 짐머 왕자와는 혼인하고 싶지 않은 거야?”

망막을 물들인 검은 어둠 속에서 한참을 흔들리며 일레인은 드디어 외면하던 진실을 확인했다.

‘아무리 피를 나눈 자매라고 해도 다이앤의 행동을 더는 묵인할 수 없어.’

다이앤이 가문을 위태롭게 하는 행동을 더는 용인할 수 없다!

일레인이 드디어 눈을 뜨고 다이앤을 바라보았다.

“아까 배려하는 걸 보니 짐머 왕자는 좋은 사람 같던데. 재산이 적은 것이 걸린다면, 언니 지참금을 우리 크라몬드 상단의 무역이나 해외 광산 개발에 투자해 불리면 되고.”

“그렇게 좋은 사람 같으면 네가 혼인하지 그러니.”

“……!”

이것이 다이앤의 사고방식이구나.

도무지 반성이란 걸 할 줄 모르는 인간. 세상에서 자신만 제일 불쌍하고 가여운 인간. 받은 사랑에 감사하기보단 받지 못한 사랑만 원망하는 인간.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 뒤엔 오로지 자신만 아는 극강의 이기주의자가 숨어 있었다.

“다이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거 알아?”

“?”

다이앤은 뜬금없는 달 이야기에 의아해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거래. 네가 최신 과학 잡지들을 읽었으면 알 이야기들이야.”

“그래서, 여기서 달 이야기가 왜 나오는데?”

“네가 그래, 다이앤. 네 이름처럼 너는 스스로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란 확신이 없어서, 늘 남이 가진 귀한 것을 빼앗으려 하지. 그래야 스스로 귀중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 그래야 네가―.”

“닥쳐, 일레인! 네까짓 게 무얼 안다고!”

아는 걸까.

일레인도 아는 걸까.

자신이 크라몬드 가의 핏줄이 아니라는 걸. 이름도 가문도 제대로 없는 천한 것들의 핏줄이라는 걸.

저게 알고!

만월의 달빛처럼 늘 은은한 아름다움을 빛내던 다이앤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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